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열어라 해협 (3)
1904년 8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
“뭐야, 저건?”
볼일이 있어 오랜만에 콘스탄티니예를 찾아온 오스만 제국의 젊고 유망한 장교, 이스마일 엔베르(İsmail Enver) 대위는 콘스탄티니예 앞바다를 유유히 지나가는 대규모 함대를 발견하자 미간을 좁혔다.
오스만 제국의 함대는 아니었다.
저 군함들의 마스트에는 이곳 콘스탄티니예에서 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백청적 삼색기가 바닷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으니까.
“러시아 흑해함대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이스마일 엔베르는 흑해함대의 모습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콘스탄티니예 시민들 사이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 또한 대부분의 튀르키예인처럼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기나긴 악연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러시아 함대가 오스만의 수도, 콘스탄티니예 앞바다를 지나가는 것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저 배들이 향하는 곳은 분명 지중해 방향.
그렇다는 건 설마 정부에서 러시아 함대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어 주었다는 소리일까?
‘왜?’
이스마일 엔베르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 러시아 제국은 영국을 뒷배로 둔 일본과 전쟁 중이었던 만큼 러시아 함대가 보스포루스를 통과해 흑해를 빠져나가는 것을 세상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는 콧대 높은 영국인들이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을 좋아하지 않는 독일인들 또한 이를 반길 리가 없다.
오스만 정부가 무능한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제국의 가장 큰 위협인 러시아를 위해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그 두 나라와 척진다는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이 지금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이 거짓말 같은 일에 이스마일 엔베르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이스마일?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음? 아, 자네인가.”
이스마일 엔베르가 이 영문 모를 사태의 진상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지나가던 길이었는지 동료 장교가 그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러시아 함대가 보스포루스를 지나고 있어서 말이야. 자네 큰아버지는 군부의 고위직에 계시지 않는가. 혹시 뭐 들은 거 있나?”
이스마일 엔베르의 물음에 장교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엔베르는 자신 같은 젊은 장교들의 리더 같은 존재였기에 그와 척지기 싫었던 장교는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엔베르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큰아버지 말로는 독일 제국이 뒤에 있는 것 같다더군.”
“뭐? 독일 제국이?”
“쉿! 큰 목소리로 말하지 말게. 잘못해서 소문이라도 났다간 자네는 물론이고 나도 끝장이니까.”
“알겠으니 빨리 말해 보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엔베르의 재촉에 장교는 한숨 쉬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내가 아는 건 술탄이 러시아 흑해함대가 지중해로 나갈 수 있도록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어 주라고 명령했다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리기 전에 독일 외교관들이 술탄을 만났었고.”
“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독일과 러시아가 손을 잡기라도 한 건가?”
“나도 모르지. 그런데 큰아버지께 듣기론 술탄도 명령을 내리면서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대.”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니지. 압뒬하미트, 이 무능한 자식 같으니. 누가 보면 우리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의 속국이 된 줄 알겠어.”
“이스마일!”
이스마일 엔베르가 대놓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자 파디샤, 압뒬하미트 2세의 이름을 거론한 것도 모자라 그를 무능하다고 빈정거리자 얼굴이 창백해진 장교가 기겁했다.
그 또한 폭군이자 압제자인 압뒬하미트 2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학살자 술탄의 귀에 들어갔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가?”
하지만 이스마일 엔베르는 여전히 압뒬하미트 2세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스마일 엔베르는 압뒬하미트 2세의 폭정과 보수 정책에 반대하는 청년 장교들의 비밀결사인 조국과 자유(Vatan ve Hürriyet)의 일원이었으니까.
그는 말을 빠르게 내뱉으며 동료에게 술탄에 대한 분노를 쏟아 냈다.
“그 망할 자식은 자신이 바라는 건 뭐든 할 수 있었어. 조국을 영광스럽게 만들 수도 할 수도, 주변의 적들을 흩어 버릴 수도 있었지. 조국과 나를 포함한 오스만 제국의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었단 말이야.”
압뒬하미트 2세는 한때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재건할 위대한 군주였다.
그는 관용적이었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개혁적이었기에 오스만 민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의 독립 요구와 러시아의 전쟁에서의 패배, 그리고 끝내 크레타마저 열강의 개입으로 저 저주받을 그리스인들에게 빼앗겨 버리자 압뒬하미트 2세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명군에서 학살자이자 폭군으로.
위대했던 술탄에서 반대파들의 피에 굶주린 붉은 술탄으로.
“하지만 압뒬하미트는 지난 몇 년간 피를 처먹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 그리고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순간 녀석이 대단하게 보이더군. 그래서 나는 그놈이 사라져 버리는 것만이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네.”
“지금 술탄을 몰아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일개 대위인 자네가?”
“물론 아직은 무리지. 하지만 언젠가 상황이 바뀔 거야.”
그리고 그날이 오면 오늘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에서 독일인들이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도가 지나쳤다.
이스마일 엔베르는 독일식 군사 교육을 받아 대다수의 오스만 군인들처럼 친독 성향이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을 신하 대하듯이 다루는 독일 제국의 태도만큼은 도저히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압뒬하미트도, 독일 제국도, 오스만 제국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발칸의 슬라브인들과 건방진 아르메니아인들, 그리고 돼지만도 못한 그리스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오스만 제국은 튀르키예인들의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바꿀 것이다.
이미 이스마일 엔베르 자신처럼 젊은 장교들 중심으로 압뒬하미트 2세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며 붉은 술탄을 몰아내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붉은 술탄의 시대는 얼마 가지 않아 끝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이스마일 엔베르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 * *
“이 케밥 새끼들이 미쳤나!”
젊은 이스마일 엔베르가 그리 야심에 불타오르고 있던 사이.
콘스탄티니예의 주오스만 영국 대사관으로부터 흑해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 지중해를 빠져나갔다는 보고를 받은 영국 정부는 완전히 뒤집혔다.
“대체 왜 오스만 제국이 보스포루스를 연 거야. 대체 왜!”
밸푸어는 핏발 선 눈으로 거품을 물고 보고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랜즈다운 후작은 허공에 휘날리는 종이에 한숨 쉬며 대답했다.
“오스만 제국의 말로는 러시아 제국이 보스포루스를 열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더군요.”
“하! 협박?”
“실제로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접경지대에서 러시아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들 말로는 군사훈련이라 하던데 거짓말이겠죠.”
실제론 독일 제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한 편의 연극에 불과했지만, 영국 정부는 몰랐다.
참고로 각본가는 우리의 한스 폰 초이 남작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번 일은 절대 용납 못 해! 절대로!”
“이미 독일 정부에서 나섰습니다. 그들의 말론 오스만 제국은 자신들에게 맡기고, 우리 영국은 지중해로 나온 러시아 흑해함대부터 신경 쓰라더군요. 상황이 급박하니 말입니다.”
말 그대로였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발트함대가 출격하리라 예상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이번에도 모두의 뒤통수를 치고 흑해함대를 출격시킨 것도 모자라 기어코 보스포루스까지 통과해 버렸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터지는 러시아 제국의 돌출 행동에 밸푸어와 영국 정부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 모든 사태를 주도했다(?) 알려진 베조브라조프에 대한 평가와 위험도를 상향하며 근심에 찬 눈으로 유럽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면 독일 해군이 아니라 영국 해군이 러시아 함대를 막아야 한다.
그것이 발트함대를 막는 대신 독일이 내놓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게 맞긴 했다. 독일 해군은 발트해와 북해라면 모를까 지중해에서 활동하기엔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으니까.
“망할 러시아 놈들.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나오는군. 이딴 식으로 우리 영국을 농락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러시아 제국의 계속되는 더러운 수작에 독기가 가득 찬 밸푸어가 으르렁거리며 해군장관인 셀본 백작, 윌리엄 팔머(William Waldegrave Palmer, 2nd Earl of Selborne)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셀본 백작. 당장 수에즈 운하에 연락해서 흑해함대의 통행을 거부하라 전하시오. 이미 흑해함대가 보스포루스를 통과한 이상 함대를 보내 쫓는 것보다 아예 길목을 틀어막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테니.”
“러시아 함대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수에즈를 막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것이 그리 효과가 있을까요? 애초에 작은 함선들이라면 모를까 러시아 함대의 주력함들은 크기가 커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셀본 백작의 말에 밸푸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것을 생각 못 했다.
그러면 러시아 함대가 향할 곳은 단 한 곳.
지브롤터 해협이었다.
“지중해 함대로 지브롤터 해협을 봉쇄할 수 있겠소?”
“흐으음……. 가능은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셀본 백작은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지브롤터 해협 부근을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지브롤터 해협 대부분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곳엔 우리 영국령 지브롤터가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러시아 함대가 지브롤터 남쪽 모로코 영해를 거쳐 지나가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프랑스 때문이군.”
모로코는 프랑스가 알제리나 튀니지처럼 자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눈독을 들이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모로코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나라였고,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이었다.
따라서 프랑스가 러시아를 돕기 위해 흑해함대가 모로코 영해를 지나가도록 묵인할 확률은 무척이나 높았다.
이미 프랑스는 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의 유일한 동맹인 러시아를 알게 모르게 뒤에서 지원해 주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원 역사에서도 러시아 발트함대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프랑스령 다카르와 마다가스카르를 비롯한 프랑스 식민지에서 보급과 휴식을 취하며 무사히 극동까지 갈 수 있었다.
물론 겨우겨우 극동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와 쓰시마 해전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모로코에 지중해 함대를 주둔시키도록 하지.”
“총리님?!”
랜즈다운 후작이 진심이냐는 듯 밸푸어를 바라봤다.
모로코를 건드렸다간 저 자존심 하나는 누구보다 드높은 프랑스 개구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밸푸어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러시아 함대가 지중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지금 모로코가 프랑스의 식민지인가?”
“그건 아직 아닙니다만…….”
“그러면 솔직히 프랑스가 모로코에 잠시 해군 좀 주둔시켰다고 우리 영국한테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없지. 어쨌든 아직 모로코는 독립국 아닌가.”
그건 그랬지만 제국주의 열강들이 언제 그런 것을 따졌던가?
특히 프랑스는 이성보다는 가슴으로 움직이는 나라다.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이를 우려한 랜즈다운 후작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프랑스가 우리의 의도를 오해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동맹인 러시아 함대를 돕겠다고 아예 함대를 파견할 수도 있고요.”
“그러면 우리도 친구를 불러야지. 독일 해군에 협조 요청하게. 독일 함대와 힘을 합치면 프랑스가 함대를 보내 러시아 함대를 도우려 한다고 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야.”
확실히 독일이라면 프랑스를 엿 먹일 수 있단 생각에 춤을 추며 모로코로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장관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아서 밸푸어의 의지는 확고했고, 영국 정부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홍차 맛이 나는 모로코 위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