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87화 (87/193)

87화 : 악연의 끝

“반란 진압 수고했다. 한스. 역시 너에게 맡기길 잘했구나.”

“과찬이십니다. 폐하.”

“하하! 오늘만큼은 겸허하게 굴지 않고 마음껏 자랑해도 좋다. 네가 가자마자 반란이 순식간에 끝나질 않았느냐. 게다가 외신들도 나를 레오폴드 그 사탄 자식과 비교하며 매우 칭찬하더구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식민지를 떠난 뒤 나는 생각보다 열렬한 환영 속에서 독일로 귀환했다.

내가 헤레로 전쟁을 깔끔하게 끝낸 것도 모자라 기자들에게 벨기에와 비교하면 독일은 이렇게 착하다고 선전한 게 잘 먹혔는지 그동안 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던 독일 국민이 이번엔 잘했다며 좋게 평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융커들은 저 자리에 내가 아닌 자신들이 있어야 했다며 배 아파했다.

이미 열차는 떠난 것도 모자라 목적지에 도착한 후였지만.

“역시 너에게 중책을 맡기길 잘했다. 자, 가슴을 내밀 거라.”

오랜만에 보는 빌헬름 2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었다.

물론 독일 제국의 최고위 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erite)는 당연히 아니었고, 1861년에 제정된 프로이센 왕국의 군수 훈장 중 하나였던 왕관장(Kronenorden), 그중에서도 내가 받은 것은 2급이었다.

애초에 푸르 르 메리트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제정한 이래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훈장이라 고작 식민지 반란을 진압한 정도론 받을 순 없었으니까.

또한, 독일 제국의 훈장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를 훈장인 아이저네스 크로이츠(Eisernes Kreuz), 그러니까 철십자 훈장도 같은 경우에는 수여가 중지된 상태라 받질 못했다.

철십자 훈장은 어디까지나 독일 제국이 전쟁 중일 때만 수여되는 훈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철십자 훈장은 보불전쟁 이후 수여가 중지되었다가 나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다시 제정된다.

‘물론 왕관장이라고 격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이래 봬도 왕관장은 검은 독수리 훈장 다음으로 격이 높은 붉은 독수리 훈장과 동격의 위상을 지닌 훈장이었다.

다만, 독일 장교들은 왕관장보다 더 전통 있는 붉은 독수리 훈장을 더 선호했기에 왕관장은 정부가 포상은 해야겠는데, 붉은 독수리 훈장은 주기 싫거나 붉은 독수리 훈장을 주긴 좀 애매한 사람들에게 수여되었다.

딱 나 같은 사람 말이다.

그밖에도 남서아프리카 기념 메달(Südwestafrika-Denkmünze)이란 것도 받았는데, 이건 헤레로 반란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념품 같은 거라 큰 의미는 없었다.

당장 의화단 전쟁 때도 중국 메달(China-Denkmünze)이라고 비슷한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떤 의미론 이 두 개의 식민지 전쟁이 독일 제국에서도 따로 기념 메달을 제정할 정도로 인상이 깊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선 작위도 같이 올려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건 역시 너무 이른 것 같구나.”

“예, 폐하. 저 또한 여기서 더 많은 것을 바랄 생각은 없습니다.”

당장 내가 큰 공을 세우고 온 것에 우리 융커 아저씨들이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 작위까지 승격되는 것은 너무 많은 이목을 끄는 것도 모자라 융커들을 지나치게 자극할 수도 있다.

게다가 독일 제국에 자작 작위라도 있으면 모를까, 독일은 러시아처럼 자작 작위가 아예 존재하질 않았다.

그렇기에 남작 다음은 백작인데, 아무리 그래도 식민지 반란 하나 진압했다고 백작이 되는 건 좀 그랬다.

헤레로 전쟁이 독일의 식민지 전쟁 중에선 꽤 이름값이 있다곤 해도 말이다.

‘지금은 남작으로도 충분해.’

판타지 같은 데서야 하급 귀족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남작이지만, 실제 남작은 어디 가서 꿀리는 작위가 절대 아니다.

당장 리히트호펜 외무장관도 남작이었다.

“오늘 저녁에 네 귀환을 축하하는 축하연을 열 생각이지만, 그 전에 널 찾는 사람들부터 만나 봐야겠더구나.”

“예. 아무래도 극동에서의 전쟁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본이 힘을 못 쓰고 삽질만 하는 거야 계획대로고, 최익현의 봉기를 시작으로 의병이 일어날 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에서 1년 일찍 발생한 의병은 일본의 발을 붙잡긴 했지만, 전쟁의 향방까진 바꾸지 못했다.

일본엔 아직 외부 부착 상식 회로인 이토 히로부미가 멀쩡히 살아 있었으니까.

덕분에 한반도를 어떻게든 손아귀에 쥐고 있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군 또한 참호 밖으로 나가지 말라니까 기어코 나가선 몸으로 참호전을 배운 일본군에게 얻어터진 뒤, 히키코모리처럼 참호에 틀어박힌 상태였기에 전쟁은 완전히 교착.

양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 의지를 점점 잃어 가고 있었다.

딱 내가 원하는 전쟁의 전개였다.

“쯧. 일본이 조금 더 고통받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간 러시아가 정말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폐하. 그들이 너무 커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

“이미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미국이 러시아 제국과 일본을 중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곧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쟁이 끝나겠지요.”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또한 빨리 약속 지키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며 러시아 제국에선 비테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전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럼 폐하.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한스.”

나는 빌헬름 2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발걸음을 돌려 카이저의 집무실을 나섰다.

할 일도 많고, 할 이야기도 많다.

다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래서, 제가 살아 있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발더제 원수님.”

“쿨럭쿨럭! 허억……허억……!”

포츠담을 떠나 곧장 하노버에 있는 발더제의 별장을 찾은 나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발더제 원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문 목적은 병문안이었지만, 당연하게도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죽는 것을 보겠다는 집념 하나로 본래 수명을 뛰어넘어 버티고 있던 발더제 원수에게 그가 패배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전문적인 용어로 티배깅이라고도 한다.

“너…너…… 이 자식…… 어떻게……!”

“어떻게 살아 있냐고요? 설마 제가 이런 허술한 암살 계획 하나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이거 절 너무 과소평가하시네요.”

“쿨럭쿨럭! 루…루덴도르프는…….”

“루덴도르프 소령님…… 아니, 이젠 곧 중령이 되던가요. 어쨌든 아직 남서아프리카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 원수님에겐 감사드려야겠군요. 덕분에 쓸 만한 노예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요.”

“쿨럭쿨럭! 쿨럭쿨럭쿨럭!”

발더제가 말을 잇지 못한 채 연신 기침을 내뱉으며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죽어서도 날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저주하는 듯한 끈적하고 깊은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귀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

21세기 한국에서 20세기 독일에 떨어진 내 신세를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그래도 원수님이 절 암살하려 했다고 고자질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뜩이나 바쁜 상황에 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게다가 곧 있으면 지옥 불로 떨어질 것 같으신데, 굳이 제가 나설 것도 없어 보이고요.”

“이…… 역겨운 칭키 놈……! 네, 네놈은 독일 제국을 망칠 종양…… 쿨럭! 쿨럭쿨럭!”

“제가 독일 제국을 망친다고요? 이거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제가 이렇게 고생하는 게 대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독일 제국을 살리려고 이러는 거다.

발더제는 죽어서도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슐리펜 참모총장님이랑 약속이 있거든요.”

“이…이……!!”

“그럼, 몸조리 잘하십시오. 발더제 원수님. 아, 이걸 까먹었네요.”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발더제를 향해 말했다.

“루덴도르프 중령님이 안부 전해 달랍니다.”

“한스 초이이이이이!!! 쿨럭! 쿨럭쿨럭!!”

발더제 원수가 피를 토하며 내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귀에 발더제의 부고가 들려왔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 * *

“헤레로 전쟁에서의 활약 인상 깊게 들었네. 한스 군.”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로이트바인 총독과 그 부하들이 유능했던 것뿐이지요.”

“전술 면에선 그렇지. 하지만 전체적인 전략은 자네가 생각한 것 아닌가.”

그리 말하며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놓은 슐리펜 참모총장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사관학교에 가고 싶다면…….”

“참모총장님. 그 건에 대해선 더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셨잖습니까.”

“쳇.”

슐리펜 참모총장이 아쉬운 얼굴로 혀를 찼다.

하여튼, 방심만 하면 나를 자꾸 군인으로 만들려고 한다니까.

물론, 군에 들어갈 생각을 아예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전생에서 장교나 부사관은커녕 대부분의 대한민국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군 생활을 보냈던 내가 군에 들어간들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굳이 내가 군에 들어가지 않아도 독일군엔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절 독일군 명장들이 오죽 많았던가.

당장 생각나는 사람만 해도 발터 모델에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 호트 등등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다.

내가 군에 들어가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이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

에바였다.

‘게다가 군부는 융커들 천지니.’

슐리펜 참모총장이 나랑 친해서 그렇지, 여전히 군부의 대부분은 날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난 카이저처럼 마조히스트 성향은 없었기에 굳이 나 스스로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취미는 없었다.

또한, 그 무엇보다 독일 제국은 외교 문제가 더 시급했다.

독일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 대(大) 몰트케보다는 비스마르크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억지로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개인적으론 군대 쪽보단 외교랑 정치 쪽이 더 취향에 맞기도 하고.’

아무튼 슐리펜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으로선 군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군대는 전생 시절에 가 본 거로 충분하다.

“그나저나 극동에서 러시아군이 보여 준 ‘참호전’은 참 흥미롭더군.”

“그렇습니까?”

“참호와 기관총, 그리고 철조망의 조합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효과를 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네. 일본군의 전사자만 벌써 10만이 넘어간다지?”

나는 슐리펜 참모총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 역사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약 8만 정도의 전사자를 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것이 참호전의 무서운 점이었다.

전쟁에 낭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죽어 간 사람들을 그저 숫자만으로 보게 만드니까.

“물론, 방어선이 완벽하게 구축된 지역에 무리하게 병력을 투입한 일본 수뇌부의 책임도 크겠지만.”

“기관단총도 꽤 활약했다죠?”

“물론. 러시아 병사들이 아주 보물처럼 모신다는구만. 덕분에 우리 군에서도 기관단총을 대량으로 보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네. 막대한 탄약 소모량을 어찌 감당할지는 둘째 치고 말일세.”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독일엔 프리츠 하버와 그가 만든 공중질소고정법, 즉 하버-보슈법이 있으니까.

하버-보슈법이 탄생하면 질소 비료는 물론, 화약을 값싸고 많이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기에 탄약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다만, 하버가 만든 것 중에는 하버-보슈법뿐만이 아니라 독가스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량 살상 병기 또한 존재했다.

괜히 하버가 멜서스 트랩을 박살 낸 인류의 구세주라 불리는 동시에 희대의 대량 학살자라고 욕을 들어 먹는 게 아니다.

오죽하면 하버처럼 과학자였던 그의 아내조차 남편이 독가스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제발 만들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하버가 듣질 않자 이를 비탄하며 자살했을 정도였을까.

“하여튼 요즘 이것 때문에 고민이야.”

“기관단총 때문에요?”

“아니, 참호전. 내가 최근에 구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남작!”

슐리펜 참모총장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었다.

“후, 여기 있었군!”

“외무장관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래, 긴급사태일세. 방금 러시아 대사를 통해 비테 재무장관에게서 들어온 소식인데, 러시아 제국이 발트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하려고 하고 있네.”

“예?!”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평양 함대도 어느 정도 전력을 온존 중이고, 마카로프 제독도 멀쩡히 살아 있는데, 굳이 그걸 보내?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애초에 내가 알기론 러시아 제국 또한 전쟁을 끝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트함대를 보낸다는 것은 러시아 제국이 종전은커녕 아직 전쟁을 계속하려 한다는 의미였다.

이건 거래위반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준 게 비테 재무장관이라고요?”

“그렇다네.”

“그러면 비테 조차 통제하지 못한 일이 생긴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네요. 슐리펜 참모총장님. 그런 연유로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으음.”

나는 슐리펜에게 급히 인사를 하고,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뒤를 따라 러시아 대사를 만나러 갔다.

한편 홀로 남겨진 슐리펜은 복잡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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