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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85화 (85/193)

85화 : 불타는 한반도 (1)

“……다들 의견이 있으면 좀 내보게. 대체 어떻게 하면 쿠로파트킨 방어선을 뚫을 수 있겠는가?”

“…….”

일본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원수가 침울한 표정으로 그리 질문했지만, 답은 없었다.

그들로서도 더는 대책이랄 게 없었으니까.

한스가 아프리카에서 헤레로족과 싸우고 있을 때, 일본군은 러시아군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대량의 대포를 동원해 러시아군 참호선에 대규모 포격을 퍼붓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직 제정신이었던 일본군은 롤모델인 독일군의 영향을 받아 화력 중심 교리를 택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생각하기에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본군은 본토에서 해안방어용으로 사용하던 280mm 포까지 동원해 러시아군을 1차 적으로 밀어내는 것엔 성공했다.

그러나 참호전이 이렇게 쉽게 돌파당하는 것이었으면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명도 없었다.

러시아군은 방어선을 몇 겹으로 만들어 놨고, 일본군의 포격이 시작되자 1차 방어선을 버리고 유유히 2차 방어선으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그렇게 드디어 압록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기대에 부풀어 있던 일본군의 공세는 몇 킬로미터도 못 가서 또다시 막히고 말았다.

이에 일본군 사령부는 다시 대규모 포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이번엔 일본의 부족한 산업력과 국력이 발목을 잡았다.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공략할 방법은 포격밖에 없는데, 정작 그 포격이 포탄이 없어서 제때제때 이뤄지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괜히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화력 중심 교리를 버리고 엘랑 비탈에 영향을 받은 정신력과 백병전 중심 교리를 택한 것이 아니다.

“제2군은? 오쿠는 아직도 좋은 소식이 없는가?”

“죄송합니다만, 2군의 상황 또한 1군과 마찬가지입니다. 각하.”

오야마 원수의 절박한 목소리에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며 대답했다.

본래 일본군은 제1군이 압록강을 성공적으로 도하 하면 추가로 오쿠 야스타카(奥保鞏) 대장이 이끄는 제2군을 요동 반도에 상륙시켜 다롄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1군이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쿠로파트킨의 방어선에 가로막힌 것도 모자라 엄청난 병력 손실을 내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작전 계획을 전면 수정해 상륙작전을 바로 거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1904년 5월 말, 제2군은 압록강에서 실시간으로 시체만을 양산하고 있는 제1군을 대신해 무언가 보여 주리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호기롭게 남산-진저우 방면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압록강과 마찬가지로 남산과 진저우 방면을 뒤덮은 러시아군의 참호와 기관총, 그리고 윤형 철조망들이었다.

콰쾅! 쾅! 투다다다다다───!!!

“으아아악!!”

“오카상!”

결국, 얼마 안 가 제2군 또한 제1군이 압록강에서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군의 독일제 기관총에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어머니를 부르짖으며 개처럼 죽어 나갔고, 공을 세울 생각에 부풀어 있던 제2군 사령관 오쿠 대장은 구로다 중장이 그랬던 것처럼 절망한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하, 봐라! 일본군이 쓰레기 같구나! 하하하하!!!”

“운게른. 제발 그 입 좀 다물면 안 되겠나?”

학교를 때려치우고 군에 입대해 전쟁에 참전하려 했지만, 정작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 버렸던 원 역사와 달리 제때 극동에 도착해 진저우-남산 방어선에 배치된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Роман фон Унгерн-Штернберг)가 광소를 터트리며 일본군을 향해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물론, 할 일 없이 뤼순 요새에서 시간만 보내다 자청해서 남산으로 파견 나온 로만 이시드로비치 콘드라첸코(Роман Исидорович Кондратенко) 소장과 러시아 병사들은 이를 썩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다 저런 미친놈이 내 휘하에 들어와선…….”

“소장님. 기뢰가 준비되었습니다.”

“굴려.”

콘드라체코 소장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그가 해군으로부터 받아 온 기뢰를 언덕 아래로 굴리기 시작했다.

기관총을 막기 위해 철 방패까지 들고 다가오던 일본군 병사들은 거대한 폭탄이 자신들에게 굴러오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콰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일본군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일본군 병사들은…… 영 좋지 않은 상태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로만 콘드라첸코 소장의 창의적인 방어법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원 역사의 뤼순 공방전에서의 활약이 장식이 아니라는 듯, 대포를 박격포처럼 운용하기도 하고 철조망에 배터리를 연결해 전기 철조망으로 마개조를 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러시아군의 방어선에 고통받고 있던 일본군이 아주 좋아 죽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으아아아! 이 비겁한 놈들! 참호에서 나와라! 나와서 싸우잔 말이다!”

“사령관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오쿠 사령관님을 모셔!”

결국, 2군의 공세마저 1군처럼 지지부진해지자 오야마 원수를 비롯한 일본군 사령부는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신이 기어코 우리 일본을 버렸는가!”

제1군도 모자라 제2군까지 러시아군 방어선에 가로막혀 진군을 못 하고 있다.

일본 육군이 봉천으로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준비한 두 개의 카드가 모두 막혀 버린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 시작된 지 아직 반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압록강과 남산 두 곳에서 10만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원 역사에서 일본 육군이 최대 5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전체 전력의 5분의 1이 죽었다는 소리다.

이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숫자에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고, 일본 열도는 비탄에 빠졌다.

심지어 메이지 천황마저 어전회의에서 무능한 군부와 장군들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일본 육군은 한순간에 영웅에서 전쟁을 말아먹고 있는 대역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육군 장성들을 더욱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육군과 달리 해군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연합해군은 여전히 마카로프 제독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러시아 함대를 뤼순에 가둔 채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한다는 목표는 달성하고 있었다.

사쓰마와 조슈의 갈등에서 시작된 일본군의 뿌리 깊은 육해군 갈등을 생각해 보면 일본 육군 사령부로선 그야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일이었다.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

그것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병력을 투입하고 투입해도 러시아군의 방어선은 도저히 뚫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따로 병력을 편성해서 뤼순을 직접 노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허. 남산도 뚫지 못했는데 뤼순을 공격하자니,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애초에 뤼순은 요새 도시야. 그 어떤 곳보다도 러시아군의 방어가 가장 두터울 것이 뻔하지 않은가!”

“끄응…….”

고다마 참모장이 한 참모가 의견이랍시고 내놓은 멍청한 소리에 역정을 내자 사령부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남산이라도 점령했다면 모를까 이 상황에서 뤼순까지 노리기에는 일본군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그나마 러시아군 또한 방어만 굳힐 뿐 공세를 하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군.”

오야마 총사령관의 말처럼 일본군이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군 또한 일본군의 방어선을 역으로 뚫지 못하고 있었다.

성공적으로 일본군의 공세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자 원 역사에서 일본을 내심 얕본 것처럼 기고만장해진 쿠로파트킨은 독일 관전 무관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향해 역공세를 시도했다.

콰쾅! 쾅!

“복수의 시간이다! 로스케 새끼들아!”

“너희도 당해 보니 아주 좋아 죽겠지? 응?”

러시아군은 일본군에게 거짓말처럼 패배하고 다시 참호 안으로 도망쳤다.

러시아군이 선보인 참호와 기관총, 철조망을 이용한 참호 방어전을 일본군도 똑같이 따라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이 독일제 MG99로 일본군을 괴롭혔다면 일본군은 영국에서 지원받은 맥심 기관총으로 러시아군을 괴롭혔다.

일본이 러시아를 이길 리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영국이 부랴부랴 맥심 기관총을 일본에 대량으로 지원해 준 덕분이었다.

이에 쿠로파트킨은 그동안 쏠쏠하게 사용한 기관단총을 앞세워 일본군 참호를 공략하려 했으나 정작 기관단총의 물량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독일이 러시아군에 지원해 준 기관단총은 고작 해봐야 약 2,000정이 전부였다.

게다가 지금 러시아군이 보유하고 있는 기관단총은 어디까지나 프로토타입이었던지라 내구성이 낮아서 쉽게 망가졌기에 그 수는 더욱 준 상태였다.

때문에 쿠로파트킨은 독일 장교들에게 기관단총을 더 구매하고 싶다며 은밀히 제안을 건넸지만, 독일 장교들은 단칼에 거절했다.

헤레로 전쟁으로 본국의 기관단총 재고가 바닥이 났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물론, 약간의 진실이 섞인 거짓이었다.

원래 독일 관전 무관단은 러시아군에 기관단총을 건네면서 이 무기가 정말 실전에서 쓸 만한가 정도만을 확인하려고만 했다.

이 과정에서 기관단총에 그리 큰 기대를 품지 않았던 장교 몇이 러시아 병사들을 무시하며 조작법을 대충 알려 주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계획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고 기관단총이 예상보다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이자 독일 장교들은 말 그대로 기겁했다.

이 이상 러시아군이 성과를 내게 해선 그들로서도 곤란했기에 독일은 기관단총의 판매를 막았고, 여기에 러시아군의 고질병인 보급 문제까지 겹치자 쿠로파트킨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참호에 틀어박혔다.

러일전쟁은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 전쟁에 많은 것이 걸려 있는 일본은 아직 전쟁을 포기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무의미한 공세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끝이었다.

“각, 각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설마 러시아군이 우리 방어선을 돌파하기라도 한 건가?!”

오야마 총사령관의 말에 웅성거리는 사령부.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간 자신들은 끝이었다.

그러나 보고를 전하러 급히 사령부로 달려온 장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러시아군이 기어코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조, 조선에서 잇키(一揆)가 일어났습니다!”

“뭐야! 잇키?!”

어찌 보면 더 심각한 사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 * *

갑진년, 또는 광무 8년 7월 말.

면암 최익현은 자신을 따르는 선비와 유생들, 그리고 함께 일본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한 수백에 달하는 조선 민초들을 향해 천천히 눈을 떴다.

최익현이 바라본 그들의 눈동자에는 굳건한 투지가 깃들어 있었고, 그것을 증명하듯이 그들의 손에는 각기 무기가 들려 있었다.

물론, 어렵게 구한 러시아제 베르단 소총과 일본제 무라타 소총 몇십 정을 제외하곤 제대로 된 무기는 없었다.

무기의 대부분은 임진년과 병자년에나 썼을 것 같은 구식 조총에 활과 검 같은 냉병기였고, 그마저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죽창과 조선 낫 같은 조잡한 무기와 농기구를 들고 있었다.

이러한 무기들론 기관총에 대포까지 가지고 있는 일본군을 이기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처음부터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한 불리한 싸움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일본군과 싸우고자 했다.

조선 사람이라면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고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익현은 죽음이 두렵거나 가족이 걱정되는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말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이 자리의 모인 사람들은 전원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곳에 남아 무기를 드는 것을 선택했다.

이유 따위는 불필요했다.

내 나라, 내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 대체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비록 주는 것이 하나 없이 뺏어 가기만 한 얄밉고 미운 나라라 하더라도 이 나라 조선은 내 나라였다. 우리의 나라였다.

우리가 욕하고 뒤엎는다면 모를까 왜놈들이 마음대로 하게 둘 순 없었다.

나라가 망할 땐 망하더라도 순순히 그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싸우러 가세.”

“와아아아아아───!!”

최익현의 짧고도 묵직한 말과 함께 온 산야에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최초의 봉기, 최초의 의병이었다.

최익현의 봉기를 시작으로 조선 팔도 곳곳에서 조선인들이 궐기하기 시작했다.

의병을 일으키라는 최익현의 편지를 받은 유림들은 최익현처럼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이에 영향을 받은 신돌석을 비롯한 평민 의병장들도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본군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갑진의병(甲辰義兵).

1896년 을미의병(乙未義兵) 이후에 일어난 대규모의 의병 항쟁, 망할 땐 망하더라도 너희랑 같이 망하겠다는 대한제국 최후의 단말마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곧바로 바다를 건너 일본에도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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