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불타는 한반도 (2)
“이, 이, 이 빌어먹을 조센징들이!!”
일본 본토에 조선인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도 모자라 한반도 전역에서 일본군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대일본제국 육군참모총장이자 조슈벌의 수장, 그리고 대본영의 수장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핏발 섞인 눈으로 분노를 토해 냈다.
조선인들이 한반도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다.
가뜩이나 전황도 안 좋은데 한반도 전체가 요동치고 있단 말이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친구이자 정적이 분노로 미쳐 날뛰는 모습에 그저 조소를 흘릴 뿐이었다.
“내가 그래서 러시아와의 전쟁만은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래, 쿄스케(狂介, 야마가타의 옛 이름). 이제 좀 후회가 되나?”
“시끄러워, 이 죽어서도 여자 품에서 죽을 호색한 녀석아!”
자신을 놀리는 이토를 향해 야마가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너구리 도쿠가와라도 빙의했는지 능글맞은 얼굴로 그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이로 인해 더 열이 뻗친 야마가타는 만만한 가쓰라 다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선 황제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뭐라 하나!”
“자,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로 보입니다. 황제는 궁에 갇힌 채 꼼짝 못 하고 있고, 그의 수족인 이용익은 이곳 일본에 있으며 민영환 같은 반일파 고관들도 가택에 연금된 채 우리의 감시 아래에 있는 상태이니까요.”
총리 가쓰라 다로는 자신의 후견인이자 일본 정부의 진짜 실세인 야마가타의 귀기 어린 모습에 벌벌 떨며 말했다.
가뜩이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전쟁과 이젠 세는 것조차 두려운 엄청난 숫자의 사상자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는데, 이젠 조선인들까지 말썽이라니.
마음 같아선 그냥 총리직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야마가타는 허락해 주지 않을 테지만.
“흥. 하긴 그자는 조선 왕비가 죽은 거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도 그랬지. 이번엔 도망치지 못하게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해!”
“옛, 각하.”
그럴 용기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기회 삼아 조선 황제가 탈출하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아관파천을 감행해 일본이 뒷목을 잡게 했던 황제다.
한 번 했던 일을 두 번은 못 하겠나?
이번엔 러시아 공사관이 아니라 아예 러시아로 망명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관파천이 결국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뜩이나 전황이 좋지 않은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어이, 이토! 네 놈도 가만히 놀지 말고 대책이 있으면 좀 말해 봐라. 이러다 우리 조슈벌은, 대일본제국은 끝장이란 것은 너도 잘 알 것 아니야!”
“후, 그놈의 파벌 놀이는 지겹지도 않나?”
조슈벌을 만들었던 야마가타와 달리 평생 파벌을 만들지 않았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토 히로부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일이 이 지경까지 와서 야마가타를 돕지 않을 수도 없었다.
비록 최근엔 러시아 문제로 정적이 되어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야마가타는 자신과 막말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둘도 없는 친우이자 벗이었으니까.
그리고 잘못하다간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의 선배들이 목숨을 바쳐 가며 쌓아 올린 대일본제국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것만은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요시다 쇼인 선생님과 타카스기 씨가 저승에서 한탄하겠군.”
“아, 쫌!”
“알겠네. 알겠어. 어이, 가쓰라.”
“네, 넷. 이토 상.”
“당장 만주군 사령부에 연락해서 일부 병력을 한반도로 보내 조선 잇키를 진압하라고 전해. 한반도 주둔군만으론 아무래도 힘들 테니까.”
“예? 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병력을 함부로 뺏다간 큰일이 나지 않을까요……?”
가쓰라 다로가 그리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생각을 좀 해 보라는 듯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공세를 중지하고, 따로 병력을 편성해서 한반도로 내려보내면 돼. 어차피 전황은 계속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인 데다가 계속 공세를 진행해 봤자 애꿎은 병력만 날리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게다가 어차피 상황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이쯤에서 전쟁을 끝내야 해. 마침 미국에서 러시아와의 평화교섭을 중재해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지?”
“예. 영국 또한 우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영국은 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버린 일본군에 경악했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에서 일본이 불리하리라곤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요새화가 잘되어 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몇 개월 동안 제대로 된 진격 한 번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바야흐로 한스 폰 초이 남작의 예언 아닌 예언이 실현되고 있었다.
영국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이 서둘러 일본에 대량의 맥심 기관총을 비롯한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일본군은 그대로 러시아군에 밀려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했을 것이다.
영국은 이제 일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렸다.
영국 정부는 한스 폰 초이 남작의 제안했던 대로 외교 교섭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마침 지금 전쟁은 러일 어느 쪽도 제대로 된 공세를 못 하고 있는 교착 상태.
전쟁을 끝내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다만, 남작이 제안한 합의안은 러시아가 북만주를 가져가는 대신 뤼순과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일본이 못 싸운 터라 어쩌면 북만주로도 부족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영국은 만일의 경우 아예 몽골까지 러시아가 차지하도록 용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영국 정부의 움직임을 전해 들은 일본 정부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조차 속으론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이 이상 끌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배를 갈라야 했으니까 쉬쉬했을 뿐이지.
하지만 이젠 고민할 시간조차 없어졌다.
이토가 생각하기에 일본에 남은 선택지는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챙길 수 있는 것이라도 챙기는 것뿐이었다.
“쿠소…….”
이대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이토의 말에 야마가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또한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결국 마지못해 이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도 조선은 반드시 전리품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조슈벌은 끝장이야!”
당장 러시아 제국과의 일전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가쓰라 다로가 이끄는 조슈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전쟁 배상금은 고사하고,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나면 일본 열도 전체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할 것이다.
지금도 자신들에게 책임을 지라며 여기저기서 할복하란 소리가 들려오는 판국인데, 이 이상은 아무리 야마가타라도 감당할 수 없었다.
“조선을 전리품으로 챙겨야 한다는 점엔 동의하지만, 원래 계획대로 5년 안에 조선을 병합하는 것은 무리다. 야마가타, 너도 알고 있겠지?”
“쯧, 그래. 당분간은 살려 두면서 괴뢰국 삼는 것에 만족해야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도 조선 잇키들을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 해.”
이대로 의병들이 활개를 치게 놔둔다면 일본군의 보급로가 흔들리는 것은 물론, 종전을 위한 평화교섭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었다.
지금 일본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를 어떻게든 계속 손에 쥐고 있는 것이었다.
“가쓰라.”
“예, 이토 상.”
“고무라 외상에게 평화교섭을 준비하라고 전해. 또 하야시 공사에게 연락해서 조선 황제가 의병 해산을 명령하게 만들어. 아니, 아예 조선군을 잇키 진압에 동원해도 좋겠군.”
“조선군을 말입니까?”
“조선군이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는 것을 보면 잇키들이 과연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오…….”
“분열하여 정복하라. 기본 중의 기본이지. 알아들었으면 얼른 가 보게.”
“하, 하잇!”
가쓰라가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토는 헐레벌떡 방을 나서는 가쓰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전쟁이 끝나면 저 머저리가 총리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끝이군.’
러일전쟁이 이 지경이 된 이상 무슨 짓을 해도 가쓰라는 총리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
한심한 전쟁 결과에 분노한 국민이 그를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내게 기회로 돌아올 것이다.’
역시나 대일본제국엔 아직 자신이 필요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리 중얼거리며 다시금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비쳤다.
* * *
1904년 8월, 대한제국 한성.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황실과 수도 한성을 지키는 대한제국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은 훈련 중에 갑자기 영내로 들이닥친 일본군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일본군이 대한제국을 장악한 이래,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일본군 장교들을 보고도 경례는커녕 아예 유령 취급을 하며 무시하고 지나갔고, 일본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대한제국군과 일본군 간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큰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양국 정부의 의향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군은 대한제국군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 그들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했고, 대한제국군 또한 같은 이유로 일본군의 제멋대로인 행동을 보고도 못 본 체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을 시작으로 조선 8도 전역에서 의병이 우후죽순 발생하고, 전선에 나가 있던 일부 일본군이 한반도로 내려오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시위대는 현 시간부로 러시아의 명령을 받아 일한우호를 해치고 있는 폭도들을 진압하라는 황명이오.”
“뭐요? 폭도? 황명?”
박승환 참령이 일본군 장교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본을 이 나라에서 몰아내기 위해 일어난 의병들을 러시아의 주구이자 폭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황명이라니. 그걸 왜 이놈들이 자신에게 전달한단 말인가.
박승환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일본군 장교가 그 답을 말했다.
“대한의 황제께서 조선군의 지휘를 우리 일본군에 맡기셨소. 원한다면 여기 명령서를 보여 주겠소.”
뻔뻔해도 너무 뻔뻔한 말에 박승환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기어코 왜놈들이 이 나라를 자기들 입맛대로 움직이는구나!’
황상이 직접 내린 명령은 아닐 것이다.
분명 또다시 저 일본인들이 황제를 협박해서 얻어 낸 명령일 게 뻔했다.
친일 매국노들이 장악한 조선 정부 또한 이를 묵인했을 테고.
박승환은 솟구쳐 오르는 울분을 참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일본 놈들을 위해 동포들에게 총을 겨누어야 한다니!’
자신이 군인이 된 것은 황제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일본군이 시키는 대로 같은 조선인들을 짓밟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박승환 참령은 계급장을 떼 버리고 일본군에 맞서고 있는 의병들과 합류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지만, 협박이 만들어 낸 황명이라도 황명.
결국, 박승환과 대한제국 시위대를 비롯한 대한제국군은 어두운 얼굴로 일본군과 함께 반강제로 의병 진압에 나섰다.
탕! 타탕! 타다다다!
“대장님! 일본군의 공세가 너무 강합니다!”
“관군까지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큭! 전 부대에 알려라. 산으로 후퇴한다!”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된 것도 모자라 고종의 해산 명령과 함께 대한제국군까지 자신들을 공격하자 한때 조선팔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기세였던 의병들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 잇키들의 용기는 가상하지만, 저들을 서둘러 쓰러트리지 못하면 대일본제국의 명운이 흔들린다. 모두 이 점을 명시하고 바람처럼 빠르게 불처럼 강하게 몰아쳐라!”
“핫!”
한반도에서 일어난 소요를 책임지고 진압하란 명령을 받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의 명령에 일본군은 호치키스 경기관총 등 의병들보다 우월한 무장을 앞세워 의병들을 끊임없이 밀어붙였다.
본래 원 역사에서 뤼순 공방전에서 무능한 지휘로 무수한 인명 피해를 낸 끝에 전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할복한 노기였지만, 이 세계에선 뤼순 공방전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바람에 그는 전선을 떠나 한반도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는 노기 마레스케가 러일전쟁 이후 히로히토의 교육을 맡을 정도로 메이지 천황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토와 야마가타처럼 조슈번 출신에 쇼카손주쿠 문하생이라는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는 점 때문에 윗선에서 일부러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학연과 지연의 힘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들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등장한 참호전으로 인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말아먹어서 그렇지 일본군은 절대 약군이 아니었고, 수도 부족하고, 무기도 부족한 의병들이 정면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동포에게 무기를 겨눌 수 없는 일. 항복하겠네.”
거기다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대로 대한제국군이 진압에 참여하자 의병들이 사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문제였다.
대한제국군이 전장에 나타나자 최익현은 한숨 쉬며 원 역사처럼 항복해 버렸고, 황제의 근위대인 시위대를 발견한 일부 의병들은 고종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해 의병 활동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한 수의 의병들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일본에 저항했다.
의병들은 이제 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히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일본군대로 산에 숨은 의병들을 잡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이렇게 한반도가 불타오르고 있었을 때, 한스 폰 초이는 마침내 남서아프리카에서 독일로 귀환했다.
그리고 소년의 앞에는 흡족한 얼굴로 훈장을 들고 있는 카이저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