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88화 (88/193)

88화 : 열어라 해협 (1)

“폐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이십니까?! 극동으로 함대를 출격시키시겠다니요!”

원 역사와 달리 아직 재무장관 자리를 보전하고 있던 세르게이 비테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차르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보다 전쟁이 빨리 끝나게 생겼을뿐더러 북만주뿐만 아니라 몽골까지 덤으로 차지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렇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싱글벙글하며 북만주 개발 계획을 짜던 중이었는데, 뜬금없이 차르가 본국의 주력 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겠다니.

자신은 그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단 말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일으킨 니콜라이 2세는 비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얼굴로 홍차에 설탕을 넣으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일세.”

“폐하. 우리는 이미 유리한 입장에서 협정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굳이 여기서 전쟁을 더 끌 이유가 없습니다!”

빠르고 안전한 길이 있는데, 뭣 하러 위험하고 먼 길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비테는 필사적으로 니콜라이 2세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고, 귀가 얇은 차르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흠……. 람스도르프 백작. 그대도 재무장관과 같은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니콜라이 2세의 물음에 비테와 뜻을 같이하고 있는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가 보기에도 일본과의 전쟁을 지속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북만주 일대를 영국의 귀찮은 방해 없이 우리 러시아 영토로 완전히 병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게다가 극동에서의 선전으로 몽골까지 추가로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외무장관이 말이 맞습니다. 폐하. 게다가 본국에서 함대를 파견한다 해도 극동에 당도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뿐더러 장거리 원정은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그건…….”

비테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의 열성적인 설득에 우유부단한 성격은 어디 안 간다는 듯 망설이기 시작하는 니콜라이 2세.

이에 비테는 여기서 아예 쐐기를 박으려는 듯 자신의 전문 분야인 경제 문제까지 거론하며 차르를 압박했다.

“전쟁으로 인한 전비 소모로 인해 제국의 재정에 큰 무리가 가고 있습니다. 또한 식량 부족으로 인해 신민들의 고통 또한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부디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결정을 재고하여 주십시오.”

“경제, 경제라. 하긴 독일 제국의 군사적 지원 또한 결코 공짜가 아니었으니.”

독일 제국은 이번 전쟁에서 큰 도움이 된 독일제 무기들을 결코 무상으로 넘기지 않았다.

물론 물건값은 어느 정도 깎아 주었지만, 독일인들은 아무리 그래도 적자만큼은 볼 수 없다는 듯 원가라도 받아 가려고 했다.

결국, 러시아 제국은 독일제 무기와 탄약을 사느라 상당한 양의 돈을 써야만 했고, 그 돈은 언제나 그렇듯 러시아 인민들의 피땀 어린 세금에서 충당되었다.

그리고 그만한 희생을 치러서 얻어 낸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그럼, 이 문제에 대해선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것으로…….”

“아니 될 말씀입니다. 폐하!”

결국, 비테의 설득에 넘어간 니콜라이 2세가 다시 마음을 돌리려고 할 때, 큰 목소리와 함께 차르의 집무실 안으로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던 비테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의 얼굴을 그 남자를 보자마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베조브라조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베조브라조프(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Безобразов).

러시아의 귀족이자 사업가로 최근 극동 부왕으로 임명된 차르의 총신.

자신의 사익을 위해 러시아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차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러일전쟁의 원흉이자 세르게이 비테의 가장 큰 정적이었다.

비테는 베조브라조프를 향해 대놓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극동 부왕으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어야 하지 않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엔 무슨 일로 왔지?”

“그야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을 여러분께서 멋대로 끝내려고 하는데, 러시아 제국의 충신인 제가 어디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충신은 개뿔.

비테는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니콜라이 2세가 왜 갑자기 함대를 극동으로 보내자는 소리를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 협잡꾼 놈이 또다시 차르를 부추긴 것이 분명하다.

“애초에 일본과 영국의 종전 조건은 우리 러시아 제국이 뤼순은 물론,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것이지 않습니까. 설마 재무장관께선 그것을 용납하실 생각이십니까?”

“용납하지 못할 게 무엇이 있나. 대한제국은 이미 일본이 장악한 상태고, 뤼순은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데다가 일본 연합함대가 제해권을 차지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장기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땅이야.”

애초에 뤼순은 조차지에 불과했고, 대한제국은 그저 러시아 영향권 아래에 있는 소국일 뿐이다.

비테가 봤을 땐 뤼순은 그냥 청나라에 반환하고, 한반도는 일본이 병합하든 괴뢰국으로 삼든 알아서 하게 놔둔 채 북만주와 몽골을 프리모리예(연해주)처럼 러시아의 영토로 영구히 편입하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면 그 제해권을 되찾으면 그만이지요.”

그러나 베조브라조프는 비테와는 생각이 전혀 달랐다.

비테는 러시아 제국의 이익을 위해 뤼순과 한반도를 포기했지만, 베조브라조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뤼순과 한반도를 포기하지 못했다.

포기하기엔 그 두 곳에 사업을 벌여 놓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나마 러시아 제국이 독일의 군사 지원을 등에 업고 전쟁에서 선전해서 망정이지 전쟁에서 졌으면 지금쯤 베조브라조프는 원 역사처럼 분노한 투자자들에 의해 쫓겨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전쟁에서 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비테가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전쟁을 끝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뤼순과 한반도를 포기하는 대가로 말이다.

물론, 대신 영국이 종전의 대가로 북만주와 몽골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겠다지만, 그건 베조브라조프가 알 바가 아니었다.

당장 자신의 사업기반이 통째로 날아가게 생겼는데, 제국의 이익이 대수인가?

오히려 베조브라조프의 눈엔 비테가 자신을 끝장내기 위해 뤼순과 한반도를 포기하려고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둘 순 없지.’

그렇기에 베조브라조프는 어떻게든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막으려고 했다.

아니, 아예 이참에 러시아를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비테를 아예 정계에서 몰아내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것을 위해 자신의 동료인 알렉세예프 제독의 조언에 따라 베조브라조프가 내놓은 방안이 바로 본국에 주둔 중인 함대의 출동이었다.

알렉세예프 제독의 말에 따르면 제해권만 되찾으면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 했다.

물론, 베조브라조프는 유럽 러시아에서 머나먼 극동까지 가는 여정이 얼마나 길고 위험한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이것만이 자신의 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그러나 여전히 비테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베조브라조프는 비테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 대러시아의 본국 함대가 극동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마카로프 제독의 태평양 함대와 합류해 저 건방진 일본 함대를 모조리 수장시킬 수 있습니다!”

“오.”

눈치 없는 니콜라이 2세가 흉흉한 비테의 분위기를 읽지 못한 채 또다시 팔랑귀를 발동하며 베조브라조프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대한 비테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폐하! 안 됩니다. 극동으로 함대를 파견한다면, 결국 발트함대나 흑해함대 둘 중 하나를 파견해야 할 텐데, 흑해함대는 오스만 제국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어 주지 않는 한 흑해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럼, 발트함대를 보내면 되지요. 발트함대라면 일본 연합함대 따윈 순식간에 섬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발트해에서 극동까지 가는 여정이 그리 쉬운 줄 아나?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그 긴 거리를 가는 동안 함대의 반 이상이 떨어져 나갈 거야. 너무 위험이 크단 말일세!”

태평양 함대가 전멸당한다면 또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애초에 발트함대는 니콜라이 2세와 베조브라조프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강력한 함대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력 면에선 발트함대보다 태평양 함대와 흑해함대가 더 강력했다.

흑해함대와 태평양 함대는 각각 오스만 해군과 일본 해군이라는 위협 때문에 신형 함선들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지만, 발트함대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발트함대에 배치되어 있는 함선들은 노후화된 구식함선들이 대부분이었고, 거기다 러시아 해군의 고질병인 부조리와 승조원들의 낮은 사기와 훈련도 등까지 생각하면 극동 원정은 무리였다.

게다가 빨리 협정하자고 재촉하는 중인 영국부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 해적 놈들은 분명 발트함대의 원정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한스 폰 초이, 독일의 그 소년 남작도 이를 지켜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는 러시아의 배반이자 명백한 거 위반이었다.

잘못하면 독일까지 이 일에 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하지 않나? 굳이 뤼순과 한반도를 포기할 필요도 없고.”

“폐, 폐하!”

“하지만……!”

그러나 비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는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베조브라조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람스도르프 외무장관도 기겁하여 차르를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까지 비테와 람스도프프 외무장관이 목이 쉬어 가며 차르를 설득하려 한 노력은 그렇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 * *

“……그래서 러시아가 발트함대를 극동에 보내려고 한다고요.”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것을 느끼며 주독 러시아 대사를 맡은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오스텐자켄(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Остен-Сакен)를 향해 물었다.

오스텐자켄 대사는 자신도 이번 일이 꽤 민망했던 모양인지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비테 재무장관과 람스도르프 외무장관께서도 미안하다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이게 사과로 끝날 문제입니까. 이건 배신입니다. 배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딱히 비테에게 화가 나진 않았다.

그래도 비테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지 않은가.

진짜 문제는 니콜라이 2세와 베조브라조프였다.

이 두 환장의 조합은 몇 년에 걸쳐 완성된 내 계획을 골인 지점 바로 앞에서 박살 냈다.

어떤 의미론 참 대단하다 싶다.

“남작. 이미 영국이 러시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우리를 향해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내 귀에 작은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다.

하긴 갑자기 잘나가다 러시아 제국이 저리 나와 버리니 영국 정부로선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일 것이다.

‘그래도 러시아 함대를 막긴 막아야지.’

러시아 함대가 원 역사처럼 일본에 패배해도 문제고, 이겨도 문제다.

일본이 이기면 러시아 해군에 대한 영국의 경계심이 풀릴 것이고, 러시아가 이기면 그들이 너무 커져 버릴 테니까.

무엇보다 종전하기 딱 좋았던 전쟁의 밸런스가 한순간에 박살이 날 것이다.

‘괜찮아. 아직 방법은 남아 있어.’

“대사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나는 오스텐자켄 대사에게 양해를 구한 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와 그의 귀에 은밀히 속삭였다.

“장관님. 만약 러시아 제국이 함대를 파견한다면 발트함대를 움직이겠죠?”

“물론. 흑해함대는 흑해 밖으로 나오지 못하지 않나.”

“영국 또한 우리처럼 발트함대가 출동하리라 생각할 테고요.”

“그렇겠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무슨 꿍꿍이냐는 듯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영국한테 발트함대가 출격하면, 그들이 발트해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우리 황립 해군이 막겠다고 하죠.”

“발트함대를 가로막아 회담을 유도해 외교적으로 해결할 생각인가? 하지만 그러면 우리 독일의 부담이 너무 클 텐데.”

“괜찮습니다. 우리가 발트함대를 막는 대신 영국에 만에 하나 흑해함대가 출동하면 우리 대신 막아 달라고 할 생각이니까요. 외교적 부담을 우리 독일이 아닌 영국이 지게 만드는 겁니다.”

“잠깐, 잠깐만. 방금 말했듯이 흑해함대는…… 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는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남작, 설마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겠지?”

“아마도 맞을 것 같네요.”

나는 나를 무슨 악마 보듯이 바라보는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을 향해 짧게 심호흡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열어 버리죠. 보스포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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