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피의 화요일
“하느님, 차르를 보호하소서(Боже, Царя храни)~!”
“음?”
1904년 12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니콜라이 2세 일가가 거주하는 러시아 제국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심장, 겨울 궁전을 수비하던 러시아 제국의 근위대 병사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누구 할 것 없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단 군인들뿐 아니라 러시아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익숙한 음, 익숙한 가사.
러시아 제국의 국가였다.
“성 안드레이 축일에 찬송가도 아니고 웬 국가야?”
한 근위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리 중얼거렸다.
그러나 노랫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근위병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 또한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강인하고 위엄 가득한 차르시여(Сильный державный)~!”
“이런 썅……!”
얼마 지나지 않아 근위병들의 불안감은 얄미울 정도로 정확히 적중했다.
“영광을 위해 군림하소서, 우리의 영광을 위해(Царствуй на славу, на славу намъ)~!”
수만.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콘과 플래카드를 든 채 겨울 궁전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구질구질하고 투박한 복장을 보아하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숨겨진 명물, 하루가 멀다고 소란을 일으키는 지긋지긋한 노동자들이 분명했다.
“당장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께 알려!”
“모두 일렬횡대로! 저들이 궁전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아라!”
근위대 장교들의 명령에 따라 근위병들이 서둘러 총을 든 채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노동자들의 행진을 가로막았다.
이를 본 노동자들도 근위대에 거리를 둔 채 곧 발걸음을 멈췄다.
겨울 궁전 광장 앞에 노동자와 근위대가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번 성 안드레이 축일의 행진을 주도하던 가폰 신부가 모두의 앞으로 나왔다.
“병사들이여. 인민들을 쏘지 마시오!”
가폰 신부가 외쳤다.
“우리는 그저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의 목소리를 황제 폐하께 전하러 왔을 뿐이오. 한 줌의 빵과 신의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 말이오!”
“황제 폐하께선 지금 성 안드레이 축일을 맞이하여 미사에 참석 중이시다. 나중에 그대들의 말을 전할 테니 당장 해산하고 물러가라!”
근위대 장교의 판에 박힌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폰 신부와 러시아 민중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나중에 높으신 분들에게 말할 테니 이만 물러가라는 사람치고 정말로 노동자들의 요구를 위쪽에 전달한 자는 없으니까.
이는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러시아 노동자들이라면 누구나 몸으로 겪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우리의 청에 답을 내려주실 때까진 물러날 수 없소!”
그리고 그 상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가폰 신부 또한 니콜라이 2세를 직접 만나기 전까진 해산할 수 없다며 근위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물론, 처음부터 니콜라이 2세를 불러올 생각은 마음에도 없었던 근위대 장교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여튼 노동자들이란 사람이 좋게 좋게 말해도 전혀 듣질 않는 미련하고 쓸데없이 고집만 센 족속들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근위대 또한 평소처럼 무턱대고 노동자들을 쫓아 버릴 수 없었다.
오늘은 러시아 제국의 수호성인인 성 안드레이의 축일이었고, 이곳은 황제 폐하께서 계신 겨울 궁전이었다.
멋대로 피를 보기엔 장소도, 그리고 날도 안 좋았다.
게다가 눈앞의 빈민들은 어림잡아도 최소 4, 5만.
자칫 잘못 대응했다간 대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근위대 또한 적어도 위에서 따로 명령이 내려올 때까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블라디미르 대공께 소식은 전했나?”
“넷. 일단 폐하께도 보고를 드려야 하기에 대기하고 있으랍니다.”
부하의 대답에 근위대 장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르께서 정말 자비를 베푸시어 이 자리에 나오든 아니면 평소처럼 노동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든 결국엔 차르의 선택.
차르의 검이자 하수인에 불과한 근위대 병사들로선 그저 황제의 뜻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성 안드레이 축일을 맞이하여 신앙심 깊은 니콜라이 2세는 경건한 얼굴로 가족들과 함께 카잔 대성당(Казанский собор)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힘든 시기다. 러시아 제국에도 니콜라이 2세에게도.
일본과의 전쟁은 쉽지 않으리란 독일인들의 경고처럼 지지부진했고, 전황을 바꾸기 위한 비책이었던 흑해함대의 출격은 전함 하나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우발적인 해전이 일어나서 드볘나드차티 아포스톨로프가 격침당하고 다수의 함선이 손상을 입었다.
니콜라이 2세는 아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화가 났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이 일을 덮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니콜라이 2세가 가만히 주저앉아 자포자기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차르는 자신과 러시아 제국의 체면을 살리고, 흑해함대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엔 발트함대를 극동으로 보내려고 했다.
물론 러시아에 돌아오자마자 차르가 또다시 이상한 고집을 피우는 것을 마주친 비테는 재무장관직에서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는 태도로 이에 결사반대했고, 다른 관료들과 군부의 장성들과 제독들, 심지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자신의 무슨 말만 하면 반대, 반대, 또 반대만 하니 니콜라이 2세로선 답답하고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2세를 그보다도 더 힘들게 했던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태어난 자신의 첫아들이자 유일한 아들, 알렉세이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2세에겐 이미 네 명의 딸들이 있었지만, 어머니 예카테리나 여제를 증오했던 파벨 황제로 인해 현 러시아 제국에선 여성의 황위 계승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의 탄생은 니콜라이 2세 부부에게 크나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차르 부부의 귀하고 소중한 아들인 알렉세이가 하필이면 어머니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형제들처럼 혈우병 환자로 태어난 것이다.
자신의 처남들이 어떤 비극을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던 니콜라이 2세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의 의사란 의사는 총동원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혈우병은 불치병이라며 황태자의 병을 고칠 수 없단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알렉세이의 차도는 나아질 기미를 안 보였고, 차르 부부는 아들의 고통과 괴로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기에 성 안드레이 축일을 맞아 미사에 참석한 니콜라이 2세는 눈을 감고 천상에 계신 주와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자신의 제국이 눈앞에 닥친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소중한 아들이자 러시아 제국의 미래인 알렉세이의 병이 제발 나아질 수 있도록.
“니키.”
니콜라이 2세가 그리 기도에 빠져 있을 때, 차르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생이자 니콜라이 2세 자신의 숙부였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대공이었다.
“지금 궁전 앞에 폭도들이 몰려들었다는구나.”
“숙부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그러라고 경찰과 치안을 숙부님께 맡긴 것 아닙니까? 전 그런 쓸데없는 일보다 주께 기도 드리는 것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조카의 말에 블라디미르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성당을 떠났다.
오늘은 경건한 마음으로 보내야만 하는 성 안드레이 축일이건만 폭동이라니.
참으로 불경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니콜라이 2세는 그리 속으로 중얼거린 채 다시 신께 기도를 드리는 일에 집중했다.
지금 니콜라이 2세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차르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발포해.”
카잔 대성당을 떠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겨울 궁전에 도착하자마자 근위대에게 그리 명령을 내렸다.
근위대 장교들은 지금 진심이냐는 듯한 눈으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을 바라봤지만, 가폰 신부와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불행하게도 그는 천한 노동자들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눈에 빵과 평화를 바라는 가폰 신부와 노동자들은 러시아 제국과 로마노프 왕조를 위협하는 폭도에 불과했고, 폭도는 자고로 납탄과 기병도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었다.
“성스러운 날에 폭동을 일으킨 불경한 역도들이다. 결코 자비를 베풀지 마라!”
철컥!
“어? 어어?”
결국,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명령에 따라 근위병들이 일제히 눈앞의 민중들을 향해 총을 조준했다.
노동자들은 그때까지도 설마 차르의 병사들이 자신들을 정말로 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르의 근위대는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기며 러시아 인민들이 가진 차르에 대한 마지막 믿음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타타타타타타타탕─────!!!
그렇게 성 안드레이 축일의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꺄아아악!!”
“군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쏜다!”
“도망쳐!”
차르의 근위대는 노동자들을 향해 감정 없는 기계처럼 무자비하게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고,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고를 반복했다.
차르에게 자비를 구하러 온 러시아 인민들은 피를 쏟으며 차디찬 겨울 궁전 광장에 쓰러졌고, 이 끔찍한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가폰 신부는 절규하며 사악한 차르를 저주했다.
“니콜라이이이이이───! 차르라 불릴 자격 없는 학살자여! 너와 네 가족은 결코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너희를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지옥뿐이다!”
그러나 가폰 신부의 절규는 곧 이어진 카자크 기병대의 돌격에 묻히고 말았다.
그렇게 총칼에 피를 흘리고 말발굽에 짓밟히면서 러시아 노동자들을 드디어 깨달았다.
누군가의 지른 비명처럼 이제 러시아 제국에 차르는 없고, 하느님도 없다는 것을.
* * *
“친애하는 니콜라이 폐하께서 기어코 사고를 치셨군.”
포템킨 다음엔 피의 일요일, 아니 화요일이라니.
아니면 성 안드레이 축일의 대학살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이름이든 그저 쓴웃음 밖에 나오질 않는다.
상대방의 자충수는 즐거운 법이었지만, 빵과 평화를 외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납탄을 선물한 니콜라이 2세의 행동은 그를 직접 만나 본 나조차도 욕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짓이었으니까.
괜히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을 비롯한 러시아의 동맹국들이 니콜라이 2세에게 학살자라며 망명을 거부했던 것이 아니다.
이쯤 되면 우리 카이저는 사실 성군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빌헬름 2세 치세 아래 독일 제국은 외적으론 몰라도 적어도 내부적으론 큰 문제가 없었으니까.’
사실 제1차 세계대전만 아니었다면 빌헬름 2세는 외교만 못했을 뿐, 그럭저럭 괜찮은 황제로 남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자체는 꼭 사라예보 사건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전쟁이라 의미 없는 가정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이것으로 러시아 제국엔 사실상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당장 성 안드레이 축일의 대학살에 분노한 러시아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파업과 폭동을 일으키고 있고, 폴란드와 핀란드 등 러시아의 압제 아래 놓인 지역에서도 연일 반러시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과 영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혁명가들 또한 이때다 싶어 날뛰는 것은 덤이었다.
몇 개월 빨리 시작된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었다.
아직 비테가 건재하고, 러시아 제국엔 스톨리핀이라는 러시아 최후의 명재상이 존재했던 만큼 이번 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블라디미르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빨간 친구들의 힘도 아직은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란 시한폭탄은 이 이후에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도화선이 모두 타오르는 날, 로마노프 왕가는 몰락하고 러시아 제국의 모든 것은 붉게 물들리라.
“묵시록의 예언 같은 소리는 이쯤 해 두고.”
며칠 후면 세는 나이로 14살, 한국으로 따지면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라 그런지 벌써 중2병이 오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것으로 러일전쟁도 끝났네.”
스스로 피의 화요일이라는 족쇄를 목에 채운 러시아 제국은 이 이상 일본과의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다.
주러시아 독일 대사관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자신의 제국이 불타오르자 니콜라이 2세는 내쳤던 비테를 다시 불러들여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이고 서둘러 종전 협상을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 순간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던 일본 또한 얼씨구나 하고 러시아와의 종전 협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얼마 후 쇠뿔도 단번에 빼라고 곧 미국 햄프셔주의 항구 도시인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러일전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러시아 제국과 일본 간의 회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