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황태자의 결혼식 (1)
“후우, 소송을 취하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마르코니 씨.”
마르코니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소송을 취하했다.
영국 정부가 자신의 회사를 압박하며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눈치를 주니, 그로서도 이 이상 DRR과 라디오에 대한 소송을 이어 나가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마르코니가 마냥 손해만 입고 물러났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렇게 된 거 서로 기술 협력이나 하죠.”
“……마르코니 씨.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신 거 아닙니까?”
기술 특허를 침해했다고 트집을 잡을 땐 언제고 소송전이 끝나자마자 마르코니사와 DRR의 기술 협력을 입에 담는 마르코니의 태도에 JP모건과 모건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받은 나조차 그 뻔뻔함에 무심코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나 우리의 감상이 어떻든 얼굴에 철면피를 깐 마르코니는 꿋꿋했다.
“우리 마르코니사의 영역인 무선 전신 쪽에 손을 대지만 않는다면, 우리 또한 앞으로도 라디오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협력과 상생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 올바른 기업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마르코니의 개소리는 제외하고서라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JP모건 또한 마르코니가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의견을 보내 왔기에 나는 짧은 고민 끝에 마르코니사의 협력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 또한 굳이 무선 전신 쪽까지 발을 뻗어 전 세계 무선 전신을 장악한 마르코니와 혈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디오 문제가 해결되자 내 시선은 현재 독일 제국 최대의 관심사인 빌헬름 황태자의 결혼식으로 향했다.
“하아……. 결혼식까지 벌써 일주일도 남지 않았군.”
하지만 새신랑이 될 빌헬름 황태자는 막상 결혼식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불안해진 모양이다.
“후……. 한스, 넌 결혼 같은 거 하지 마라.”
“황태자님, 결혼하기 싫다고 제 혼삿길까지 막으려는 겁니까?”
“난 딱히 결혼하기 싫은 게 아니야. 황태자로서 의무를 저버릴 생각도 없고. 그저 결혼식을 너무 빨리 올리는 것 같아서 그래.”
“하긴 약혼한 지 1년도 안 돼서 결혼식이 열리는 것이니까요.”
심지어 그 약혼은 빌헬름 황태자가 신부가 될 여성을 만난 지 3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시대가 시대이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좀 이른 감이 있긴 했다.
“그래도 인제 와서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게다가 두 분은 서로 좋아해서 만난 거잖아요?”
“물론 난 체칠리에를 사랑해. 하지만 난 준비가 안 됐어. 안 됐다고!”
“결혼식을 앞둔 신랑이 할 말은 아니네요.”
나는 결혼식은 열리지도 않았는데 나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빌헬름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왜 결혼은커녕 만나는 사람도 없는 내가 황태자의 결혼 상담을 해 줘야 하는 건지.
“어머, 빌헬름. 여기 있었군요.”
“체칠리에?”
내가 빌헬름 황태자와 결혼할 신부에게 동정심이 들기 시작했을 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마침 그 신부가 우리 앞에 등장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Cecilie Auguste Marie of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의 차녀이자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리네 왕비의 여동생으로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가 되는 여인이다.
“안녕하십니까. 체칠리에 여공작님.”
“안녕하세요. 초이 남작.”
내가 미래의 황태자비에게 정중하게 인사하자 체칠리에 여공작이 방긋 미소 지으며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체칠리에 여공작은 빌헬름 황태자가 한눈에 반한 게 이해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180cm의 키를 가진 빌헬름 황태자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키가 커서 21세기의 모델들이 생각나는 장신 미녀였다.
‘게다가 패션 감각도 뛰어나고, 스타일도 좋으니까.’
실제로 체칠리에 여공작은 황태자비가 된 뒤 독일 패션계의 떠오르는 아이콘이 되어 제국의 패션 유행을 선도했던 여성이었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독일 전역의 많은 여성이 그녀의 패션을 따라 하는 것에 혈안이 될 정도였다던가?
게다가 체칠리에 여공작은 그 혈통도 혈통이지만, 여성 인권과 자선 활동에도 관심이 많고 거기다 인성까지 좋은 그야말로 엄친딸 중의 엄친딸.
솔직히 바람둥이 빌헬름 황태자에겐 무척이나 아까운 여자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선남선녀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지만 말이다.
“제가 빌헬름과의 대화를 방해한 모양이네요.”
“아냐, 아냐. 그냥 시답잖은 잡담일 뿐이야.”
빌헬름 황태자가 방금까지 결혼을 너무 빨리한다며 불안에 떨 때는 언제고 꿀이 떨어질 것만 같은 열렬한 눈빛을 보내며 체칠리에의 손을 잡았다.
어이없는 것 이전에 황태자의 목소리가 너무 느끼해서 속이 뒤집힐 것만 같다.
제발 염장질은 딴 데 가서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 그럼 제가 빌헬름을 빌려 가도 될까요? 결혼식 날에 입을 웨딩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싶거든요.”
“물론입니다. 저야 황태자님과 말 그대로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고 있던 것뿐이니까요.”
“크, 크흠. 자, 가자. 체칠리에.”
내가 썩은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며 그리 말하자 머쓱해진 빌헬름 황태자가 헛기침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체칠리에 여공작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자기가 할 말이 없다는 건 알긴 아나 보다.
“나도 방송국으로 가서 라디오 중계 일정이나 다시 점검해야겠다.”
황태자 커플이 떠나자 처량하게 혼자 남겨진 나는 그리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중계라고 해도 실제로 실시간 중계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혼식 본방 뿐이고, 나머지 행사 같은 것은 스튜디오에서 대본과 연출로 때울 예정이다.
물론 그것만 해도 이 시대 기준으론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조금씩 황실이 친숙하게 국민에게 다가가는 것은 황실의 지지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1세기에도 영국 왕실의 결혼식 등에 사람들이 열렬한 관심을 보내는 마당에 20세기라고 다를 것은 없을 테니까.
*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와 빌헬름 황태자와의 결혼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왕실 모두가 결혼식을 준비하며 각국에서 찾아올 왕족들을 맞이하는 일로 정신이 없는 가운데,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는 곧 새언니가 될 체칠리에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너무 예뻐요!”
“후후, 고맙습니다. 공주님.”
체칠리에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루이제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평소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그녀는 키가 커서인지(무려 큰오빠인 빌헬름보다도 컸다) 모든 옷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내 키도 저 정도로 커지면 좋을 텐데.’
빅토리아 루이제는 그리 중얼거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그리 크지 않는 키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녀는 아직 만 12세, 세는 나이로 따지면 14살로 성장 가능성은 아직 충분히 있었기에 의미 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실제로 훗날의 빅토리아 루이제는 21세기 여성 기준으로도 장신인 새언니 체칠리에에 미치진 못할지라도 당시 독일 여성의 평균보다 키가 큰 편이었다.
“나도 언젠가 언니처럼 웨딩드레스를 입을 날이 올까요?”
“흐흥. 루이제 공주님, 설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기신 건가요?”
체칠리에의 짓궂은 농담에 빅토리아 루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그때였다.
“루이제는 한스를 좋아해.”
“#[email protected]!%@?!”
퍼억!
루이제의 옆에 서 있던 눈치 없는 큰오빠 빌헬름 황태자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루이제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괴성을 지르며 오빠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악! 왜, 왜 그래?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아버지 빼면 우리 가족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
여동생에게 발로 걷어차인 게 억울했는지 빌헬름 황태자가 다리를 부여잡으며 그리 말했다.
루이제는 다시 한번 빌헬름 황태자를 걷어찼다.
“어머, 정말이에요?”
“그, 그게…….”
남매의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체칠리에가 어린 공주님의 사랑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자 루이제가 몸을 비비 꼬며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치 없이 굴다 루이제에게 두 번이나 다리를 걷어차인 빌헬름 황태자는 여동생의 빠른 태세 전환을 그저 황당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후후,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공주님 나이대의 소녀가 사랑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걸요.”
“그, 그런가요?”
“물론이죠! 그나저나 한스 폰 초이 남작이라. 공주님의 안목이 좋네요. 확실히 미래가 기대되는 소년이니까요.”
체칠리에는 루이제를 향해 미소 지으며 그리 말했다.
인종이나 신분 때문에 그 사랑이 험난한 가시밭길이 될 것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은 채.
소녀의 순정은 지켜 줘야만 하는 법이다.
‘한스…….’
한편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루이제는 한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때 루이제는 한스를 그저 아버지가 데려온 재미있는 아이로 여겼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아이는 곧 대단한 아이로 바뀌었다.
한스는 항상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 갔다.
마치 손이 닿지 않을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루이제는 그런 한스에게 동경심을 품었다.
그리고 소녀가 사랑에 눈을 뜰 나이가 되었을 때, 동경은 어느새 연모로 바뀌어 있었고 어릴 적 갑자기 나타나 루이제의 친구가 된 동양인 소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한스는 나한테 관심 없을걸요.”
그러나 루이제는 곧 한스가 자신을 그저 친구로만 여긴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은 있는데, 일부러 거리를 둔다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한스가 전생에 연애 쪽에 둔감하다지만, 루이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역시 인종이나 신분 쪽이 걸리는 것일까요?’
체칠리에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아마 남작도 이 귀여운 시누이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다.
다만, 황제의 딸이자 프로이센의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고민하지 못하고 있을 뿐.
“너 손 놓고 있다가 다른 아가씨가 채 간다? 한스, 그 녀석 얼굴 하나는 괜찮게 생겼으니까.”
“!”
그러나 이어진 체칠리에의 말에 빅토리아 루이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제에게 있어선 한스가 다른 여자와 이어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루이제는 늦든 빠르든 한스와 이어지는 것은 당연히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빅토리아 루이제는 할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에게 지성을, 어머니 아우구스테 황후에게선 위엄과 당당함을 물려받았다면 아버지 빌헬름 2세에게선 오만함과 고집을 물려받은 소녀였다.
‘아무래도 제가 두 사람의 등을 밀어줘야겠네요.’
그러나 루이제의 이런 모습조차 귀엽다는 듯이 바라본 체칠리에는 어린 시누이의 사랑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기로 했다.
자고로 결혼식은 사랑이 결실을 맺는 날이기도 하지만, 의외로 새로운 사랑이 탄생하기도 하는 날이니까.
그리고 체칠리에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1905년 6월 6일.
[독일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뉴스, 유일한 뉴스, 독일 제국 방송 DRR의 베른하르트 마이어입니다.]
[DRR의 프리츠입니다.]
독일 전역의 라디오에서 환희로 가득한 앵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은 DRR 개국 이래 최초로 특별방송이 있는 날이자 독일 제국의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오늘은 여러분께 특별한 소식을 전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바로 독일 제국의 황태자이신 빌헬름 전하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여공작께서 드디어 혼인하신다는 소식인데요.]
[네. 덕분에 지금 베를린은 티어가르텐(Tiergarten)부터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까지 두 분의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시내로 나온 시민들의 행렬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베를린을 찾아왔다죠?]
[그렇습니다. 영국의 웨일스 공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이신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전하,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폐하 등 독일 제국의 동맹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의 왕실에서 황태자 전하의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정말이지 경사스러운 날이 아닐 수가 없네요.]
[네. 그렇습…… 아! 방금 베를린 레어테 역(Lehrter Bahnhof)에 체칠리에 전하께서 타신 기차가 도착했다는군요! 고향 슈베린을 떠나 독일 최고의 신부이시자 제국의 새로운 황태자비께서 드디어 베를린에 도착하셨습니다!]
라디오 소리를 배경으로 베를린 전역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
황태자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