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93화 (93/193)

93화 : 포템킨 반란 (1)

1904년 10월.

알헤시라스에서 열린 4개국 회담이 끝날 기미도 없이 계속 길어지기만 하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러시아 흑해함대 수병들의 인내심은 점점 한계에 달하기 시작했다.

범선시대가 진작에 끝나고 증기와 강철로 이루어진 철갑함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함상 생활은 여전히 고됐고 선원들은 가혹한 대우 속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물론, 이는 러시아 해군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해군 또한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이 시대에 그나마 수병들의 처우를 신경 쓰고 개선하려고 노력한 것은 나름대로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중시했던 미국뿐이었으니까.

다만, 영국은 수병들의 처우가 열악하긴 했어도 수병들의 훈련도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노련하고 경험 많은 장교가 존재했고, 공화국이었던 프랑스 또한 미국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병들의 처우에 신경 쓰긴 했다.

그리고 독일 해군 같은 경우엔 특유의 엄격한 군기와 더불어 샤른호르스트의 군제개혁 이후 군 부조리가 타국과 비교해 확연히 적었던 탓에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해군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봐도 열악해도 너무 심각하게 열악했다.

그 영국조차 진작에 염장 고기를 퇴출하고 통조림을 도입한 지 오래였음에도 러시아 수병들은 여전히 구더기가 들끓는 염장 고기를 먹고, 장교들의 폭언과 폭력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나마 지노비 로제스트벤스 제독은 지휘력도 뛰어났고, 러시아 해군 내에서도 수병들의 처우를 신경 쓰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기에 지금까지는 별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교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대치 상황 속에서 의미 없이 시간만 계속 흐르자 가뜩이나 기강이 엉망이었던 흑해함대의 수병들은 정신적으로 지쳐 가기 시작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또한 이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이 함선 하나하나를 일일이 관리하기는 어려웠기에 함장들에게 수병들을 잘 다독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흑해함대 소속 전함 크냐지 포템킨 타브리체스키, 통칭 포템킨의 함장 예브게니 골리코프 대령은 그리 유능한 장교가 아니었고, 부함장 이폴리트 길리아롭스키 중령은 무능한 것을 넘어 가혹하고 포악한 인간이었다.

“……지금 이걸 우리한테 먹으라고?”

포템킨의 수병 그리고리 바출린추크는 아침 식사로 배급받은 보르시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썩은 고기에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곰팡내 나고, 구더기가 들끓는 염장 고기를 구역질을 참아 가며 먹는 것은 익숙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고기는 그것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고기는 먹는 즉시 탈이 날 것이 분명해 보일 정도로 검게 썩은 것은 물론, 끔찍한 냄새까지 풍겼다.

원인은 더운 지중해의 날씨 때문이었다.

모로코의 태양은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뜨거웠고, 이는 오크통에 보관하고 있던 고기들을 순식간에 썩게 했다.

물론 제대로 된 함장이라면 당장 썩은 고기를 버리고 새로 보급을 받든 하겠지만, 골리코프 함장은 끓이면 괜찮다는 무능한 군의관의 보고만 믿고 이를 그냥 방치했다.

그리고 함장 휘하 장교들도 함장의 생각을 고치는 대신 이를 수병들에게 먹여 빨리 처리하려고 했다.

그렇게 탄생한 끔찍한 무언가가 바로 러시아 수병들이 배식받은 보르시였다.

아니, 이미 이건 보르시라 부르면 안 되는 무언가였다.

본래 보르시란 붉은 색이나 분홍색을 띠어야 하지만, 지금 그릇에 담겨 있는 수프는 석탄을 우린 것처럼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으니까.

오죽했으면 배식을 맡은 수병마저 국자로 국물을 퍼 올릴 때마다 얼굴을 일그러트릴 정도였다.

“씨발, 이딴 걸 먹느니 차라니 굶고 말지.”

바출린추크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보르시라 불릴 자격도 없는 역병과도 같은 수프를 그대로 바다에 버렸다.

다른 수병들의 행동도 바출린추크와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어떤 망설임도 없이 보르시를 버리고 흑빵과 물로만 허기를 채웠다.

“지금 뭣들 하는 짓이야!”

문제는 그것을 성질 더럽기로 수병들에게 원성이 자자한 부함장 길리아놉스키가 발견했다는 것이다.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은 가장 먼저 보르시를 버린 바출린추크를 향해 다가갔다.

“감히 배식을 함부로 버리다니 군기가 아주 개판이구만!”

“부, 부함장님. 하지만 저건 도저히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닙니다. 고기는 썩었고, 국물은 시궁창의 오물보다 더 검었다고요!”

“어차피 사람 배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잔말 말고 다시 퍼서 먹어!”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바출린추크와 포템킨 수병들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 자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수병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싫습니다.”

“뭐?”

“싫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힘든 선상생활과 끝날 기약이 보이질 않는 대치 속에서 정신적으로 한계에 달했던 바출린추크가 폭발했다.

인내심의 끈이 끊어진 바출린추크는 평소라면 얼굴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바출린추크의 반항에 수병들은 인간이 아닌 개처럼 굴러야 배가 제대로 돌아간다 생각하는 길리아놉스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내 말에 항명하겠다는 건가! 당장 가서 보르시를 퍼서 입에 집어넣어!”

“그렇게 우리에게 저 구정물을 먹이고 싶으면 부함장님부터 먹어 보세요. 그러면 우리도 먹겠습니다.”

“맞아. 당신부터 먹어!”

“설마 네놈도 먹지도 못하는 걸 우리에게 먹일 생각이냐!”

평소에도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수병들이 바출린추크의 분노에 동조하며 사방에서 소리쳤다.

그러나 길리아놉스키는 수병들의 요구대로 보르시를 먹지 않았다.

“이 새끼가!”

퍼억!

그는 대신 익숙한 방법을 택했다.

폭력이었다.

퍽! 퍽!

“감히 부함장인 나에게 대들다니, 오늘 네놈에게 장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 주마!”

“커흑!”

주먹으로 바출린추크의 얼굴을 후려친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은 갑판 위에 넘어진 바출린추크를 인정사정없이 발로 걷어찼다.

바출린추크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그만하십시오. 부함장님!”

“이러다 죽겠습니다!”

보다 못한 몇몇 장교들이 이 일이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귀에 들어가면 경을 칠까 봐 부함장을 말렸지만, 길리아놉스키는 바출린추크를 무참하게 구타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수병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가서 다시 배식을 받아! 보르시를 먹지 않은 자들은 항명으로 간주해서 모두 총살형에 처하겠다!”

“!!!”

총살형이란 말에 수병들이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물론 함장도 아닌 부함장에게 부하들을 총살할 권한 따윈 없었고,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엄격하긴 했어도 단 한 번도 부하들을 처형시킨 적이 없었지만, 글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인 러시아 수병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Сука Блять!”

“보자 보자 하니까 우리가 보자기로 보이나!”

“우리도 사람이야. 이 개자식들아!”

갑판 위에 퍼진 싸늘한 공기는 곧 분노의 불길로 바뀌었다.

수병들은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을 비롯한 장교들을 둘러싼 채 욕설과 고함을 내뱉었다.

“뭐, 뭐야! 당장 안 물러나!”

총살에 처한다고 협박하면 물러날 줄 알았던 수병들이 오히려 들고일어나자 당황한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수병들에게 겨누었다.

물론 악효과였다.

“쏴 봐! 씨발. 쏴 보라고!”

“이…이……!”

타앙───!

총구를 들이대도 전혀 소용이 없자 결국 이마에 핏줄이 돋은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이 방아쇠를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권총이 불꽃과 납탄을 내뿜기도 전에 한 발의 총성과 함께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이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졌다.

수병들이 고개를 돌리자 어뢰수병장 아파나시 마튜센코가 포템킨의 병기고에서 꺼내 왔는지 소총을 들고 부함장이 서 있던 자리를 겨누고 있었다.

“부함장님!”

“이런……!”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하자 옆에 있던 장교들이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마튜센코가 더 빨랐다.

탕! 탕!

다시 한번 총성이 들리고 장교들이 길리아놉스키 부함장의 옆에 쓰러졌다.

장교들이 죽은 것을 확인한 마튜센코는 멍하니 이를 지켜보고만 있던 수병들을 향해 외쳤다.

“형제들이여. 나와 함께하자! 우리가 잃을 것은 쇠사슬이고, 얻을 것은 모든 것이다!”

“와아아아!!”

이 시기, 러시아에 독처럼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마튜센코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수병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함성을 지르며 병기고로 달려가 무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된 바출린추크 또한 동료들에게 부축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죽은 길리아놉스키의 권총을 집어 들었다.

곧 포템킨에 탑승하고 있던 약 700명에 달하는 수병 전원이 자의든 분위기에 휩쓸렸든 반란에 동참해 무기를 들고 일어났고, 골리코프 함장을 비롯한 포템킨의 장교들에겐 지옥의 문이 열렸다.

포템킨 반란의 시작이었다.

“명, 명령이다. 당장 멈……!”

타앙!

갑판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함장실에서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던 예브게니 골리코프 함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총에 맞고 책상에 엎어졌다.

다른 장교들의 운명 또한 그와 별다른 바가 없었다.

분노한 수병들이 그간의 설움과 분노를 쏟아 내듯 장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기 시작했고, 장교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한 채 싸늘한 시체로 변해 갔다.

“멈추게. 동무들. 난 자네들에게 합류하겠네.”

다만, 모든 장교가 수병들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니었다.

평민 출신이라 수병들과 사이가 좋았던 데다가 이 시대에 대학 먹물 먹은 자들이 으레 그렇듯 사회주의 성향이 있었던 기관장교 안톤 코발렌코 대위를 비롯한 몇몇 장교들은 자의로든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서이든 수병들의 반란에 협력했다.

이 밖에도 소수의 군의관이나 군종 사제들 또한 구타를 당하긴 했지만, 이들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저쪽으로 도망친다!”

“잡아!”

그리고 아예 바다로 뛰어들어 포템킨에서 탈출을 시도한 장교들도 있었다.

기관장 나자로프 중령과 보급관 마카로프 대위, 그리고 수병들에게 협력하는 척하다가 도망친 칼룬니 사관후보생이 그들이었다.

수병들은 세 사람이 바다에 뛰어들자 당황하며 총을 쏘았지만, 세 사람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죽을힘을 다해 헤엄치고 또 헤엄쳤다.

다른 장교들은 근처에 있는 배들로 향했지만, 칼룬니 사관후보생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먼저 반란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포템킨과 거리가 있던 흑해함대의 기함인 로스티슬라브(Ростислав) 쪽으로 향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소란스러운 갑판에 급히 함장실에서 뛰쳐나온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로스티슬라브의 승조원들에게 구조되어 배 위로 올라온 칼룬니를 향해 소리쳤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벌벌 떨고 있던 칼룬니 사관후보생은 살았다는 안도감에 울먹거리며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외쳤다.

“반란, 반란입니다!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뭐라고?!”

반란.

그 묵직한 두 글자에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평소 버릇대로 손에 든 쌍안경을 갑판에 내동댕이쳤다.

“골리코프 놈은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그, 그게 포템킨 수병 전원이 반란에 동참했습니다. 함, 함장님을 비롯한 다른 장교들은 이미 살해당했고요. 저도 협력하는 척하며 겨우 빠져나온 겁니다.”

“Блять!”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칼룬니의 보고에 욕을 내뱉었다.

이건 보통 사태가 아니었다.

러시아 해군 내에서의 수병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는 로제스트벤스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잘못하면 포템킨에서 일어난 수병들의 반란이 흑해함대 전체에 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기함인 로스티슬라브의 수병들은 로제스트벤스키 자신이 있었기에 그저 불안한 얼굴로 술렁거리는 것에 그쳤지만, 다른 함선들이 문제였다.

“제독님! 포템킨이 전열을 이탈하고 있습니다!”

“도망칠 생각인가!”

당연한 일이었다.

반란은 계획적인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학살에서 살아남은 몇몇 장교들이 다른 배에 도착하자 당황한 포템킨 수병들은 일단 이곳에서 도망치자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으로선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당장 포템킨을 막아야만 했다.

“당장 항복하라고 신호를……. 아니, 우선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독일 함대에 우리의 상황을 알려라.”

“넷!”

필요한 조치였다.

타국에 러시아 해군의 추태를 밝히는 것이 그리 탐탁지는 않았지만, 포템킨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괜한 오해가 생길 수 있었다.

기기긱───

그러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명령에 따라 타국 함대에 발광신호를 닿기도 전 포템킨 근처에 있던 다른 함선들이 도망치는 포템킨을 향해 포신을 돌리기 시작했다.

칼룬니 사관후보생처럼 탈출한 장교들에 의해 포템킨의 반란 사실을 전해 들은 함장들이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포템킨을 공격하려고 든 것이다.

“저놈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멈추라고 해!”

물론, 이를 본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당황하며 소리쳤지만,

콰앙───!!

모로코 앞바다에 강렬한 포성이 울려 퍼지는 것이 더 빨랐다.

그리고 이 포성은 러시아 함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프랑스, 영국, 독일 함대에도 똑똑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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