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열어라 해협 (2)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겠다고?”
오스텐자켄 주독 대사로부터 독일 측의 제안을 받은 세르게이 비테는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이 영악한 꼬맹이 같으니.”
사실 러시아 제국도 발트함대보단 흑해함대를 보내는 편이 더 이득이긴 했다.
일단 거리로만 따져 봐도 크론슈타트에서 유럽 대륙을 빙 돌아 출발해야 하는 발트함대보다 세바스토폴에서 출발하는 흑해함대가 그나마 뤼순에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원 역사의 러시아 제국이 흑해함대가 아닌 발트함대를 출격시킨 것은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인 보스포루스 해협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오랜 숙적이란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영락한 지 오래였기에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을 향해 보스포루스를 열라고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오스만 제국 자체론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다른 열강들이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 전함을 팔고 있었고, 프랑스는 많은 차관을 빌려주었으며, 독일은 철도를 놔 주고 군사 고문단을 파견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협박보다 러시아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게 놔두었을 때 닥쳐올 열강들의 외교적 압박이 더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이를 무시하고 억지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해 봤자 제2의 크림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은 어찌 되었든 러시아의 오랜 적.
아무리 오스만 해군이 러시아 해군과 비교해 열세라 하더라도 그들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기에 흑해를 함부로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이렇게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단 말이지.”
비테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독일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끼치는 영향력은 다른 열강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원인은 오스만 제국의 34대 술탄이자 28대 파디샤, 그리고 113대 칼리파인 압뒬하미트 2세 때문이었다.
한때 압뒬하미트 2세는 자유주의에 입각한 개혁 정치를 펼치며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중흥을 꿈꾸었던 위대한 술탄이었다.
그러나 19세기란 시대는 이미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오스만 제국이 살아남기에는 너무 잔혹했다.
압뒬하미트 2세의 재위 시기, 오스만 제국은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영토를 잃었다.
심지어 크림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우방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도와주긴커녕 키프로스와 이집트, 튀니지를 뜯어 갔다.
결국, 크레타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이기고도 열강들의 개입으로 크레타마저 크레타 자치국이란 이름으로 사실상 그리스에 넘어가자 압뒬하미트 2세는 관대한 개혁 군주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피 칠갑한 붉은 술탄으로 흑화해 버렸다.
그리고 그때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었던 독일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접근했다.
독일 제국은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오스만 제국의 군제개혁을 돕고, 오스만 제국의 철도 부설도 관여하며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 때문에 현 오스만 제국 군부와 관료들은 상당한 친독 성향을 보였고, 독일 군사 고문단과 외교관들은 누가 보면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의 상전이라도 된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다.
사실 빌헬름 2세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독일이 정말로 오스만 제국에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어 흑해함대를 통과시키라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야.”
독일 제국이 자신들의 손을 들어준다면 오스만은 망설이긴 하겠지만, 보스포루스를 열어 줄 것이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러시아의 동맹이니 이번만 눈감아 달라고 부탁하면 그만이고.
“독일인들이 오스만 제국에서 제멋대로 구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군.”
본래라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을 테지만, 이번엔 달랐다.
‘물론, 독일 제국이 정말 러시아의 승리를 바라며 보스포루스를 열어 주겠다는 것은 절대 아닐 테지만.’
왜냐하면, 지중해로 나가봤자 어차피 그곳엔 대영제국의 지중해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이 흑해함대를 가로막으면 외교전으로 이 문제를 풀어 나갈 생각이겠지.”
자신들이 외교적 부담을 지기 싫어 영국에게 폭탄을 돌리려는 독일의 뻔뻔한 태도는 둘째 치더라도, 이는 비테로서도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발트함대는 러시아 제국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진 함대다.
표트르 대제에 의해 창설된 이래 오랫동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앞바다를 지켜 왔던 함대이니까.
그런데 만약 그 발트함대가 잘못되면?
러시아 해군은 말 그대로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독일에 제안을 받아들이면, 차르와 베조브라조프의 무리한 원정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영국과 외교전을 펼치는 척하며 다시 분위기를 종전 쪽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한스 폰 초이, 딱 그 영악한 꼬맹이의 머릿속에서 나올 만한 계책이다.
“그래도 오스만 제국이 흑해함대가 부재할 동안 흑해에서 마음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목줄을 잡고 있으란 요구는 해야겠어.”
독일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세르게이 비테는 이번에도 최악보단 차악을 선택했다.
* * *
“독일 제국이 생각보다 의리가 있군.”
한편 아서 밸푸어를 비롯한 영국 정부는 독일 대사가 들고 온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엄청난 사상자 수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장악하고 제해권을 장악한 것만 제외하면 그 어떤 성과도 내질 못하자 영국의 정치인들은 그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못 뚫을 것 같으면 다른 곳으로 우회하든가 해야지 이건 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물론, 전쟁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자들의 말만큼 공허한 것은 없지만, 영국인들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영국 정부는 그리 침울해하지 않았다.
영국엔 독일 제국, 정확히는 한스 폰 초이 남작과의 거래를 통해 얻어 낸 안전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저를 구한 소년은 자신의 말에 거짓은 없다는 듯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러시아의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 관료들의 우두머리인 세르게이 비테와 러시아 외무장관 람스도르프 백작은 일본과의 평화협정에 영국인들이 놀라워할 정도로 매우 긍정적이었다.
아마 그쪽도 공세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니 체면 차릴 거 다 차린 상황에서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비테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제 홍차나 마시며 종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줄 알았더니 갑자기 러시아 제국이 이대로는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며 극동으로 함대를 파견한단다.
처음엔 비테가 모두의 뒤통수를 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니콜라이 2세와 베조브라조프.
무능한 황제와 간신배라는 참으로 상대하기 피곤한 조합이 만들어 낸 사태였다.
하지만 원인이 어찌 되었든 러시아 함대의 출격은 영국으로선 전혀 원하지 않는 사태.
이를 어찌해야 할지 영국 정부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독일 제국으로부터 만약 발트함대가 출격한다면 카이저마리네를 동원해서 외교전으로 상황을 유도하겠다는 전언이 도착했다.
영국으로선 기꺼운 제안이었다.
건방지게 보였던 남자아이의 의외의 일면을 보게 되자 갑자기 그가 잘생겨 보이기 시작한다는 러브 코미디 순정만화의 클리셰처럼 독일 제국에 대한 영국의 호감도가 상승한 것은 덤이었다.
“다만, 여기엔 흑해함대가 출격하면 우리 영국이 대신 막아 달라는 조건이 있습니다만.”
“만에 하나 아니오. 만에 하나. 게다가 러시아 제국이 함대를 보낼 거면 발트함대를 보내지 왜 흑해함대를 보내겠소?”
드레드노트 도입 예산을 따내기 위해 의회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탓에 볼이 움푹 팬 것이 눈에 확 띌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진 피셔 제독의 말에 밸푸어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애초에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오스만 제국이 길을 열어 주지 않는 이상 통과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굳이 흑해함대를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극동에 가는 것은 100% 발트함대였다.
피셔 제독도 드레드노트 건과는 다르게 이번만큼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밸푸어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더 할 말 없습니다.”
“으흠. 난 러시아가 정말로 발트함대를 보낼 때를 대비해서 규탄 성명을 낼 준비나 해야겠소. 제독은 식사 좀 잘 챙기시오. 그러다 쓰러지겠소.”
그러나 밸푸어가 또다시 그리 방심하는 사이.
러시아 흑해함대는 갑자기 상부로부터 떨어진 출격 명령에 술렁이고 있었다.
* * *
“처참하군.”
니콜라이 2세의 명에 의해 원 역사와 달리 발트함대 대신 흑해함대를 이끌고 극동으로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된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Зиновий Петрович Рожественский) 제독은 흑해함대 수병들의 엉망진창인 상태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비테처럼 차르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이 무리한 극동 원정에 반대했다.
러시아 제국 해군은 겉으론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속으론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후화된 함선은 기본에 장교들은 무능한 주제에 죄다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승조원들의 훈련 상태와 사기도 바닥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는 군 부패가 매우 심각한 나라였고, 이는 러시아 해군도 예외는 아니라서 어떤 함선도 포탄을 만재하지 못했을 정도로 포탄 부족이 심각해 제대로 된 사격 훈련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극동 원정은 솔직히 무리였다.
원정이 전략적으로 옳다고 한들 러시아 해군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으니까.
물론, 차르는 이러한 러시아 해군의 사정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나마 흑해함대는 포템킨이나 드볘나드차티 아포스톨로프, 로스티슬라브 등 신형 전함들이 대거 배치되어 있어 전력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 위안거리군.’
발트함대의 경우엔 러시아 제국의 최신예 전함인 보로디노급이 취역해서 발트함대에 배치되려면 최소 한 달은 더 지나야 했다.
보로디노급이 러시아 제국의 열악한 기술력 때문에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은 함선이라 당대 최악의 전함이라 불렸던 것은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실제로도 원 역사에서 보로디노급 대부분은 구조적 결함, 훈련 부족, 무리한 장거리 원정으로 인한 강행군으로 인해 쓰시마 해전 때 제대로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격침되거나 노획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하지만 흑해함대에 신형 전함들이 많다고 해서 흑해함대가 정상적인 함대라는 것은 아니었다.
흑해함대 장교들의 수준과 승조원들의 상태는 그나마 기강은 잡혀 있는 발트함대보다 훨씬 심각했으니까.
게다가 최근엔 사회주의 같은 불온한 사상이 수병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는 보고까지 들려오는 판국이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자신도 모르게 안구에 습기가 차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모두 조용! 우리는 지금부터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뤼순에 고립된 태평양 함대를 구출하기 위해 극동으로 향한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극동?”
“우리가 거길 왜 가?”
“씨발. 이건 미친 짓이야!”
유능한 제독인 로제스트벤스키도 이 원정을 무리라고 생각했을 정도인데, 흑해함대 장병들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출항식에 불려 나온 흑해함대 수병들은 당장이라도 항명 사태를 일으킬 기세로 불만을 쏟아 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님!”
장교들이 어떻게든 소란을 진정시키려고 할 때 수병 하나가 겁도 없이 로제스트벤스키를 향해 외쳤다.
“제독님은 이 원정이 무리란 것을 알고 계시지요? 이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자네 말대로다.”
장교들이 기겁하며 그를 끌어내려고 할 때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말했다.
설마하니 제독까지 이 원정이 미친 짓이라고 인정할 줄은 몰랐는지 좌중이 절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싸늘해졌다.
“우리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다만 확실하게 죽는 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제, 제독님. 그 무슨……!”
부하들이 황당한 눈으로 로제스트벤스키를 바라봤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남자답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안 그런가?”
“하하하하!”
제독의 거리낌 없는 말에 수병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이것으로 수병들의 불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란은 진정되었고 사기도 조금은 올라간 듯싶었다.
‘항해를 시작하면 바로 떨어지겠지만.’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차라리 비테 재무장관의 말처럼 영국 함대가 자신들을 막아 주길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군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부하들을 헛되이 잃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