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10화 (110/193)

110화 : 슐리펜 계획 (1)

“헉……헉……!”

피의 화요일의 혼란을 가까스로 잠재운 러시아 제국이 라스푸틴의 등장으로 또다시 파란만장한 미래를 예고하고 있을 때, 나는 다급한 얼굴로 병원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뛰지 말라고 지나가는 내게 큰 목소리로 외쳤지만, 내 귀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드르륵!

“슐리펜 참모총장님!”

“한스 군?”

병실 앞에 도착한 내가 조급한 마음에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병상에 누워 있던 슐리펜 참모총장이 나를 맞이했다.

“허허, 이거 누가 보면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겠구만.”

슐리펜이 나를 보며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없어 보이는 슐리펜의 모습에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이 나이 먹고 말발굽에 치일 줄이야. 세상 참 살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침에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듣기론 슐리펜은 평소처럼 정확한 시간에 맞춰 참모본부로 출근하던 도중 동료 장성이 탄 말에 차였다고 한다.

나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슐리펜이 목숨줄만 간신히 붙은 채 병원으로 후송되었단 소리에 당황한 얼굴로 헐레벌떡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슐리펜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능청스럽게 굴었고,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괜스레 일흔 살 넘은 노인에게 잔소리하고 말았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지만, 말에 차이는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생에 말이 발길질 한 번으로 다른 말을 죽이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슐리펜 또한 까딱 잘못했으면 영상 속에서 바닥에 쓰러져 부들거리며 목숨이 끊어진 말과 같은 신세가 됐을 것이다.

“괜찮네. 괜찮아. 이렇게 목숨줄은 잘 붙어 있으니까.”

슐리펜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입가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슐리펜의 미소는 곧 아련한 무언가로 바뀌었다.

“그래도 참모총장에선 물러나야겠지. 중임을 맡기엔 내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할 테니”

“참모총장님…….”

“하하,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가. 난 정말 괜찮네. 내 나이가 이제 72살이고, 군에만 53년을 있었어. 이제 슬슬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할 때도 되었지.”

알고 있다.

슐리펜이 원 역사에서 내년인 1906년이 되자마자 참모총장직에서 은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나 그 이유를 나이 때문으로 알고 있었기에 1, 2년 만이라도 좋으니 슐리펜보고 조금만 더 참모총장직에 머물러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슐리펜은 은퇴하고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까지 사니까.

그렇기에 조금은 그의 은퇴를 늦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슐리펜이 출근하다가 갑자기 말발굽에 치일 것을 누가 예상이나 했겠냐고!’

아무리 내가 세종대왕님의 뜻을 물려받아 사람을 굴러야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사상을 하고 있었다지만, 몸이 이 지경이 된 슐리펜에게 도저히 군에 남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면 후임은 누구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결국, 슐리펜의 은퇴를 막는 것을 포기한 나는 어두운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물론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이었지만.

“따로 후계자를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후보자는 여럿 있다네. 나와 친분이 깊은 한스 폰 베셀러(Hans Hartwig von Beseler)라든가 총리의 형인 카를 폰 뷜로(Karl Wilhelm Paul von Bülow), 그리고 폰 데어 골츠도 있지.”

“폰 데어 골츠라면 예전에 오스만 제국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던 콜마르 폰 데어 골츠 장군 말씀이십니까?”

“맞네. 사실 난 개인적으로 그가 내 후임으로 제일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카이저께선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더군.”

빌헬름 2세뿐만 아니라 나하고도 잘 안 맞을 것 같다.

콜마르 폰 데어 골츠(Wilhelm Leopold Colmar Freiherr von der Goltz)는 군국주의자인 것을 넘어 파시즘과 나치즘에도 큰 영향을 끼친 사회진화론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적자생존을 국가적 관계에 적용해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집어삼키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건 독일 군부 상당수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긴 했지만.

그러나 폰 데어 골츠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그는 대학살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그 뒤틀린 미적 감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제1차 세계대전 초창기에 벨기에 점령지 관리 책임자로서 벨기에 학살을 주도한 작자였으니까.

‘아돌프 히틀러가 동유럽에서 학살을 일으키며 이 인간에게 찬사 했다는 것부터 이미 말 다 했지.’

하지만 다행히도 콜마르 폰 데어 골츠는 빌헬름 2세가 그를 싫어했던 탓에 참모총장이 되지 못했다.

슐리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는 것은 슐리펜이 말한 후보엔 없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 카이저께선 누구를 차기 참모총장으로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겁니까?”

“몰트케라네.”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

이름이 같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의 영웅이자 초대 독일 제국 육군 참모총장인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의 조카로 흔히 조카 쪽을 소(小) 몰트케, 삼촌 쪽을 대(大) 몰트케라 부른다.

“사실, 몰트케는 군단급 부대에서 참모 보직을 맡은 적이 없어서 참모총장이 되기엔 논란의 여지가 꽤 있지. 하지만 카이저께선 그를 무척이나 총애하신다네. 별문제가 없다면 그가 새로운 참모총장이 될 거야.”

슐리펜의 말대로였다.

원 역사에서도 몰트케는 카이저의 총애를 바탕으로 슐리펜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이 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슐리펜 계획을 말아먹으며 참모총장에서 해임되지.’

다만, 슐리펜 계획이 파탄 난 것을 온전히 몰트케의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많았다.

눈앞의 슐리펜에겐 미안하지만 슐리펜 계획 자체가 애초부터 참호전과 총력전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수에 가까운 작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빌헬름 1세처럼 자신의 몰트케를 가지고 싶었던 빌헬름 2세의 기대와 달리 조카 몰트케는 그저 삼촌 몰트케처럼 명장이 아닌 아무리 잘 쳐줘 봐야 그저 평범한 범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은 그런 평범한 인물이 이끌어 나갈 만한 전쟁이 아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몰트케가 참모총장이 되는 데 큰 불만은 없으신 모양이군요.”

“경력이 부족할 뿐, 참모총장으로선 무난한 친구이니까. 나중에 자네에게도 소개해 주지.”

슐리펜은 그리 말하며 옆에 놓인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상당히 크기가 큰지 여러 번 접혀 있는 종이였다.

“그나저나 이참에 자네와 꼭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게 있다네.”

“네? 이야기요?”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한스 자네가 라디오다 뭐다 해서 오죽 바빴어야 말이지.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 기회에 자네도 이젠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아, 어디 가서 남한테 말하지 말게. 기밀이니까.”

손가락을 입에 대며 경고한 슐리펜이 종이를 펼쳤다.

“지도군요.”

그것도 유럽 지도였다.

하지만 그냥 지도와 차이점이 있다면 슐리펜의 지도 위엔 프랑스와 러시아 쪽에 온갖 선과 기호들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지도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이건 전쟁 계획이었다. 아직 아이디어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틀림없었다.

슐리펜이 말했다.

“질문하겠네. 만약 우리 독일 제국을 중심으로 한 삼국동맹과 러불동맹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과연 우리 독일은 양면 전선이란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 * *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

뛰어난 전략가였던 슐리펜이 1905년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제1차 세계대전 초창기 독일군의 전쟁 계획이다.

슐리펜이 자신의 경험과 재능, 인생을 모조리 쏟아부었던 계획이었던 만큼 세부적으로 따지면 상당히 복잡한 계획이었지만, 이를 최대한 알기 쉽게 요약하자면 이랬다.

1. 삼국동맹과 러불동맹 간의 전쟁이 벌어질 시 독일은 서쪽으론 프랑스, 동쪽으론 러시아와 동시에 전쟁을 벌여야 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2. 양면 전선을 막기 위해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제압한다.

3.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협력하여 최소한의 병력은 견제한다.

4. 프랑스를 제압하면 남은 전력을 총동원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점령해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린다.

5. PROFIT!

겉으로만 보면 상당히 잘 짜인 계획이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부는 독일군이 알자스-로트링겐 방면으로 오리라 여겼기에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의 약점을 정확하게 찌른 것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전쟁이 정말 독일의 계획대로 돌아갔다면 말이지.’

나도 이미 여러 차례 겪은 바가 있지만, 현실은 결코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리 잘 짜인 작전 계획이라도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종이 쪼가리가 되는 법이니까.

슐리펜 계획은 그 말이 정말이란 것만을 증명했다.

“일단 단기 결전 자체가 무리입니다. 전쟁은 분명 장기화할 테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유럽 열강 간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전쟁의 규모는 지금껏 보지 못할 정도로 커질 것입니다. 각국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수단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전쟁에서 승리하려 하겠죠.”

총력전(Total War).

유럽인들이 촌구석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애써 눈을 돌렸던 남북전쟁의 지옥이 더 커다랗고 더 참혹한 모습으로 재현될 것이다.

무엇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이끌던 그 시절 프랑스가 아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6주 당하던 프랑스도 아니었다.

물론, 나도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는 만큼 원 역사보다 전쟁이 빨리 끝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현실성 없는 생각은 버려야만 했다.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끝낼 전쟁 말입니다.”

물론 실제론 아무것도 못 끝냈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했다.

아직 제1차 세계대전도 겪지 못한 사람에게 ‘나중에 세계대전이 한 번 더 일어날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기 좀 그랬으니까.

게다가 슐리펜은 환자였다.

환자의 심신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스포일러를 자제하는 것이 나았다.

“확실히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나 마찬가지이지. 그래서 나도 그때를 대비해 전쟁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고. 하지만 과연 전쟁이 그렇게 커질까? 그 전에 누군가가 중재하려고 하지 않겠나?”

슐리펜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한번 시작하면 어느 한쪽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그 누구도 전쟁을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은 그만큼 잃을 것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아니, 오히려 정부가 전쟁을 끝내고자 해도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정부가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도래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광기의 시대였다.

그렇기에 전쟁을 멈추려고 하는 순간, 외부로 향했던 그들의 분노는 자국 정부를 향할 것이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그 누구도 멈추지 못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끝내기 전까지 말이다.

“좋아.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그것이 자네가 말하는 세계대전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내 염두에 주지. 이로 인해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하지만 내 걱정은 그것만이 아니라네.”

“참호전 말씀이시군요.”

참호전이란 말에 슐리펜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도 러일전쟁에서 일어난 참호전을 똑똑히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걸 두 눈으로 보고도 무시한다면 그건 그냥 뇌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다른 열강들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우리 독일 제국은 그래선 안 된다.

“자네 말대로 그것 때문에 골치가 매우 아프네. 전쟁이 벌어지면 영토가 지나치게 큰 러시아는 둘째 치더라도 프랑스는 분명 참호전을 시도할 것이야.”

“네. 그렇겠죠. 어쩌면 전선 전체가 참호로 도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독일군이 과연 참호선을 돌파할 수 있을까?”

슐리펜이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지도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왜 작년에 이미 구상에 들어갔을 슐리펜 계획이 아직도 아이디어 단계에 머물러있는지 이해가 갔다.

참호전이란 난제가 존재하는 이상 이를 해결하진 않고선 어떤 계획을 세우던 소용이 없을 테니까.

“확실히 힘들겠죠. 대포를 총동원하고 기관단총을 대규모로 보급한다면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테고요.”

“내 말이 바로 그 말…….”

“그래서 제가 참호전에 대비하여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게 하나 있습니다.”

“뭐? 자넨 대체 그걸 왜 지금 말하나!”

슐리펜은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잊었는지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빨리 말해 보라며 나를 닦달했다.

나는 슐리펜이 혈압이 올라 쓰러지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전 이것을 전차(Panzer)라고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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