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포템킨 반란 (3)
“내가 외교관이 된 이래 이런 황당한 일은 난생처음이군.”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델카세 외무장관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이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일어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난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의 일요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이때 포템킨 반란이 ‘펑!’ 하고 터질 줄 누가 알았겠나?
어째 베네수엘라 때도 그렇고 해전이 벌어질 때마다 자꾸 이런 우발적 사고가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은 기분이다.
‘분명 착하게 산 것 같은데, 왜 세상이 날 엿 먹이려고 작정한 것 같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난장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이번만큼은 우리 독일 제국의 책임도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영국도, 프랑스의 책임도 아니었다.
“허허허허…….”
이 모든 것은 새하얗게 불태웠다는 듯이 허탈한 표정으로 웃고만 있는 비테의 얼굴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 제국이 만들어 낸 재앙이었다.
비테 또한 포템킨 반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쏟아지는 비난의 눈초리가 억울하겠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게다가 그 사고를 쳐 놓고 정작 포템킨을 놓쳐 버리는 바람에 지금 지중해 전역이 난리가 났다.
포템킨은 전 드레드노트급, 아니 전 프리드리히급 전함 중에선 나름대로 최신형 전함.
최신형 전함이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은 채 지중해에서 멋대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을 원주인인 러시아 제국은 포함해 그 어떤 나라도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러시아 측은 대체 이번 일을 어떻게 책임질 것입니까?”
“…….”
뿔이 잔뜩 난 밸푸어 총리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비테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영국 지중해 함대는 이번 사태로 인해 구축함 4척을 잃고 다수의 함선이 손해를 입어 선거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프랑스 지중해 함대의 상태도 영국보다 심하면 더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기에 델카세 외무장관의 시선 또한 전혀 곱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이 정말 우리 프랑스의 동맹인지 의심이 되는군요. 덕분에 의회에서 나만 한 소리 듣게 생겼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쉽게 쉽게 가지 뭐하러 일을 질질 끌어선…….”
델카세의 가시 돋친 말에 비테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델카세는 비테보단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흉인 베조브라조프를 겨냥하고 한 말이었겠지만.
“뭐, 힘내십시오.”
나는 침울해져 있는 비테를 작은 목소리로 속닥이듯이 말하며 그를 위로했다.
독일 함대가 가장 피해를 적게 입었기에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지, 만약 피해가 컸다면 나도 비테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을 거다.
모로코 해전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인 베조브라조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밸푸어와 델카세의 힐난 어린 어조에도 불구하고 비테는 그 어떠한 자그마한 변명도 내뱉지 못했다.
이 중 가장 피해가 큰 것은 어디까지나 전함까지 격침당한 러시아 제국이었지만, 염치를 안다면 이 자리에서 우리도 피해자라는 개소리를 내뱉을 순 없었을 테니까.
당장 회담 내내 눈치 없게 트롤링을 일삼았던 베조브라조프조차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듯한 싸늘한 시선에 구석에서 찌그러져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마당에 비테라고 뭘 어쩌겠나?
러시아 제국은 지금 이곳 알헤시라스에서 공공의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딴 말도 안 되는 촌극으로 전쟁이 일어나선 안 돼.’
러일전쟁의 전훈으로 참호전이 널리 전파된 상황이다.
지금 세계대전이 터지는 건 그냥 참호의 수렁 속에서 다 같이 죽자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단 말이다.
“비테 장관님, 일단 흑해함대를 회항시키시죠.”
“당연히 그래야지. 뭐, 그쪽에서도 달리 선택지가 없을 테지만.”
어떻게든 상황을 좋게 좋게 마무리하기 위해 내가 나서자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사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말대로 러시아 제국은 흑해함대를 세바스토폴로 돌려보내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흑해함대가 입은 피해도 피해였지만,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포템킨이 유유히 도망쳐 지중해를 떠돌아다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러시아 제국은 다른 것을 모두 제쳐 두고라도 우선 포템킨부터 잡아야 했다.
이미 자신들의 어이없는 실수로 드볘나드차티 아포스톨로프란 귀중한 전함 한 척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1+1 바겐세일도 아니고, 포템킨까지 잃을 순 없는 노릇일 테니까.
“그리고 밸푸어 총리님, 러시아 함대가 떠나면 우리도 함대를 물리죠. 과정이 어떻든 목적은 달성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 제국을 이 이상 윽박질러 봤자 역효과만 날 것입니다.”
“쯧, 자네 말이 옳네.”
“델카세 장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이번 일을 키워 봤자 프랑스에 이득될 것이 없잖습니까? 애초에 프랑스의 목적은 영국과 독일이 모로코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던 만큼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시죠.”
“……마음에 들진 않지만 할 수 없지. 영국과 독일이 모로코를 떠나면 우리 프랑스도 물러나겠네.”
내 말에 델카세 외무장관이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쪽이나 저쪽이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이상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 간의 협정 문제는…….”
“그 건은 내가 황제 폐하께 다시 한번 말씀드려 보겠네.”
비테는 그리 대답했지만, 러시아가 저지른 짓이 짓인 만큼 원래보단 불리한 조건으로 협정을 맺어야 할 거다.
적어도 덤이었던 몽골이 빠지는 것은 이미 확정이었다.
“이번에는 부디 결정이 길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시오. 적어도 올해 안엔 답을 줄 테니. 설마하니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직도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소.”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말에 비테가 그리 대답하며 구석에 있던 베조브라조프를 쏘아봤다.
애초에 베조브라조프가 자기 잇속을 채우기 위해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흑해함대가 출격하긴커녕 벌써 러일전쟁이 끝나고도 남았을 테니까.
“끄응…….”
베조브라조프도 그것을 알았기에 도저히 할 말이 없는지 비테의 냉기가 풀풀 흘러넘치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곤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알헤시라스 회담은 끝났다.
험난했던 회담 과정에 비하면 기운이 빠질 정도로 어이없는 마지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까 말했다시피 이것이 최선이었다.
비록 4개국 함대 간의 교전이 벌어졌다곤 했지만 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여기서 이 이상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국이 처한 상황도 상황이었다.
일단 이미 일본과 전쟁 중이었던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또한 하필이면 동맹이었던 러시아가 사고를 친 것도 모자라 먼저 공격을 가한 장본인이었기에 강하게 나올 수가 없었다.
영국은 영국대로 이미 이번 일로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와 단단히 척진 상황에서 이 이상 그들을 자극하기 싫을 것이고, 우리 독일이야 원래 영국을 따라온 것이고 피해도 가장 적어서 딱히 일을 키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리 독일도, 영국도, 프랑스도, 그리고 러시아도 포템킨 반란이라는 어이없는 사태 때문에 10년 빨리 세계대전을 일으킬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냥 모로코 해전이란 역사에 길이 남을 바보짓을 그냥 우발적인 사고로 덮기로 결정을 내렸다.
“남작, 조만간 영국과 독일, 양국의 미래를 위해 긴밀한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회담장을 나서던 중, 아서 밸푸어가 나에게 그리 속닥였다.
아무래도 밸푸어와 영국인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누구와 손을 잡을지 완전히 결정지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어찌 되려나.’
이번 일이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것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영웅적인 희생 때문에 피해가 더 커지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자신은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차르는 돌아가는 상황이 어찌 되었든 포템킨 반란을 사전에 막지 못한 것은 물론, 전투를 멈추기 위해 백기를 들어 올리며 적에게 항복까지 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엔 이번 일로 러시아 제국의 체면이 너무 심하게 깎였다.
아마 제독이 러시아 제국으로 돌아가면 최악의 경우 불명예스럽게 군복을 벗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전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군에서 물러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상황을 참작해 달라고 니콜라이 2세에게 탄원서라도 보내야겠어.’
나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복잡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봤다.
결과적으론 우리 독일이 원하는 것을 전부 얻긴 했다만 여러모로 찝찝한 결말이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자업자득인 러시아 제국의 수난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 * *
알헤시라스 회담이 흐지부지 끝나고, 시간이 흘러 또 한 번의 겨울이 찾아왔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인민들은 아직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모로코 위기 이후, 살아남은 흑해함대 함선들은 세바스토폴로 돌아가기 전, 지중해를 방황하고 있던 포템킨을 미친 듯이 추격했고 크레타 근처 해역에서 포템킨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제압 과정은 의외로 순탄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어떤 나라도 반란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모로코 해전이라는 대사고를 터트린 원흉인 포템킨을 받아 주지 않았고, 이로 인해 식량과 물 부족에 시달리던 수병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반란에 적극적인 이들도 있었지만, 포템킨 수병 상당수는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려 반란에 동참한 것뿐이었기에 어찌 보면 예정된 결말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포템킨을 장악한 수병들은 포로로 잡혀 있던 군의관과 군종 신부들을 풀어 주며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바출린추크와 마튜센코 등 반란을 주도한 수병들은 도망치거나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렇게 포템킨 반란은 끝났지만, 니콜라이 2세는 다시 한번 차르를 설득해 보겠다는 비테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종전을 망설이고 있었다.
“비테 그대는 재무장관에서 해임이오.”
“폐하……!”
“그리고 베조브라조프, 자넨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겨울궁전에 다시 발 들일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오히려 모로코에서의 추태에 분노한 니콜라이 2세는 비테를 재무장관직에서 해임하고 베조브라조프를 궁에서 내쳐 버렸다.
그래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겐 자비를 베풀어 그가 명예롭게 사임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후 니콜라이 2세는 흑해함대의 원정이 망한 것은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 주장하며 모로코에서의 대망신을 만회하기 위해 이번엔 발트함대를 극동으로 보내려고 했다.
물론 재무장관 자리를 잃긴 했어도 국무의원직은 유지하고 있던 비테를 비롯한 러시아 관료들과 군부, 그리고 러시아 귀족들은 이번만큼은 임시동맹을 맺고 한마음 한뜻으로 차르의 무모한 계획을 결사반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러시아 해군 내에서 극동 원정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가진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던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이미 모로코 해전의 책임을 지고 군에서 물러난 데다가 포템킨 반란과 모로코 해전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러시아 해군의 분위기가 매우 흉흉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알헤시라스 때처럼 이번에도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갔고, 전쟁으로 인한 물가의 상승과 과도한 식량 수출 정책으로 인한 식량난, 그리고 전비를 충당하기 위한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러시아 노동자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그들도 귀가 있고 눈이 있었기에 돌아가는 상황은 대충 알았다.
당장이라도 전쟁을 끝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르가 고집을 피우고 있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기 지원금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이 활동하는 데 보태 주십시오.”
“조국을 배신하고 싶진 않지만, 혁명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고맙게 받겠소.”
거기에 어떻게든 러시아 제국이 빨리 전쟁을 끝내게 만들기 위해 아카시 모토지로와 시드니 라일리를 비롯한 일본과 영국 스파이들이 러시아 제국의 혁명가들에게 돈을 뿌리며 화톳불에 장작을 집어넣으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는 위험수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모두 진정해 주십시오.”
그때 러시아 노동자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Гео́ргий Аполло́нович Гапо́н) 신부가 불만으로 가득 찬 굶주린 노동자들 앞으로 나섰다.
“황제 폐하께 가서 직접 청을 드립시다. 전쟁을 멈추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달라고. 굶주린 당신의 신민들에게 빵을 달라고 말입니다.”
“오오……!”
“황제 폐하께선 선하고 자비로운 분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겨울궁전으로 가서 우리의 진심을 전한다면 폐하께서도 분명 이를 받아들여 주실 겁니다.”
가폰 신부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리 말하자 노동자들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러시아의 황제이시자 러시아 인민들의 어버이이신 차르께 가자.
우리가 직접 평화를 달라 말한다면 그분께서도 들어주실 것이다.
아직 차르에 대한 충심과 믿음으로 가득했던 러시아 노동자들은 순진하게 그리 믿으며 가폰 신부를 따라 겨울궁전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모습을 본 가폰 신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가 이미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황이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필연적으로 대규모 파업이나 폭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당국의 해결 방법이 어떤 것인지 가폰 신부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이 겪어 봤다.
‘또다시 피바람이 불겠지.’
군대와 카자크 기병대를 동원한 무력 행사.
그것이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시위를 해결하는 러시아 제국의 방식이었다.
노동자들을 진심으로 걱정했던 가폰 신부는 그것을 막고 싶었다.
이러한 결정엔 가폰 신부가 과격한 혁명에 반대하며 피를 덜 흘리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단 점도 한몫했다.
분노한 민심을 가라앉히는 선동자로서 그를 눈여겨본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인 공안질서수호국, 일명 오흐라나(Охрана)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은 점은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1904년 12월 13일 화요일.
러시아 정교회에서 사용되는 율리우스력으론 11월 30일에 초대 콘스탄티노플 주교이자 러시아의 수호성인인 성 안드레아의 축일을 맞이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가폰 신부를 따라 성당이 아닌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이 있는 겨울궁전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