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사이언스 & 어드벤처 (1)
빌헬름 황태자와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결혼식이 성황리에 끝난 뒤, 독일 제국은 축제 분위기에서 벗어나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직접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나는 루이제와 비밀리에 연애를 시작했다.
다만, 비밀이라고 해도 빌헬름 2세를 제외한 황실 가족 대부분은 어째선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연애까지는 그렇다 쳐도, 과연 내가 루이제와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을까?
특히 우리를 볼 때마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 아우구스테 황후와 달리 카이저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야 우리가 결혼하면 그건 명백한 귀천상혼이었으니까.
물론 귀천상혼이라고 해도 결혼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당장 빌헬름 2세의 5남인 오스카 왕자도 무려 어머니의 시녀와 귀천상혼을 했고, 빌헬름 2세의 막내 여동생인 마르가레테 공주 같은 경우도 남편이 자신보다 격이 낮았다.
왜냐하면 마르가레테 공주의 남편인 프리드리히 카를은 헤센 가문의 방계인 헤센카셀 방백가의 일원이었지만, 형이 있어서 정작 가문의 후계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형이 귀천상혼해서 그가 가주가 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참 뒤인 1925년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빌헬름 2세도 처음엔 여동생의 결혼을 반대했으나, 얼마 안 가 마르가레테 공주의 결혼을 축복해 줬는데, 마르가레테 공주의 위치 자체가 카이저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독일 제국은 살리카법 때문에 여성들은 왕위 계승권도 없었고, 이는 루이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모 게임처럼 아버지와 오빠들이 비행선 타다 사고로 전부 죽는다고 한들 루이제가 독일 제국의 카이제린이 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 때문에 루이제도 귀천상혼에 그렇게 신경 안 쓰는 모양이지만…….’
그렇다 해도 그 빌헬름 2세가 과연 이해해 줄까?
루이제는 어차피 오빠들도 많고 계승권도 없는데 자신 하나가 귀천상혼 하는 게 무슨 상관이냐며 밀어 붙여 볼 작정이라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결국, 이 부분은 내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네.’
어쨌든 독일은 그렇게 조용해졌지만, 우리가 조용해졌다고 세계가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당장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 바로 다음 날, 스웨덴과 동군연합 상태였던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북유럽에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애초에 노르웨이인의 절대다수는 독립에 찬성했던 데다가 스웨덴인들도 국왕 오스카르 2세를 빼면 딱히 노르웨이가 독립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나름 평화롭게 갈라졌기 때문이다.
역사대로라면 올해 11월에 빌헬름 황태자와 동서지간이 된 크리스티안 10세의 남동생이자 에드워드 7세의 사위인 덴마크의 칼 왕자가 호콘 7세로 즉위할 것이다.
“노르웨이 하니까 생각나는데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이 남극점에 도전하는 게 1909년이던가?”
탐험 준비 자체는 지금으로부터 2년 후인 1907년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문센의 목표는 남극점이 아니라 북극점이었지만.
아문센의 조국인 노르웨이는 북극에 가까운 지역이었고, 아문센 또한 남극점보다는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하는 것을 자신의 꿈으로 삼았다.
그러나 원정 직전에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아문센은 눈물을 흘리며 오랜 꿈이었던 북극점 정복을 포기하고 남극점으로 목표를 변경한다.
하지만 아문센은 죽을 때까지도 몰랐다.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훗날 피어리의 거짓말이라 밝혀졌다는 사실을.
이 때문에 지금은 남극점 원정의 성공 이후 최초로 북극점 상공 비행에 성공했던 아문센을 이누이트를 제외하고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한 탐험가로 보고 있다.
‘생전에 아문센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하지만 아쉽게도 모든 진실이 밝혀진 것은 아문센이 죽고 난 뒤였다.
하지만 내가 그를 후원한다면 어쩌면 아문센이 피어리보다 먼저 북극점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위인 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그의 평생 꿈이었던 북극점 정복을 이루는 걸 보고 싶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라디오로 돈도 많이 벌고 있으니, 나도 슬슬 후원을 더 늘려야지.”
귀족이자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입지를 다지기엔 후원만 한 것이 없다.
내가 후원한 사람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 금상첨화였고.
당장 라디오를 발명한 테슬라의 후원자가 나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유럽 상류사회 내에서 미묘했던 내 평판이 상당히 뛰어올랐다.
이참에 과학계와 문화계의 큰손, 한스 폰 초이 남작이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루이제를 위해서라도 내 명성과 영향력을 늘려야 했고, 아문센 말고도 후원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차고 넘쳤으니까.
예를 들어 위대한 실패로 유명한 극지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이라든가 올해 특수 상대성 이론과 브라운 운동, 광양자가설을 연달아 발표하며 과학계를 뒤집어 놓고 있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있었고, 특히 프리츠 하버랑도 슬슬 접촉해야 했다.
“마침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들도 드디어 대서양을 건넜고 말이야.”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독일 제국으로 오고 있다.
독일 제국의 항공 산업이 첫 발자국을 떼는 순간이었다.
* * *
“테슬라 씨에 이어 또 과학자가 늘다니.”
“라이트 형제가 집을 구할 때까지만 참아 주세요.”
“한스, 너 테슬라 씨가 프리드리히쇼프에 왔을 때도 그렇게 말했잖니.”
마르가레테 공주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번에 프랑크푸르트 남쪽에 비행기 공장과 활주로 등을 건설하기 좋은 땅이 싸게 나와서 구매했는데, 정작 라이트 형제가 머무를 만한 집을 아직 못 찾았다.
물론 라이트 형제는 공장에서 먹고 자고 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후원한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처럼 지내는 것만큼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라이트 형제의 건강도 건강이었지만, 내 평판이 떨어진다.
그렇기에 마르가레테 공주에게 라이트 형제가 집을 찾을 동안 형제를 프리드리히쇼프에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마르가레테 공주의 표정은 역시나 좋지 않았다.
원인은 당연히 테슬라였다.
“이러다 프리드리히쇼프가 과학자의 집이라 불리겠구나.”
“오, 그거 괜찮은 별명이군요.”
“테슬라 씨는 빠지세요.”
에이, 그래도 라이트 형제가 테슬라 같은 괴짜도 아니고, 설마 여기에 그대로 눌러앉을까.
나는 눈치 없는 테슬라로 인해 열을 받은 마르가레테 공주를 달래면서 어서 라이트 형제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부르릉─끼익!
그렇게 한 30분 정도 지났을 때, 프리드리히쇼프 성 앞에 자동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그리고 차 안에서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람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한스 폰 초이 남작님?”
“윌버 라이트 씨와 오빌 라이트 씨죠? 독일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 라이트 형제가 내 환영 인사에 밝게 웃으며 나와 악수를 했다.
“이쪽은 저 대신 프리드리히쇼프를 관리해 주고 계신 마르가레테 공주님과 니콜라 테슬라 씨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공주님.’
라이트 형제는 설마하니 자신들이 왕족을 만날 줄은 몰랐는지 긴장한 얼굴로 최대한 예의를 차려 마르가레테 공주에게 인사를 했다.
마르가레테 공주는 라이트 형제의 순박한 시골 청년들 같은 엉거주춤한 인사에 자신도 모르게 화가 조금 풀렸는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적어도 테슬라 씨보단 낫네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윌버 라이트 씨, 오빌 라이트 씨. 부디 프리드리히쇼프에 머무시는 동안 이곳을 집이라 생각하시고 편하게 지내세요.”
“공주님의 친절함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테슬라 씨. 테슬라 씨의 위명은 오래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나도 하늘을 난 친구들을 만나 반갑네. 얼른 자네들이 만든 비행기를 보고 싶군.”
“하하, 당장이라도 보여 드리고 싶지만,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저희 비행기들은 아직 대서양을 건너는 중이거든요.”
“그거 아쉽구만. 하지만 기다림 또한 하나의 즐거움인 법이지.”
테슬라가 그리 중얼거리며 기대된다는 듯 눈을 빛냈다.
지난번에 분명 비행기보단 전기 공학이 최고라고 한 것 같은데 그 역시 비행기에 대한 호기심이 있긴 있나 보다.
물론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의미의 호기심이겠지만.
“자, 날이 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 * *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테슬라와 함께 라이트 형제를 위해 건설한 프랑크푸르트 남쪽의 비행기 공장에 방문했다.
형제가 만든 비행기들이 드디어 독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게 플라이어 1호입니다. 옆에 있는 것은 작년에 랭글리와의 대결에 사용한 플라이어 2호고요.”
“그 대결에 관한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15분 동안 상공 400m 위를 멋지게 날았다죠?”
“하하, 맞습니다. 그때 랭글리의 얼굴이 참 볼 만했죠. 나중에 랭글리의 제자들이 저희한테 스승이 진 분풀이를 한다고 소송을 거는 바람에 1년 동안 꽤 고생해야 했지만요.”
오빌 라이트가 그때의 고생이 떠올랐는지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트 형제의 편지론 그날 이후 랭글리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미국 스미소니언 협회가 사사건건 자신들을 방해하는 바람에 미국에서 비행기가 전혀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미국 과학계가 멍청하게 굴어 준 덕분에 라이트 형제가 미국을 뒤로하고 독일로 온 것이다.
나중에 랭글리와 스미소니언 협회에 감사의 뜻으로 선물이라도 보내야 할까 싶다.
“기죽지 말게. 오빌 군. 범인들이 천재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은 항상 있는 일이니까.”
“아, 고맙습니다. 테슬라 씨.”
억울함 하면 어디 가서 전문가라 자랑할 수 있는 테슬라가 어깨를 두드리며 오빌 라이트를 위로했다.
오빌 라이트는 이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지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탈탈탈탈탈───
“남작님!”
그때 활주로에서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윌버 라이트가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윌버 라이트가 비행기에 탄 채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러분께 플라이어 3호를 소개합니다. 우리 라이트 형제의 최신작이자 역작이죠!”
오빌이 제 자식을 자랑하듯 뿌듯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나와 테슬라는 흥미로운 눈으로 플라이어 3호를 바라봤다.
본래라면 플라이어 3호는 10월에나 만들어지는 기체였지만, 돈의 힘은 위대한 법이다.
라이트 형제는 내 투자에 힘입어 플라이어 3호를 원 역사보다 빨리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성능도 더 발전시켰다.
“플라이어 3호는 1호와 2호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전보다 더욱 크나큰 진보를 이룬 기체입니다. 안정성과 제어력이 크게 향상되어 무려 45분 동안 비행할 수 있을뿐더러 공중에서의 선회, 방향 전환, 원운동 등 더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해졌죠.”
“호오. 어떤 원리인지 뜯어 보고 싶군.”
“하하, 테슬라 씨가 진짜 그럴 것 같아서 무섭네요.”
나도 그렇다.
내가 아는 테슬라는 정말 원리를 알아보겠다고 플라이어 3호를 산산 조각내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나중에 라이트 형제에게 문단속 잘하라고 주의를 시켜야겠다.
끼릭─!
“남작님. 우리 형제의 비행기를 실제로 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제 생각보다 훨씬 멋지네요!”
우리 앞에 비행기를 정지시킨 윌버 라이트가 조종석에 엎드린 채 묻자 나는 만족스럽다는 것을 최대한 표현하기 위해 큰 목소리로 윌버 라이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얼른 조종석 부분을 개량해야겠다.
저렇게 엎드려서 비행기를 계속 타다 사고라도 나면 조종사는 100% 죽거나 불구가 될 테니까.
물론 라이트 형제의 다음 비행기인 라이트 모델 A부터는 앉아서 조종할 수 있게 좌석이 생겼지만, 이마저도 안전장치 없는 스키장 리프트나 마찬가지였다.
‘안전은 중요하지. 안전은.’
게다가 추진방식도 지금처럼 프로펠러가 기체 후방에 달린 추진식(Pusher configuration)이 아니라 앞에 달린 견인식(Tractor configuration)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초기 비행기 시대가 지나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행기 추진방식은 추진식보다는 견인식이 주력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남작님. 그럼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머릿속으로 라이트 형제에게 말할 비행기의 개선점을 정리하는 사이, 플라이어 3호에 타 있던 윌버 라이트가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하늘도 깨끗하니 비행에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는 기대된다는 듯 윌버 라이트를 향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다다다다다───!
플라이어 3호의 프로펠러가 다시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플라이어 3호는 활주로를 쭉 질주했고, 이내 윌버 라이트가 레버를 당기자 하늘로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와─”
그리고 플라이어 3호가 하늘을 날자 나와 테슬라 씨는 멍하니 탄성을 내뱉었다.
플라이어 3호는 빠르지는 않았지만, 하늘 위에서 이리저리 멋지게 회전하며 초보적인 곡예비행을 보여 주었다.
“우와~저게 뭐야?”
“하늘을 날고 있어!”
그때 내 뒤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에 들려왔다.
어린아이들이었다.
아마 이 근처에서 놀다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발견한 모양이다.
아이 중 하나가 물었다.
“거기 형! 저게 뭐예요?”
“저건 비행기란다. 하늘을 나는 탈 것이지. 곧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게 될 거야.”
“우와아~”
“나도 타고 싶다~!”
“음, 그건 너희가 더 자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럼, 난 탈 수 있겠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친절한 형 행세를 하는 사이, 또다시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이번엔 너무나도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하인리히 왕자님?!”
야생의 하인리히 왕자가 나타났다!
킬 군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까진 대체 무슨 일일까?
나는 하인리히 왕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려 했지만, 왕자는 흥분한 얼굴로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 내며 내가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았다.
“젠장, 한스! 저런 멋진 걸 숨기고 있었다니.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 거냐!”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십니까?”
“하하! 무슨 소리냐고?”
내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하인리히 왕자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플라이어 3호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저 비행기인지 뭔지를 타게 해 다오!”
“오, 이런.”
나는 하인리히 왕자의 말에 그만 이마를 탁 짚고 말았다.
대체 누구 이 양반에게 비행기에 대한 걸 말해 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