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모로코 위기 (2)
분명 계절은 아직 태양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여름이었건만, 이곳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선 한겨울의 혹한보다도 더 싸늘한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원인은 모로코 위기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기 위해 회담에 참석한 4개국의 대표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반드시 자국의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있었다.
물론 상대방을 혀로 죽여버리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것은 어디까지나 러일전쟁으로 대립 중이었던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모로코를 영국이란 금태양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였다.
정작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우리 독일은 일단은 영국 편이긴 했지만, 러시아와도 몰래 협력했던 관계였던지라 이 불꽃 튀는 분위기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한, 이번 사태의 엮인 나라들이 대단한 만큼 회담에 참여한 인물들도 꽤 이름값 높은 사람들이었다.
우선 우리 독일 제국 측에선 빌헬름 2세의 대리인이자 외교 고문이라는 타이틀을 단 나를 비롯해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참여했다.
영국에선 아서 밸푸어 총리가 랜즈다운 후작과 함께 직접 알헤시라스에 나타났고, 러시아에선 세르게이 비테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이 아닌 왜 여기 있는지 모를 베조브라조프와 함께 회담장에 등장했다.
‘니콜라이 2세의 뜻이거나 협상파인 비테를 견제하기 위해서겠지.’
아마도 비테에게 회담을 맡겼다간 베조브라조프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비테는 비테대로 베조브라조프가 상황을 호전시키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선 것으로 보였다.
“하! 이런 자리에 어린아이를 내보내다니, 요즘 독일 제국에선 쓸 만한 외교관이 없나?”
프랑스에선 멀뚱히 서 있는 나를 향해 기가 찬다는 듯이 빈정거리는 테오필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 외무장관이 대표로 회담에 참여했다.
정부가 바뀌는 와중에도 7년 동안이나 외무장관 자리를 유지했던 능력 있는 인물로 미서전쟁을 중재하고, 파쇼다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프랑스 정부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다.
원래라면 영불협상에서도 큰 역할을 했을 정도로 친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만, 영국 대표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을 보니, 아무래도 델카세 외무장관은 이번 일로 영국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는 델카세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 비하면 이는 귀여운 편이었다.
그는 독일을 증오하는 강경한 반독주의자였기에 나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예 개자식들을 보는 눈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남작.”
“비테 장관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네 때문에 더 힘들어졌지. 보스포루스를 연다고 했을 때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할 걸 그랬어.”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실이었다.
영국이 지중해 함대로 흑해함대를 견제하는 것 정도를 바랐지, 얘들이 갑자기 모로코 위기를 터트려 버릴지 그 누가 예상했겠나?
물론, 이번 사태로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을 넘어 프랑스까지 영국과 척지게 되었기에 결과적으론 우리에게 이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손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비테 장관님께도 나쁘진 않은 상황이잖습니까. 여기서 이야기만 잘 풀리면 함대 출격 건을 백지로 돌리고, 다시 종전협정 쪽으로 흐름을 바꿀 수 있을 테니까요.”
“허. 이야기만 잘 풀리면 된다라. 저 암 덩어리를 데리고?”
비테가 입을 쉴새 없이 움직이며 델카세 외무장관을 귀찮게 하는 베조브라조프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해만 안 되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 정도입니까?”
“말도 말게나.”
비테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베조브라조프는 이 게임에 모인 플레이어 중 어떤 의미로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
적과 아군 모두에게란 의미로 말이다.
원래 게임에서도 잘하는 상대편보다 트롤짓하는 아군이 더 무서운 법이다.
“자, 신사분들. 슬슬 시작하도록 할까요?”
아서 밸푸어의 말에 나와 비테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여기저기서 불편한 시선들이 오가는 가운데 드디어 모로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알헤시라스 회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밸푸어 총리와 랜즈다운 후작을 향해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델카세 외무장관이었다.
“우리 프랑스의 요구는 단 하나요. 영국과 독일은 당장 모로코에서 함대를 물리시오.”
“러시아 제국이 먼저 흑해함대를 귀항시키고, 본래 협의한 조건대로 일본과의 평화협상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이상 그럴 순 없습니다.’
쾅!
밸푸어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델카세 외무장관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러일전쟁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우리가 알 바 아니오. 모로코는 어디까지나 우리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나라. 영국의 행동은 명백한 우리 프랑스에 대한 도발이오!”
“모로코가 프랑스의 식민지입니까? 아니면 보호국입니까?”
“뭐요?”
델카세 외무장관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델카세 외무장관을 향해 삐딱한 어투로 말했다.
“프랑스의 영향이 짙다곤 하나 모로코는 어디까지나 자주독립국입니다. 게다가 영국이 모로코를 집어삼키겠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 항구에 함대를 주둔시켰을 뿐인데, 솔직히 프랑스가 이리 열을 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허! 독일인들이 영국인들과 이리 친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려. 이러다가 둘이 결혼까지 하겠어요?”
“자자, 두 분 다 진정하세요.”
리히트호펜 외무장관과 델카세 외무장관이 서로 말싸움을 벌일 기색을 보이자 내가 끼어들어서 두 사람을 말렸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분위기가 안 좋은 의미로 달아오르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일단 러시아 측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까지나 러시아 제국에 있으니 말입니다.”
랜즈다운 후작이 내 말에 동의하며 반대편에 앉아 있는 비테와 베조브라조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에 비테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눈치 없는 베조브라조프가 먼저 끼어들었다.
“일단 영국 측에선 협의한 조건에 따라 일본과의 평화협상을 진행하라고 우리 러시아에 요구했는데, 애초에 전 이 조건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귀국 정부는 물론 러시아 황제께서도 이미 동의한 사항이잖소. 지금 그것을 번복하겠다는 거요?”
“그, 그거야 상황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밸푸어 총리의 목소리가 험악해지자 이에 살짝 겁을 먹었는지 베조브라조프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 모습을 본 비테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았다.
베조브라조프가 계속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아닌데, 한반도도 모자라 뤼순까지 포기하라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북만주 일대를 러시아가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는 묵인하는 것에 더해 몽골까지 얹어 주었잖소.”
“그거론 부족하다는 겁니다.”
“부족? 부족하다고요? 미치겠구만. 대체 여기서 우리에게 뭘 더 양보하란 겁니까!”
밸푸어 총리와 랜즈다운 후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베조브라조프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러시아 제국과 같은 편인 델카세 외무장관마저 베조브라조프의 억지에 ‘이 새끼가 지금 양심이 있나?’라는 표정이다.
“조차지와 극동 소국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보다 훨씬 큰 영토를 러시아 제국에 넘겨주는 것인데, 그 정도면 차고도 넘친다고 생각합니다만?”
나 또한 베조브라조프를 향해 짜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무슨 식민지를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크게 늘려 주겠다는 거다.
하지만 베조브라조프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반도는 일본에 점령당했으니 그렇다 쳐도, 뤼순은 절대 포기 못 합니다.”
“그럼 평화도 없소! 우리 영국이 러시아의 조건에 동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러시아가 뤼순과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란 말이오.”
“이는 우리 러시아 제국의 공식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어디까지 의견 중 하나에 불과하니, 계속 이야기를 나눠서 최선의 합의점을 찾읍시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베조브라조프가 계속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들자 비테가 땀을 뻘뻘 흘리며 끼어들어 말했다.
“이보세요. 비테 장관! 지금 무슨 말을…….”
“제발 그 입 다무시오. 좀!”
“그럴 순 없습니다!”
비테가 이를 악물며 작은 목소리로 닥치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조브라조프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채 입을 다물지 않았다.
유일한 동맹국이 만들어 내고 있는 이 한 편의 콩트에 델카세 외무장관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번 회담은 길어지겠군.”
* * *
예상대로 알카시라스 회담은 달력의 달이 바뀌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찾아왔음에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독일 본국에서 우리 빌헬름 황태자님이 독일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여공작과 약혼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는데, 나는 여전히 스페인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회담이 길어지는 원인은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는 베조브라조프의 거센 트롤링 때문이었다.
비테는 어떻게든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회담을 이끌어 나가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베조브라조프가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는 없는 조건을 내보이며 회담을 파투 냈다.
이쯤 되니 나조차도 과연 베조브라조프가 회담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회담을 방해하며 시간을 끌려는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영국이 모로코에서 함대를 물리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였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속이 타서 돌아 버리려 했다.
“이러다 올 한 해를 스페인에서 다 보내게 생겼네요.”
“비테 장관. 귀국 황제께 뭐라 말 좀 해 보시오. 제발 베조브라조프 저 머저리 좀 어떻게 하라고 말이오!”
“황제 폐하께서 내 말을 들었으면 애초에 모로코에서 이 사달이 나지도 않았소.”
10년은 늙은 것 같은 비테의 초췌한 얼굴에 나와 밸푸어 총리, 델카세 외무장관은 한탄을 내뱉었다.
결국, 우리 세 사람은 국적을 초월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베조브라조프를 회담에서 빼 달라고 니콜라이 2세에게 편지까지 보냈지만, 우리의 니키는 자신의 총신과 마찬가지로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영국이 고집을 부리는 탓.]
“으아아아아아아아───!!”
니콜라이 2세의 적반하장에 밸푸어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고함을 내질렀다.
영국을 러시아와 싸우게 한다는 본래 목적은 지나칠 정도로 성공한 것 같다.
‘그래도 슬슬 이 지루한 회담을 끝내야만 하는데.’
이대로 계속 함대를 모로코에 주둔시킬 순 없는 노릇이다.
모로코에 모인 4개국 함대는 회담이 길어지자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지쳐 가고 있었다.
코스터 제독은 승조원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다며 이 대치를 빨리 끝낼 게 아니면 차라리 프랑스-러시아 함대와 시원하게 한판 붙게 해 달라고 하소연했을 지경이다.
물론, 10년 일찍 세계대전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조금만 더 참으라고 어찌어찌 제독을 달래야만 했다.
‘그래도 베조브라조프도 지쳤는지 기운이 다 떨어져 가고 있으니. 조금만 압박하면 될 거야.’
“남작님. 큰일 났습니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왜 꼭 맞아떨어지는 법인지.
“무슨 일입니까?”
“탕헤르 앞바다에 정박 중인 4개국 함대에서 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습니다!”
“예?!”
나는 전령이 급히 가져온 보고서를 낚아챈 뒤 눈으로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 보고서에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한 전함의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눈을 찌푸렸다.
“포템킨…….”
크냐지 포템킨 타브리체스키(Князь Потёмкин Таврический).
원 역사에서 비인간적인 대우에 분노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흑해함대는 물론, 전 러시아를 뒤집어 놓았던 전함이 기어코 사고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