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98화 (98/193)

98화 : 포츠머스 조약 (2)

“……이것이 최선인가.”

“정말 송구합니다. 폐하. 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폐하의 심려에 크나큰 누를 끼쳤습니다.”

“그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네. 고무라 외부대신. 오히려 그대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우린 아무것도 얻지 못했겠지.”

포츠머스 조약에 서명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고무라 주타로는 메이지 천황의 위로에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살았다는 안도감에서 나온 미소가 어려 있었다.

물론, 어전회의에 참석한 가쓰라 총리를 비롯한 다른 대신들은 고무라와 달리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었다.

제1 목표였던 뤼순과 다롄은 또다시 저 멀리 날아가 버렸고,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열강들에 인정받았을 뿐 당장 식민지로 삼지도 못했다.

이에 비해 사할린은 솔직히 일본도 관리가 어려워서 한 번 포기한 적이 있던 땅 아닌가.

심지어 그것도 섬 전체가 아니라 고작 반절뿐이었다.

‘그런데 고무라 저놈은 러시아에 양보를 얻어 내었다고 천황 폐하께 칭찬받는 꼴이라니.’

물론 양보라기보단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비테가 선심을 쓰듯 던져 준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가쓰라로선 내색은 못 했지만 너무나도 입맛이 썼다.

“다만 이번 전쟁에서 총리, 그리고 군의 무능함에 대해선 참으로 실망했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나이다.”

그러나 이어진 메이지 천황의 날 선 목소리에 가쓰라는 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야마가타 아리모토를 비롯한 대본영의 장성들 또한 이러다 머리가 땅에 닿는 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허리를 깊게 숙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저히 입 밖으로 변명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의 참호전 삼종 세트로 이루어진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도저히 돌파할 수 없었다.

병사들의 돌격은 러시아군의 기관총 앞에 너무나도 무력하게 막혔고, 그나마 효과가 있던 화력 공세는 공업력의 부족으로 포탄이 부족해 제때제때 이루어지질 못했다.

이는 일본군이 러시아군보다 무능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러시아군도 일본군의 참호선을 돌파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1914년에도 어떻게든 상대방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하던 참호전이다.

그보다도 10년 전인 1904년의 교리나 무기론 답이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 국민은 그것을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오로지 무능한 지휘관들로 인해 남편과 아들들을 가슴에 묻어야만 했단 사실뿐이었다.

“어째서 네놈은 살아 있는 거냐!”

“내 아들 살려 내라! 이 나쁜 놈아!”

“네놈들은 황군이라 이름을 댈 자격도 없다!”

참혹했던 전장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온 일본군 지휘관들에게 온갖 욕설과 오물이 쏟아졌다.

1군 사령관이자 압록강의 아군 학살자란 치욕적인 별명이 붙은 구로키 다메모토는 수모를 참지 못해 할복해 버렸고, 제12사단 사단장 이노우에 히카루 중장은 아내와 함께 목을 매었다.

심지어 원 역사에서 뤼순 공방전의 책임을 지기 위해 할복하려 했던 노기 마레스케보고 자신이 죽기 전엔 어림도 없다며 제지한 메이지 천황조차 그들의 잇따른 죽음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황에게나 일본 국민에게나 비국민이자 죽음으로도 그 죄를 씻지 못할 대역죄인에 불가했으니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무사한 것은 산에서 게릴라전으로 버티고 있는 조선 의병들 때문에 아직도 한반도에 주둔 중인 노기 마레스케를 비롯한 소수의 장성과 일본 해군뿐이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벗어나 있었거나 육군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잔혹한 일본식 책임 묻기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마카로프 제독. 허락만 해 준다면 당신의 얼굴을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하하! 마음만 받겠소. 도고 제독.”

한편 포트 아르투르의 반환이 결정되자 태평양 함대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게 된 스테판 마카로프 제독은 전쟁이 끝나자 자신을 찾아온 도고 헤이하치로와 악수를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전쟁 내내 제대로 싸우지도 않는 마카로프 제독에게 일방적으로 놀아난 도고 제독은 이젠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마카로프 제독은 자신이 제대로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싱글벙글 웃었을 뿐이었다.

원래 적이 X같다고 욕하는 것만큼 군인에게 좋은 칭찬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도고 헤이하치로가 함대와 함께 뤼순을 떠나고, 본국의 상황과 군을 떠난 로제스트벤스키의 소식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마카로프 제독 또한 착잡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면 지노비 녀석에게 위로를 전해야겠군.”

로제스트벤스키는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괘씸한 개자식이었지만, 러시아 제국 해군 내의 몇 없는 유능한 제독이었던 만큼 마카로프 제독으로선 그의 사임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마카로프 제독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차르에게 그의 군 복귀에 대해 청을 한번 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쯤 한창 정신없을 터인 니콜라이 2세의 귀에 자신의 말이 들어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듣자 하니 본국에선 러시아 전역에서 파업과 폭동을 일으킨 노동자들을 진압하느라 난리라고 들었다.

아마 차르도 이를 해결하느라 밤잠을 설치리라 마카로프 제독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니콜라이 2세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며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는 러시아 귀족들의 조언에 따라 ‘폭도’들에게 끊임없이 납탄을 선물해 주고 있었다.

“제독님. 출항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이만 포트 아르투르에 작별 인사를 하세나, 제군들.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니.”

마카로프 제독은 우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이 대감, 오랜만이외다.”

“민 대감께서도 잘 지내셨소?”

“대감이라뇨. 이젠 그저 시종무관에 불과한 몸인걸요.”

러일전쟁이 끝나자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이용익은 자조하는 민영환의 얼굴에 어깨를 토닥거렸다.

소식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한제국 조정에 자신들의 자리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자 하니 이완용이가 내가 없는 사이에 탁지부대신 자리를 차지했다지요?”

“예. 일본인들에게 아주 알랑방귀를 뀌더군요.”

평소에도 이완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민영환이 빈정거리며 그리 대답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자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일본에 붙은 이완용은 본래라면 학부대신이 돼야 했었지만, 역사가 바뀐 탓인지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대한제국 조정은 친일파거나 친일파로 전향한 자들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은 오로지 일본의 명령에 따라 조정을 움직였다.

이제 대한제국은 사실상 살아는 있되 스스로의 의지를 상실한 식물인간이자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결국, 이 나라는 일본의 속국이 되어 버렸군.”

식민지보다야 낫다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지금은 저들이 여력이 되지 않기에 단숨에 조선을 집어삼키는 것을 포기했을 뿐.

일본은 조금씩 조선을 흡수하며 언젠가 이 나라를 자국의 영토로 병합하려 할 것이다.

“나야 나이가 많으니 그 꼴을 보기 전에 죽겠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겠지요.”

“대감…….”

“그나저나 폐하께선 별말 없으셨소?”

이용익의 질문에 민영환이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적어도 종묘사직은 보전했으니 다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다요?”

“그게 답니다.”

민영환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이용익 또한 실망감에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결국, 대감의 계획대로 갈 수밖에 없겠구려.”

“전 이미 황상께 사직서를 올렸습니다. 내탕금 건이 들키기 전에 이 나라를 떠야지요. 마침 이완용이가 사색이 된 채로 사라진 내탕금의 행방을 찾고 있다니 말입니다.”

“푸흙! 암, 그래야지요. 이 사람은 이미 관직에서 내쫓긴 몸이니 사직서 쓸 필요도 없겠어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이용익이 지금쯤 독일 제국의 도이체방크에 고이 잠들어 있을 고종의 내탕금, 소위 고종의 비자금으로 알려진 돈을 떠올렸다.

고종은 황실의 개인 자산인 내탕금을 관리하면서 많은 양의 비자금을 축적하여 제일은행(第一銀行), 덕화은행(德華銀行), HSBC 등의 해외 은행에 예치해 두었는데 그 규모만 최소 51만 마르크, 현재 가치로 약 251억 원에 달했다.

본래라면 고종의 비자금 대부분은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비자금의 관리자였던 이용익이 납치되는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 강탈당하지만, 지금 일본은 고종의 비자금을 단 한 푼도 손에 넣지 못했다.

민영환과 이용익이 러일전쟁이 터지기 전, 고종의 비자금을 모조리 빼돌려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고종의 비자금과 해외 계좌 상당수가 이용익의 명의로 되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고종의 비자금은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상하이 지점에 모였다가 곧바로 베를린 지점의 한 계좌로 향했다.

그리고 이 계좌의 명의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한스 폰 초이였다.

어차피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가면 빼앗길 돈.

그렇기에 한스는 고종의 비자금을 빼돌려 대한제국에 변고가 생기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라며 민영환을 꼬드겼다.

혹여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자신이 안전하게 관리해 준다는 말은 덤이었다.

물론 대한제국이 멀쩡하면 한 푼도 빼놓지 않고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제국이 멀쩡할 확률보다 멀쩡하지 않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에 와서 보면 정말이지 천만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소.”

적어도 일본에 그 돈이 넘어갈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눈 뜨고 자기 돈을 빼앗긴 고종은 폭발하겠지만, 이 또한 나라를 위한 일이다.

황제 또한 언젠간 이해할 것이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요?”

“아시다시피 국내의 의병들은 거의 진압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싸우고자 하는 자들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황상과 조정에 반하는 길이라도 말입니까?”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황제와 조정이 일본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자 많은 조선인이 환멸을 느끼며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중엔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영환과 함께하기로 한 박승환 참령을 비롯해 대한제국군 출신 장교들과 병사들도 상당히 많았다.

“전 그들을 한데 모아 해외로 나가 세를 모아서 이 나라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조직을 만들 생각입니다.”

“그거 멋지군. 나도 부디 한자리 끼워 주시오.”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설 군이나 이회영 군이 어째 안 보이오?”

이용익은 민영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두 사람이 없는 것을 그제야 깨달으며 민영환에게 말했다.

이에 민영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지금 미국에 가 있습니다.”

“미국? 허, 설마……?”

미국이란 말에 이용익의 얼굴이 묘해졌다.

“민 대감, 대감은 혹시 반정이라도 꿈꾸는 게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의미는 같다고 할 수 있겠군요.”

“허허…….”

“무능한 왕은 내쫓아도 된다. 우리 조선의 유서 깊은 전통이자 건국 이념 중 하나 아닙니까?”

조선이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나라이긴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용익은 여전히 그 예시를 여기에 드는 것이 맞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용익은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재미있군. 좋소, 내 끝까지 대감과 어울려 드리리라.”

두 사람은 넓게 펼쳐진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본의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조선의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한편 포츠머스 조약의 소식을 들은 청 또한 조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격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조공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의 괴뢰국이 된 상황에 말이다.

“조선까지 기어코 일본의 속국이 되었으니, 청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자신의 저택에서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소식을 전해 받은 순친왕은 그리 한탄했다.

청일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10년 만에 옛 조공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0년 후엔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고, 그다음 10년엔 중국에 그 더러운 발을 들이밀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괴뢰국이란 결국, 식민지로 합병하기 위한 전 단계에 불과했던 만큼 순친왕의 생각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심지어 노서아인들은 북만주에 병사들을 보내어 자신의 땅으로 삼고 있다지.”

랴오둥반도를 돌려준다는 말에 청의 모두가 기뻐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쏟은 소식이었다.

당연히 청나라는 이에 항의하며 다른 열강들에 러시아 좀 말려 달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청 조정은 깨달았다.

열강들이 송화강(松花江) 이북을 러시아가 차지하도록 묵인했다는 것을.

그것으로 끝이었다.

청은 이를 막을 방법도 의지도 없었다.

“만주족이 만주를 잃으면 과연 만주족이라 할 수 있는가?”

순친왕은 그리 자조하며 자신에게 물었다.

정답은 아니었다.

“더는 안 된다. 청은 바뀌어야 한다.”

이미 이번 일로 중국 지식인 계층이 무능한 청나라 조정에 한층 더 반감을 품게 되었다.

한때 불란서를 비롯한 서양의 여러 국가를 뒤집었다는 혁명은 이제 비단 서양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직 덕국에 치욕을 갚지도 못했거늘……!’

순친왕은 아직도 악몽을 보며 그때를 떠올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덕국 황제의 오만한 눈을.

그 옆에서 자신을 비웃고 있던 비열한 조선 어린아이의 얼굴을.

물론 순친왕 개인의 감정에 의해 상당히 왜곡된 기억이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순친왕은 언젠가 독일 제국과 가증스러운 한스 폰 초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청을 망하게 둘 수 없었다.

본래 권력에 욕심이 없어 청나라가 멸망할 때 오히려 이제야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친왕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엔 복수를 위해 반드시 대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복수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순친왕은 포츠머스 조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유럽에서 들려온 소식에 다시 한번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복수를 위한 길이 너무나도 멀고 험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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