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03화 (103/193)

103화 : 독일 제국 방송 (3)

“……설마 여기서 당신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미스터 모건.”

“허허, 마르코니 씨. 누가 보면 악마라도 본 줄 알겠습니다?”

“어떤 의미로 틀린 말은 아니지요.”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그리 중얼거리며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 혀를 짧게 찼다.

자신이 독점하고 있던 무선 통신 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독일 제국 방송 DRR을 손봐 주기로 마음먹은 마르코니는 미국 법원에 DRR이 자신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걸었다.

물론 DRR의 본거지는 유럽, 그것도 독일 제국이었지만, 마르코니는 카이저를 구한 소년의 이야기를 이미 귀가 닳도록 들은 지 오래였다.

DRR의 주인인 한스 폰 초이 남작이 카이저 빌헬름의 총애를 받는 이상, 독일 법원은 절대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르코니는 미국 법원에 소송장을 내 DRR이 보유하고 있는 유럽 특허 대신 미국 특허를 공격하기로 했다.

마르코니의 목표는 DRR을 무너트리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DRR의 라디오가 자신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판결을 받아 내 DRR에서 돈을 뜯어내고 라디오 사업권의 지분을 일부분이라도 뺏어 오는 것이었다.

마르코니가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였고 여기에 특허가 미국 특허인지, 유럽 특허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 같아선 DRR을 자신의 자리를 넘봤던 경쟁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짓밟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독일 황실이 뒷배로 있는 이상 DRR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잘못하면 국가 간의 외교전이다.

그쪽에서 독일 제국의 악명을 생각하면 이는 최대한 피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독일 제국이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꿀릴 이유는 없지.’

그렇기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룰루랄라 하며 미국 법원에 등장한 마르코니였지만, 참으로 빌어먹게도 DRR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변호사 군단을 대동한 JP모건이었다.

“테슬라와는 남부 미치광이들의 테러 이후 연을 끊으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착각한 모양이군요.”

“일단은 낡은 추억을 떠나보낸 것을 계기로 좋은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고 해 두죠. 게다가 이제 막 라디오로 재미 좀 보려는데, 마르코니 씨가 거기에 재를 뿌리는 것을 제가 어찌 두고 보겠습니까?”

미국의 라디오 사업권이 JP모건 은행에 있다고 이미 듣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DRR이 미국 진출을 위해 계약을 맺은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DRR과 JP모건은 마르코니의 생각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뉴욕의 코 큰 은행가가 직접 나설 리가 없다.

‘젠장……. 이러면 셈이 복잡해지는데.’

JP모건은 특허 소송을 통해 수도 없이 경쟁자들을 담가온 마르코니에게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다지 척지고 싶은 상대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럼, 들어갈까요?”

“…….”

그러나 이 소송을 철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재판은 시작되었고, 저 문 뒤에서 판사가 자신들이 들어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지.’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대로 자신의 체면이 있다.

JP모건과 싸울 각오를 마친 마르코니는 법정으로 발을 내디뎠다.

비싼 돈을 들인 그의 변호인단이 부디 JP모건의 변호인단보다 낫기를 기도하면서.

* * *

“그러니까 원고 측의 주장으론 DRR의 라디오에 사용된 3극 진공관(Triode)이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2극 진공관(Diode)의 특허를 침해했단 말이군요.”

“맞습니다. 재판장님.”

안경을 고쳐 쓰며 증거로 제출한 서류들을 검토하는 판사를 향해 마르코니의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코니와 그의 변호인단이 DRR과 DRR의 라디오를 공격하기 위해 꺼내 든 칼은 다름 아닌 3극 진공관, 리 디포리스트가 라디오를 위해 개발한 3극 진공관이었다.

마르코니 측이 주장하길 라디오에 사용된 3극 진공관은 마르코니 사의 협력자인 존 앰브로즈 플레밍이 1904년에 개발한 2극 진공관에 영향을 받은 것을 넘어 2극 진공관에 일부 기술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원 역사에서도 마르코니가 리 디포리스트를 특허 침해로 고소했을 때 들고나왔던 주장이었다.

당시엔 마르코니의 주장이 먹혀서 판사들이 ‘특허 침해가 맞다’라고 판결을 내리는 바람에 디포리스트는 3극 진공관의 권리를 마르코니사와 나눠 가져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원 역사와는 상황이 여러모로 달라졌다.

우선, 한스의 개입과 JP모건의 쇼미더머니로 1906년에야 탄생했던 3극 진공관이 2극 진공관과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즉, 3극 진공관은 2극 진공관의 후발주자가 아니라 2극 진공관과 동시기에 개발된 물건이었단 소리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지금 이 자리엔 리 디포리스트가 아닌 JP모건 은행의 악명 높은 법무팀으로 구성된 막강한 변호인단이 있었다.

“재판장님. 원고 측은 3극 진공관이 2극 진공관의 기술을 일부 도용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그리 말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네. 만약 3극 진공관이 2극 진공관을 정말로 도용한 것이라면 최소 몇 달에서 몇 년 후에나 3극 진공관이 나왔어야 합니다. 도용은 도용할 것이 있어야 가능하니까요. 하지만 보십시오.”

변호사 하나가 서류 한 장을 꺼내 눈이 있으면 잘 보라는 듯 법정에 펼쳐 보였다.

“이 서류에 나와 있는 것처럼 3극 진공관은 2극 진공관이 개발되고 불과 며칠 후에 특허를 등록했습니다! 2극 진공관의 기술을 제대로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도용을 한단 말입니까!”

“확, 확실히……!”

판사가 일리가 있다는 듯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JP모건의 변호인단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3극 진공관은 2극 진공관은 근본이 기술원리가 비슷할 뿐, 전혀 상관이 없으며 원고 측의 논리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물론, 마르코니는 이를 인정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말이다.

“개발 과정에서도 충분히 기술은 도용할 수 있습니다. 시기는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뭐라고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원고 측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디포리스트 씨가 2극 진공관에 쓰인 기술을 도용했다는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는 피고 측엔 3극 진공관이 2극 진공관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흐으음…….”

양측의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삿대질에 판사가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듯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마르코니의 얼굴도 판사의 얼굴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비싼 돈을 들인 보람이 있다는 듯, 마르코니의 변호인단은 JP모건 은행 법무팀의 공세를 버텨 내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뿐이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물고 늘어질 수는 있겠으나 재판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결국 자신이니까.

‘이쯤에서 판을 뒤집어야겠군.’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단을 내린 마르코니는 변호인단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마르코니의 변호사 하나가 판사를 향해 말했다.

“재판장님, 이대로라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열된 분위기를 식히기 위해 다시 한번 증거 자료를 검토하기 위해 원고 측에선 휴정을 요청합니다.”

“흐음, 피고 측에선 원고 측의 요청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판사의 말에 JP모건 측 변호사들이 방청석에 앉아있는 JP모건을 바라봤다.

모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피고 측도 이의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30분 동안 휴정하고, 다시 재판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판사가 그리 말한 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법봉을 내려놓고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싸움은 방청석으로 옮겨져 JP모건과 마르코니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합의를 보시죠.”

“듣고 있습니다.”

“라디오의 사업권 일부를 양보해 주시면 소송을 취하하고 물러나겠습니다.”

“저보고 남작을 배신하라는 겁니까?”

“남작을 설득해 달라는 것이지요. 이대로 진흙탕 싸움을 계속하는 것은 그쪽에서도 원하지 않을 텐데요?”

마르코니의 말에 JP모건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미스터 모건. 유럽에서 온 긴급 전보입니다.”

JP모건의 비서가 그리 속닥이며 모건에게 전보를 건넸다.

그리고 전보를 확인한 JP모건은 기다리던 때가 왔다는 듯, 마르코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해야겠군요.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 같으니까요.”

“예?”

“이유는 저 친구에게 들으시죠.”

JP모건이 가리킨 방향으로 마르코니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에 사색이 된 채 허겁지겁 달려오는 자신의 비서가 들어왔다.

마르코니는 갑자기 엄습해 오는 영문 모를 불안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마르코니 씨! 큰,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니, 무슨 큰일?”

“그게 영국 본사에서…….”

비서가 차마 공개적으론 말할 수 없다는 듯 마르코니에 귀에 대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이이…… 비겁한 자식이……!”

마르코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오랜만에 찾아와선 회사 하나를 압박해 달라니 자네도 참 괴짜구만.”

“하하, 독일 제국은 동맹 영국의 선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되었네.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지.”

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에드워드 7세가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홍차 잔을 들어 올렸다.

JP모건이 미국에서 마르코니를 직접 상대하는 사이, 나는 런던으로 달려와 에드워드 7세와 영국 정부와 접촉했다.

이유야 당연히 굴리엘모 마르코니와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가 DRR에 건 소송을 취하하게 만들기 위해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마르코니가 알았다면 더럽다며 욕을 내뱉었겠지만, 먼저 더럽게 나온 것은 어디까지나 그쪽이 먼저였으니 문제없다.

“대신 자네도 약속 잊지 말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를 입 다물게 해 주는 대신 에드워드 7세는 그 어떤 나라보다 먼저 영국에 라디오를 우선적으로 보급할 것을 요구했다.

방송국 설립을 지원해 주는 것은 덤이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의 배불뚝이 국왕도 빌헬름 2세의 라디오 연설에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나야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던 조건이었다.

어차피 영국 말고도 여기저기서 에드워드 7세와 같은 요청을 하고 있었고, 그저 우선순위를 바꿔 영국을 맨 앞에 두면 되는 일이니까.

“그나저나 이제 곧 빌헬름의 결혼식이군.”

“예, 폐하.”

여기서 말하는 빌헬름은 빌헬름 2세가 아니라 당연히 빌헬름 황태자를 말하는 것이다.

황태자의 결혼식은 코앞으로 훌쩍 다가온 상황이었다.

“6월 6일에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던가?”

“그렇습니다. 베를린은 벌써부터 떠들썩하지만요.”

그도 그럴 것이 빌헬름 황태자의 결혼식은 1905년 독일 제국 최대의 이벤트였다.

제국과 황실의 경사에 모든 독일인이 기뻐한 것은 물론이고, 결혼식이 열리는 베를린은 축제 분위기에 빠져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찼다.

“결국, 녀석도 결혼이란 이름의 관에 스스로 들어가는군.”

“결혼을 앞둔 신랑에게 하는 덕담치고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한스 자네야 아직 어리니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중에 결혼생활을 겪게 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될 거야.”

내 말에 에드워드 7세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하긴 에드워드 7세의 결혼생활은 평온했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긴 했다.

에드워드 7세는 아내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왕비와 신혼 초를 제외하면 평생 냉담한 관계를 유지했으니까.

다만,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사이의 불화는 두 사람의 성격 차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론 에드워드 7세의 화려한 여성 편력 때문이었다.

심지어 에드워드 7세는 알렉산드라 왕비 눈앞에서 정부였던 앨리스 케펠(Alice Keppel)을 대놓고 침실로 끌어들이기까지 했으니.

만약 시대가 달랐다면 후손인 찰스 3세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처럼 이혼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나도 눈치가 있어서 구태여 이 사실을 입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결혼이라.’

시대가 시대인 만큼 나도 언젠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전생 시절부터 연애완 연이 없는 인생이었던지라 참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만약 내가 결혼한다면…….’

순간 머릿속에 밝게 웃는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고, 꿈은 결국 환상에 불과하기에 꿈인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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