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독일 제국 방송 (1)
“그래, 이게 한스 네가 몇 년 동안 만들어 오던 그 라디오란 물건이라 말이지?”
“그렇습니다. 폐하.”
“상당히 크군.”
빌헬름 2세는 흥미로운 눈으로 라디오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다만, 카이저의 말대로 지금의 라디오는 흔히 생각하는 오디오만 한 크기가 아니라 겉만 보면 서랍장으로 착각할 정도로 컸다.
기술의 한계이자 초기 진공관 라디오가 가지는 한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작게 만들려면 진공관 기술이 더 발전하든가 아예 반도체라고도 불리는 트랜지스터가 나와야만 했다.
트랜지스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야 미국의 벨 연구소에 의해서 처음 개발되는 물건이었기에 지금의 기술력으론 그 테슬라가 있다 해도 꿈도 못 꿀 물건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이 라디오와 관련해서 청하고 싶은 게 있다고?”
“예. 독일 내에서의 라디오 방송에 대한 전권과 더불어 방송 협회 설립 허가를 받고 싶습니다.”
“방송이라. 독일 전역에 말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빌헬름 2세가 카이저 콧수염을 배배 꼬며 상상에 잠겼다.
그리고는 상당히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일일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아도 내 연설을 모든 독일 국민에게 들려줄 수도 있겠군.”
“물론입니다. 폐하. 게다가 여론을 독일 제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 좋은 사례는 아니었지만, 콧수염 총통과 그 나팔수였던 괴벨스의 무기도 라디오였다.
선전과 선동엔 자고로 대중매체만 한 것이 없는 법이다.
“좋다. 너에게 독일 제국의 라디오 방송에 대한 전권을 내릴 테니 어디 한번 잘해 보거라.”
“감사합니다. 폐하!”
빌헬름 2세가 흔쾌히 허락하자 나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로써 독일 제국의 라디오 방송권은 나에게 있다.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독일 내에서 라디오 방송을 할 수 없다는 소리다.
또한, 라디오 특허권 자체가 나에게 있는 이상 다른 유럽 국가도 내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미국의 경우엔 JP모건에게 라디오 사업에 대한 권리를 넘겼지만, 그는 나와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로 지내고 싶어 했던 만큼 괜히 나와 척질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라디오 생산은 벌써 시작했다지?”
“예. 이미 공장을 세우고 노동자들을 고용해 라디오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공장은 컨베이어 벨트 조립라인 시스템을 도입한 상태다.
본래 컨베이어 벨트를 가장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다들 알다시피 포드사였지만, 그 시기가 1913년이라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너무 시간이 지체된다.
그렇다고 무지성으로 두유 노 컨베이어 벨트를 외치며 다른 회사들에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하라고 무작정 밀어붙일 수도 없는 노릇.
그렇기에 여기서 먼저 효과를 입증하고 그 지표를 증거로 독일 산업계, 특히 벤츠나 다임러를 비롯한 자동차 회사들을 한번 설득해 볼 생각이다.
‘슬슬 전차 개발도 생각해야 하니까.’
게다가 빠른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은 독일 자동차 산업을 크게 부흥시킬 수도 있을 테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다.
다만, 전차는 기관단총 때보다 규모가 훨씬 큰 이야기였기에 군부하고도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나눠 봐야 할 문제라 나 혼자 성급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일단 눈앞의 라디오부터 확실히 매듭짓는 게 먼저였다.
* * *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모건.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라디오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요.”
며칠 후, 라디오를 보러 본거지인 뉴욕을 떠나 독일 제국에 방문한 JP모건이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주인의 식탁 위에 올라가 있는 치킨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내 뒤에 있는 라디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라디오입니까?”
“네. 한번 틀어 보시겠습니까?”
“오. 벌써 방송이 가능한 겁니까?”
“이미 베를린에 라디오 실험을 위해서 라디오 방송을 위한 시설을 지어 놨습니다.”
“아하.”
“연락만 하면 시험 방송 정도는 바로 가능할 겁니다.”
내 말에 JP모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전화를 걸어 교환원에게 세계 최초의 라디오 방송 시설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린의 라디오 방송국에 연결해 달라 말했다.
곧 상주하고 있던 직원이 내 연락에 바로 준비하겠다 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기 시작했다.
[치직─! 여기는 베를린. 오늘 날씨는 맑고 구름도 적습니다. 공원에 나가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치지직─! 날씨라 할 수 있겠군요.]
“오오오!”
JP모건이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탄성을 질렀다.
누가 금융계의 대마왕 아니랄까 봐 그 탄성에는 라디오라는 시대를 바꿀 발명품에 대한 순수한 경탄이 아닌 라디오가 벌어 올 달러와 황금에 대한 탐욕이 가득했다.
벌써부터 ‘난 돈이 좋아!’라고 외치는 JP모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귀에 어른거릴 정도다.
“당장 미국에 공장을 세워야겠군. 아니, 그럼 시간이 걸리니 당분간은 독일에서 수입해 와야겠습니다. 라디오 생산은 시작하셨죠?”
“당근이죠.”
“아! 행동이 빨라서 좋군요. 훌륭한 비즈니스 파트너란 바로 남작님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침을 튀겨 가며 나를 그리 치켜세우는 JP모건.
만약 라디오가 폭망했다면?
그땐 JP모건이 날 인간 취급이나 할까 싶다.
“미국에 돌아가면 한동안 바쁘게 움직여야겠습니다. 하하!”
“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디오를 판매하기 전에 먼저 방송국부터 설립해야 하니까요.”
“벌써 정부와 이야기가 다 끝났습니까?”
JP모건이 살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정부의 허락을 이렇게 빨리 얻어 냈는지 궁금한 얼굴이다.
물론 그 답은 간단했다.
“굳이 정부의 허가를 받아 낼 필요는 없죠. 황제 폐하만 설득하면 충분하니까요.”
“허. 나는 미합중국과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미국 시민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독일 제국이 참 부럽습니다. 난 정부 인간들과 입씨름해야 해야 할 것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픈데 말입니다.”
JP모건이 상상만 해도 짜증 나고 답답하다는 듯 퉁명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긴, 미국 같은 경우엔 정부에게 라디오 방송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받으려면 꽤 복잡한 절차를 걸쳐야 할 거다.
현재 대통령도 하필이면 트러스트를 박살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였고 말이다.
“그래도 미스터 모건에겐 간단한 일이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귀찮은 것은 귀찮은 것이지요. 아마 돈을 좀 써야 할 겁니다. 라디오가 벌어다 줄 돈에 비하면 푼돈이지만 말입니다.”
더 큰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소의 대가는 치를 만하다는 것인가.
참 그다운 대답이다.
“그럼, 라디오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벌써요?”
“원래 스위스에 볼일이 있어서 유럽을 찾아왔다가 잠시 짬을 내서 독일에 온 것이라서요.”
“그렇군요. 하긴 바쁘신 몸이니까요.”
“그러니 전 이만 기쁜 마음으로 실례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방송국 이름은 이미 정하셨습니까?”
“네.”
딱히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대충 정한 것이지만 말이다.
“DRR.”
독일 제국 방송(Deutsche Reich Rundfunk).
그것이 독일 최초이자 세계 최초라 역사에 기록될 방송국의 이름이었다.
* * *
“자자, 다들 구경하고 가세요!”
“응?”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베를리너(Berliner, 베를린 시민), 디트리히는 퇴근길에 근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점가에서 상품을 홍보하는 호객꾼인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일이었지만, 디트리히는 제자리에 멈춰 선 채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대체 무엇을 파는지 몰라도 호객꾼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흥미를 느낀 디트리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호객꾼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결코 호객꾼 옆에서 홍보를 돕고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미모에 혹했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부터 신사 숙녀 여러분께 소개해 드릴 것은 전 세계를 놀랍게 할 우리 독일 제국의 최신 발명품. 그 이름하여 라.디.오!”
“라디오?”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겉보기엔 그냥 가구로밖에 안 보이는데, 대체 저게 뭐길래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호객꾼은 사람들의 흥미가 충분히 무르익자 미소를 지으며 라디오를 가리켰다.
“자, 이 라디오가 무엇인지 궁금하실 텐데, 이 라디오란 것은 이름 높은 발명가인 니콜라 테슬라 씨가 만든 발명품으로, 이것만 있으면 집 안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뉴스와 음악, 스포츠 경기 등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호오~”
사람들이 호객꾼의 말에 무심코 감탄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그게 정말이냐는 듯 의심의 눈초리도 있었다.
그러나 호객꾼은 불신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물론 못 믿는 분도 계실 겁니다. 지금까지 이런 기계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제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호객꾼이 손짓으로 신호하자 그의 옆에 서 있던 미녀들이 잘 보라는 듯 라디오의 전원을 켜고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췄다.
[치직─치지직──! 따라따라따라~따라라~따라라라~♪]
곧이어 라디오에서 정말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독일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사람들은 축음기를 튼 것도 아닌데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입을 떡 벌렸고, 디트리히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한 달 후, 공식적으로 개국하는 저희 독일 제국 방송 DRR에서 여러분께 라디오를 통해 매일 빠른 뉴스와 매일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해 드릴 예정입니다!”
“우와아~!”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디트리히는 어느새 저 라디오를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할 선물로 들고 가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나 곧 지갑이 두툼하지 못하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달았다.
저 라디오는 크기가 크기인 만큼 상당히 비싸 보였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가장 디트리히는 도저히 아내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디트리히는 아쉬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참고로 지금 라디오를 구매하시면 라디오가 무려 반값! 거기다 저희 직원들이 집까지 무료로 배송해 드립니다!”
이어진 호객꾼의 말에 그는 바로 지갑을 열었다.
반값이라니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이걸 놓치면 바보다.
“여기다 주소를 적으면 되나?”
“네. 구매 감사합니다. 고객님!”
“거기 줄 똑바로 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도 디트리히와 별반 차이 없었다.
사람들은 어서 내 돈을 가져가라며 DRR 직원들에게 몰려들었다.
다만, 라디오를 반값에 판다는 것은 회사로선 당연하게도 금전적으로 꽤 손해 보는 일이었다.
하지만 DRR의 사장인 한스의 생각은 달랐다.
한스가 보기에 라디오 판매를 돈을 버는 것보단 라디오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것이 먼저였다.
라디오의 가치는 어디까지나 라디오 그 자체가 아닌 라디오를 통해 제공하는 방송 매체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은 어차피 수신료와 광고로 벌면 된다.
이미 라디오의 가치를 깨달은 눈치 빠른 사업가들이 자신에게 연락해 오고 있다.
그렇기에 한스는 라디오 보급을 위해 다소의 손해쯤은 감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JP모건이 말했듯이 라디오가 가져올 이득에 비하면 그 정도는 푼돈이었으니까.
그리고 여기에 홀라당 넘어간 디트리히는 라디오를 구매하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왜 상의도 없이 쓸데없는 돈을 썼냐며 분노한 아내에게 등짝 스매시를 맞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