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황태자의 결혼식 (2)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베를린에 도착한 체칠리에 여공작은 베를린 시민들의 성대한 환영 속에서 붉은 장미꽃을 흩날리며 먼 훗날 독일의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벨뷔 궁(Schloss Bellevue)에 도착했다.
체칠리에 여공작은 벨뷔 궁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타 황후와 오늘 그녀의 남편이 될 빌헬름 황태자를 비롯한 황실 가족 앞에서 우아하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고, 카이저 부부는 흐뭇한 얼굴로 자신들의 첫 며느리를 맞이했다.
‘하긴 빌헬름 2세가 체칠리에 여공작을 마음에 안 들어 할 리가 없지.’
마음에 안 들었으면 진작에 결혼이고 뭐고 황태자에게 헤어지라고 역정을 냈을 것이다.
다른 아들들이라면 모를까 황태자의 아내는 미래의 독일 제국 황후이자 황태손의 어머니가 될 여자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체칠리에 여공작은 카이저가 보기에 황태자비에 어울리다 못해 차고 넘치는 훌륭한 며느릿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독일의 제후국 중에서도 이름값이 높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인 데다가 어머니는 니콜라이 1세의 손녀인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이라 혈통도 훌륭하고, 거기에 황태자비에 걸맞은 능력과 인품 또한 갖췄으니까.
“앞으로 황태자비로서 많은 의무와 책임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무거운 짐이지만 이겨 내야 하는 짐이기도 하지.”
“명심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전 황태자비였던 아우구스테 황후가 새로운 황태자비가 될 며느리에게 그리 조언하자 체칠리에 여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신부를 이렇게 계속 세워 둘 수야 없는 법이지. 이제 모두 베를린 궁으로 가자꾸나.”
베를린 궁에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외국에서 찾아온 50명이 넘는 왕족들과 귀족들이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체칠리에 여공작은 그곳에서 왕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시아버지 빌헬름 2세에게 루이제 기사단(Luisen-Orden)의 기사로 서임될 것이다.
루이제 기사단은 나폴레옹 시기 프로이센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자신의 아내이자 프로이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루이제 왕비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기사단으로 왕실의 여인들이나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여인들이 서임되었다.
쉽게 말해 영국 가터 기사단의 여자 버전이라 생각하면 된다.
다만, 나는 체칠리에 여공작을 따라 베를린 궁으로 가진 않았다.
다른 곳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 그럼 전 중계 준비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로 대성당으로 가 보겠습니다.”
“음. 그리하거라.”
그렇게 빌헬름 황태자와 체칠리에 여공작이 예포와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베를린 궁으로 가는 사이, 나는 곧바로 본식이 열릴 예정인 베를린 대성당(Berlin Cathedral)으로 향했다.
결혼식 행차까지는 대본과 연출로 때우더라도 결혼식은 정말로 실시간 중계로 진행할 예정이었기에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십니까. 남작님.”
“안녕하세요. 슈트라우스 씨. 연주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완벽합니다. 아니, 완벽해야죠. 독일 제국의 경사에 초대받은 것도 모자라 그 한 페이지를 제 지휘로 장식하는 중책을 맡은 이상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내 인사에 리하르트 바그너, 프란츠 리스트의 뒤를 잇는 후기 독일 낭만파의 마지막 황금기를 대표하는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가 흥분한 얼굴로 팔을 휘둘렀다.
개인적으론 조금은 진정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 유명한 슈트라우스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오늘 결혼식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결혼 행진곡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연주할 악단의 지휘를 맡았기 때문이다.
내가 슈트라우스를 데려온 것은 아니었고, 체칠리에 여공작이 꼭 슈트라우스가 결혼식 음악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황실에서 슈트라우스를 초청했다.
아무래도 체칠리에 여공작은 패션만큼이나 음악에도 꽤 조예가 깊은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만든 오페라가 올해 12월에 초연될 예정입니다. 나중에 초대장을 보내 드릴 테니, 관심이 있으시면 황실 가족분들과 함께 남작님도 보러오시죠.”
나는 슈트라우스의 제안에 꼭 가겠다고 웃으며 대답했지만, 이내 그 오페라가 무엇인지 떠올리자마자 얼굴이 굳고 말았다.
올해 1905년 12월에 초연하는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면 그 유명한 ‘살로메’였으니까.
살로메는 슈트라우스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던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말러조차 ‘우리 시대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명작이다.
높은 수위의 잔인함과 외설성으로 당대에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단 것만 빼면.
오페라는 좋아하지만, 과연 그걸 미성년자가 봐도 되는 걸까?
* * *
“……그대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어 아우구스트 에른스트는 신부를 사랑하고 남편의 책임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대 체칠리에 아우구스테 마리는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로서 순종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고귀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딴~딴따단~딴~딴따단~
길고 길었던 주례가 드디어 끝남과 동시에 드디어 결혼식이 피날레를 맞이했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슈트라우스가 지휘봉을 휘둘렀고, 결혼 행진곡과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빌헬름 황태자와 메클린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여공작에서 독일 제국의 황태자비이자 프로이센의 왕세자비 체칠리에 전하가 된 체칠리에가 서로 입을 맞추었다.
짝짝짝짝짝짝짝───!
‘후…….’
두 사람이 성공적으로 맺어진 것을 축하하는 결혼식 하객들의 힘찬 박수 소리가 대성당의 홀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결혼식장 구석에 서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식이 성공적이었던 만큼, 중계 또한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중계팀에게 슬슬 중계를 종료하라고 손짓으로 신호를 보낸 뒤, 황실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는 황태자 부부에게 다가갔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다시 한번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한스, 너도 수고했다. 후, 결혼식이 이렇게 힘들고 복잡할 줄 누가 알았겠어? 마음 같아선 바로 쉬러 가고 싶은 기분이야.”
“후후, 조금만 참아요. 빌헬름. 아직 피로연이 남아 있잖아요?”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말에 빌헬름 황태자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 후에는 화려한 연회와 만찬이 따르는 것이 유럽의 전통.
하지만 빌헬름 황태자 부부는 이를 즐길 시간도 없이 하객들, 특히 결혼식에 참석한 왕족들에게 인사를 하러 돌아다녀야 했다.
나야 일이 다 끝났으니 맛있는 것이나 먹으면서 즐길 일만 남았지만.
“한스. 나와 같이 다니자!”
“루이제 공주님?”
그때 빅토리아 루이제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야 딱히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량하게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단 그래도 여럿이서 돌아다니는 게 나을 테니까.
나는 요아힘 왕자에게도 같이 다니자고 말하려고 했지만, 루이제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요아힘 오빠는 약속이 있대.”
“약속이요?”
“나 그런 적 없는…… 읍읍!”
“하하, 동생아. 이쪽으로 오렴.”
요아힘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하는 수 없이 루이제와 단둘이 돌아다닐 수밖에 없게 됐다.
그렇게 나와 루이제는 다른 하객들과 함께 대성당을 떠나 베를린 궁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은 황태자의 피로연에 걸맞게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식탁 위에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이거 한스 군과 루이제 아닌가. 예전에 봤을 때보다 모두 훌쩍 자랐군!”
“아, 오랜만입니다.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님.”
“안녕하세요. 고모부님. 건강하셨나요?”
“물론이지!”
빅토리아 황태후의 장례식 이후 오랜만에 보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참고로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는 빌헬름 황태자와 루이제의 고모부인 동시에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6촌 오빠이기도 하다.
유럽 왕실 가계도는 다시 봐도 참 개판이다.
“그나저나 조피 왕세자비님이 안 보이시네요.”
“소피아는 젊은 신랑 신부한테 갔다네. 저기 크리스티안 부부도 같이 있군.”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빌헬름 황태자와 체칠리에 황태자비보다도 더 거대한 거인이 조피 왕세자비, 그리고 체칠리에 황태자비와 닮은 여성과 함께 웃고 떠들고 있었다.
누군지는 금방 눈치챘다.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티안 10세다.
우리 황태자비님과 닮은 여인은 체칠리에의 언니이자 크리스티안 10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리네 왕비일 테고.
‘전에 체칠리에 황태자비에게 듣기론 크리스티안 10세는 키가 201cm라고 했던가.’
확실히 이 두 눈으로 보니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는 키였다.
아마 여기 모인 왕족 중 가장 클지도 모른다.
근처에서 하와이안 피자를 맛있게 먹고 있는 웨일스 공 조지를 경악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참고로 후식은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이런 자리에서 빠질 수는 없지.
“그나저나 요즘 라디오란 게 시끌시끌하던데 자네가 만든 거라지?”
“그렇습니다. 왕세자님께서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내년에 우리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열리지 않나. 그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도 한다는데, 올림픽에도 도입하면 어떨까 해서 말이지.”
오, 내년에 열리는 올림픽이라면 아테네 중간 올림픽이다.
제1회 올림픽인 아테네 올림픽 10주년을 기념하는 올림픽인 만큼 올림픽 위원회와 그리스 정부가 이번 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들었다.
물론, 거기엔 상당히 복잡한 이유가 담겨 있었다..
어쨌든 라디오를 세계에 홍보할 좋은 기회였다.
나도 올림픽 특수라는 것을 좀 맛보자.
“저도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올림픽의 성공을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그거 고마운 말이군. 그럼 다음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도록 하지. 옆에 있는 아가씨께서 얼른 내가 비켜 줬으면 하는 분위기니까.”
“네?”
네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콘스타티노스 왕세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루이제 공주님. 저게 무슨 소리인지 아세요?”
“……몰라.”
루이제는 어째선지 고개를 돌린 채 그리 중얼거렸다.
얘는 또 왜 이러는지.
내가 모르는 유럽 왕실만의 비밀 암호라도 있는 것일까?
그때 루이제가 내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머리가 아파졌어. 잠깐 나가자. 한스.”
“네? 아, 네.”
루이제가 날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음식들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루이제는 정말 머리가 아픈 듯 빠른 속도로 궁을 나갔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베를린 궁의 정원으로 온 우리 둘은 정자의 벤치에 앉아 꽃들을 바라봤다.
“꽃이 참 아름답네.”
“그러게요.”
“여기선 보통 ‘너도 아름답네’라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후…….”
나는 루이제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루이제를 바라봤다.
“안 돼요.”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우리 둘이 이러는 거요.”
내가 아무리 둔감해 빠진 놈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모를 수가 없었다.
“한스, 넌 내가 싫어?”
“그런 거 아니에요.”
좋다 싫다를 따지면 당연히 좋다.
예쁜 공주님이 나를 좋아해 준다는데, 그야말로 분에 넘치는 영광이다.
게다가 미래를 따지면 루이제와 결혼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큰 이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루이제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웠다.
“소중한 사람인 만큼 공주님을 제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고 싶진 않아요. 게다가 제 피부색이나 신분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주님에게 해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이 바보야.”
쪽
순간 루이제가 내 말을 끊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동시에 볼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우리 둘의 마음이잖아?”
나에게 떨어진 루이제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물론 쉽지 않겠지. 우리 둘이 이어지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테고. 하지만 우리 둘이라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다고 난 생각해.”
“어…….”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 Mein liebe.”
내 귀에 그리 속삭인 루이제는 얼굴을 붉힌 채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넋이 완전히 나간 채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만 봤다.
스윽─
손가락으로 루이제의 입술이 닿은 볼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달콤한 꿈을 꾸는 기분이다.
계속 그 꿈을 꾸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한스야. 한스야. 내 딸을 건드리다니 네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헉!”
그러나 달콤한 꿈같은 순간이 지나고 현실로 돌아오자 귓가에 분노한 빌헬름 2세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나는 핏기가 사라지는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빌헬름 2세가 루이제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딸바보라는 것은 독일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루이제와의 관계를 들키는 순간 빌헬름 2세는 날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카이저의 취미는 벌목이었다.
그것도 고작 소소하게 장작 몇 개를 패는 것이 아닌 도끼로 진짜 나무를 베는 그 벌목이었다.
빌헬름 2세는 특히 베는 손맛이 좋은 단단한 참나무를 선호해 하루에 몇 그루씩 참나무를 도끼로 호쾌하게 내려찍었고, 그가 일평생 자른 나무의 수만 해도 약 4만 그루에 달했다.
‘자기가 무슨 폴 버니언(Paul Bunyan, 미국 민간 설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나무꾼)이냐고!’
그렇기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상상하고 말았다.
거둬 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소중한 딸의 입술을 도둑질해 간 괘씸한 도둑놈을 향해 우람한 팔근육을 자랑하며 자신의 도끼를 휘두르는 빌헬름 2세의 모습을.
‘……당분간은 비밀로 하자.’
루이제도 이해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