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모로코 위기 (1)
“얘들은 왜 자기들이 모로코 위기를 초래하고 지랄이지?”
제아무리 구주 천지 복잡기괴라지만, 이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그저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물론, 영국의 행동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강제로 점거한 거문도 점령 사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니까.
원 역사의 모로코 위기에서 빌헬름 2세가 모로코를 방문해 모로코의 자주독립을 지지한 것만으로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달려들던 프랑스가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영국이 이리 스스로 프랑스와 척지어 준다면 나로선 환영이다.
설마하니 홍차 맛이 진득하게 느껴지는 모로코 위기를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래서 영국 해군이 우리 독일 해군에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그것보단 훨씬 돌려 말하긴 했지만 그렇습니다. 폐하.”
“흐흥.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
자존심 강한 영국이 독일 제국에 도와달라고 머리를 숙였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지 빌헬름 2세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영국 해군을 경쟁자로 생각해 평소에도 영국과 협력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던 제국해군청 장관 티르피츠 제독 또한 이번만큼은 나름 만족한 얼굴이었다.
“영국인들도 알고 있는 것이겠죠. 우리 카이저마리네가 왕립 해군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요!”
“그런가? 아암, 그렇겠지. 하하하하!”
“폐하께서 즐거워하시니, 저 또한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면 영국 정부의 요청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뷜로 총리의 물음에 카이저의 시선이 티르피츠 제독을 향했다.
“티르피츠. 지금 우리 함대를 모로코로 보낼 수 있겠나?”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폐하. 마음 같아선 영국인들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싶지만, 프랑스 놈들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놓칠 수야 없죠.”
프랑스란 단어에 빌헬름 2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카이저와 티르피츠 제독뿐만이 아니라 모든 독일인에게 있어 프랑스를 물 먹일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면 영국 정부에 우리 또한 모로코에 함대를 파견하겠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러게나.”
뷜로 총리의 대답에 카이저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나와 뷜로는 빌헬름 2세에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러시아가 함대를 보내겠다고 소리칠 때는 눈앞이 깜깜했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상상도 못했구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전 그냥 영국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견제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밸푸어 총리가 러시아에 화가 잔뜩 난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영국과 한배를 탈 수밖에 없게 되겠군.”
뷜로 총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투덜거렸다.
체임벌린과 동맹을 논의했을 때 마음이 상했던 일로 아직도 영국에 꽤 반감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좋게좋게 생각하시죠. 이것으로 고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잖습니까. 솔직히 우리 독일이 손잡을 만한 상대도 영국 말곤 없고요.”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는 언제 혁명이 일어날지 모르는 폭탄이다.
가뜩이나 빌리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다 니키까지 챙기려면 내가 먼저 과로사로 쓰러져 죽고 말 것이다.
“흠. 그런데 이렇게 되면 모로코에 우리 독일과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함대가 집결하게 되는 건가?”
“아마도요?”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상황이 상황인 만큼 베네수엘라에서의 일이 반복되는 것은 곤란해.”
“대양함대 사령관인 코스터 제독께서 직접 함대를 지휘하시지 않습니까. 노련한 분이시니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보단 다른 나라의 함대가 더 걱정이다.
특히 러시아 함대는 원 역사에서 일본 어뢰정이 유럽까지 와서 기습공격을 하리라는 헛소문에 휘둘려 도거뱅크 해역에서 애꿎은 영국 어선에 포격을 가하는 대사고를 친 전적이 있었던 만큼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렇게 며칠 후.
킬 항구에서 한스 폰 코스터(Hans Ludwig Raimund von Koester) 제독이 지휘하는 독일 대양함대가 모로코를 향해 출항했다.
이는 영국 해군의 모로코 주둔으로 가뜩이나 난리가 난 프랑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 * *
쾅!
“영국에 이어 독일까지? 하! 외삼촌과 조카가 손을 잡고 우리 프랑스를 물 먹이려 작정했군!”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는 독일 대양함대가 모로코를 향해 출격했단 소식에 주먹으로 집무실의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처음 영국 지중해 함대가 모로코 탕헤르 항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항구에 그대로 눌러앉았을 때, 프랑스는 영국에 대한 분노로 폭발했다.
모로코는 프랑스에 있어 그냥 나라가 아니었다.
모로코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 식민지로 편입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프랑스의 정당한 예비 식민지였다.
물론, 모로코인들은 자신들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대놓고 내정 간섭을 하는 프랑스인들에게 엿이나 먹으라며 가운데 중지를 치켜올렸지만, 위대한 프랑스는 모래나 퍼먹는 미개한 사막 유목민들의 말 따윈 듣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일이 잘 풀려 가고 있을 때, 영국이 갑자기 바게트에 재를 뿌렸다.
러시아 흑해 함대를 막겠다고 다짜고짜 모로코에 엉덩이를 들이민 것이다.
프랑스는 곧바로 영국에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했지만, 영국인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무슨 생일 파티에 친구를 초대하는 것도 아니고 보란 듯이 독일 함대를 모로코로 불러들였다.
프랑스인들이 이에 분개한 것은 당연했다.
영국은 수백 년 동안 싸워 온 프랑스의 경쟁자였기에 여전히 국민감정이 안 좋았고, 프랑스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독일 제국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당연히 프랑스 여론은 불타올랐고, 프랑스 언론은 특유의 과장된 기사로 불길에 장작을 던졌다.
[영국의 모로코 점령! 프랑스의 정당한 강역을 강탈하려는 시도인가?!]
[대영제국과 독일 제국의 사악한 야합! 앵글로색슨 또한 결국은 게르만족!]
[지금이야말로 동맹 러시아를 돕기 위해 프랑스가 움직여야 할 때!]
매일같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기사로 인해 영국과 독일에 대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프랑스 시민들은 정부에 영국과 독일에 대한 응징을 요구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재점화로 시작된 보수 세력과의 정쟁을 거의 마무리 짓곤 이제야 막 한숨을 돌리려던 에밀 루베 대통령은 혈압이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목덜미를 잡았다.
“젠장, 이걸 함대를 안 보낼 수도 없고.”
에밀 루베 또한 독일까지 끌어들인 영국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현실은 화가 났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에 비해 전력이 부족했다.
지난 19세기, 프랑스 해군은 청년학파(Jeune École) 교리를 받아들여 대양해군을 포기하고 연안해군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전함 같은 대형전함을 도외시하고 어뢰정을 엄청나게 만들었다.
멍청한 짓이었다.
일단 연안해군 자체가 프랑스의 사정에 맞질 않았다.
어디 유럽의 작은 나라였다면 모를까 프랑스는 영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해외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식민제국이었고, 어뢰정만으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해역들을 전부 지킬 수가 없었다.
특히 영국이 어뢰정을 끊임없이 뽑아내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어뢰정 사냥에 특화된 구축함을 만들어 버리면서 어뢰정 중심의 청년학파 자체가 순식간에 몰락해 버렸다.
그 결과, 프랑스 해군은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영국을 따라잡긴커녕 후발주자인 독일 카이저마리네에 역전당해 버렸다.
오죽하면 청년학파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해군은 지금쯤 세계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리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나마 최근엔 프레데리크(프리드리히)급이란 신형전함으로 전 세계 해군력이 초기화된 덕에 프랑스 또한 서둘러 프레데리크급을 건조하기 시작하면서 일말의 희망이 생겼지만, 프레데리크급이 진수되고 취역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에밀 루베는 처음엔 함대의 파견을 망설였지만, 드레퓌스 사건 때처럼 여론이 너무 극성이었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면 그건 프랑스인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함대를 보내되 영독함대와의 마찰은 최대한 피하라고 해야겠군.”
함대를 모로코에 보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영국도 프랑스로부터 모로코를 강탈하려는 속셈은 아닐 것이다.
영국은 그저 러시아 함대가 극동에 가지 못하도록 막고 싶을 뿐이었다.
독일은 혼자 나서기 불안하니까 데려온 것일 테고.
영국인들이 하는 짓은 교활하지만, 그렇기에 언제나 뻔했다.
“쯧. 러시아는 그냥 협정 맺고 전쟁이나 끝낼 것이지, 왜 굳이 함대까지 보내겠다고 설쳐선.”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이었던 만큼 러일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알았다.
특히 참호전이란 새로운 전쟁은 신사적이진 않았지만, 숙적 독일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던 프랑스에 꽤 감명을 주었다.
심지어 일부 장성들은 이렇게 주장하기도 했다.
‘보불전쟁 때 참호전이 존재했다면 잊을 수 없는 베르사유의 치욕 또한 없었을 것이다!’
아예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덕분에 현재 프랑스 군부 내에선 참호전 만능론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엘랑 비탈 정신으로 빠르게 적의 영토로 들어가 참호전을 펼치며 알 박기를 하자는 새로운 전술이 활발하게 논의 중이었다.
물론,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화력 공세로 러시아 참호선이 일시적으로 뚫렸던 적이 있었던 만큼 공수 양면으로 활용하기 위해 포병 전력을 강화하자는 논의는 덤이었다.
다만, 독일이 만든 기관단총은 생각보다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총알 소모도 소모이거니와 사거리도 짧고, 무엇보다 기관단총의 내구성이 너무 약했기에 전쟁이 시작되고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스 군부는 기관단총 같은 불완전한 신병기보단 차라리 기관총을 많이 만들어 적이 아예 접근조차 못 하게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원래 군부란 곳은 듣도 보도 못한 신무기 도입에 보수적인 곳이었고, 프랑스 장성들은 그리 혁신적이지 않았다.
결국, 기관단총은 프랑스 군부 내에서 기관단총을 도입해야 한다는 일부 젊은 장교들의 주장과 함께 소리 없이 묻히고 말았다.
“어쨌든 러시아의 쓸데없는 짓거리 때문에 우리만 귀찮게 되었어.”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지만,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의 중재에 나섰고, 영국은 러시아가 북만주와 몽골이 가져가는 것을 묵인하는 대가로 러시아가 뤼순과 한반도에서 물러나길 바랐다.
에밀 루베가 봐도 그만하면 괜찮은 조건이었는데, 왜 저 지랄인지 모르겠다.
“차르의 머릿속에 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군.”
에밀 루베는 지중해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리면서 그리 중얼거렸다.
러시아 제국이 유일한 동맹국이었던 프랑스로서는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 * *
“무슨 시장이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군.”
흑해함대를 이끌고 탕헤르에 도착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서로 발톱을 세운 채 대치하고 있는 영국 함대와 프랑스 함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한숨은 뒤늦게 나타난 독일 함대가 영국 함대에 합류하자 더욱 커졌다.
‘영국 함대는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프랑스와 독일까지 끼어들 줄이야.’
그의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졌다.
물론, 여기서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애초에 탕헤르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질 때 불리해지는 것은 러시아와 프랑스 함대였다.
영국 로얄 네이비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롭게 바다의 패자로 떠오른 독일 카이저마리네 또한 새로 건조한 전함들까지 포함해 총 3척의 프리드리히급 전함을 모로코로 가져온 상태였으니까.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계산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이대로 싸우면 필패였다.
“제독님. 우린 이제 뭘 하죠?”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함장. 가서 보드카나 가져와라.”
진짜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상황에서 대체 뭘 하란 말인가. 지나가던 어선에 함포라도 쏠까?
결국,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 함대는 탕헤르 앞바다에 정박한 채 지중해의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이 대치가 끝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차르께서 마음을 돌리고 회군을 명령할지도 몰랐으니까.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차라리 이대로 원정이 끝나기를 바랬다.
탕헤르 앞바다에 모여 있는 3개국 함대의 모습에 전투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긴장하던 러시아 수병들의 생각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모두 조용. 우리는 이곳에 정박한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휴. 세바스토폴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전투가 일어나는 줄 알았네.”
“일단은 저쪽도 싸울 생각은 없나 봐. 이대로 그냥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들은 당장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심 이대로 원정이 끝나 세바스토폴로 돌아가기를 바랬다.
“러시아 함대는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군.”
“그럼, 우리도 거칠게 나설 필요는 없죠. 우선 정부에 보고하고 대답을 기다려 봅시다.”
독영 연합함대와 프랑스 함대의 행동 또한 러시아 함대의 행동과 별다를 게 없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처럼 굳이 피를 보고 싶지 않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결국, 영국, 독일, 프랑스 함대 또한 탕헤르 주변에 닻을 내린 채 본국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렇게 모로코 앞바다에서 기묘한 대치가 시작된 가운데 원 역사에서 모로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회담이 열렸던 스페인 알헤시라스에서 4개국의 외교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