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다시 러일전쟁으로
“……이 밤에 자네가 날 찾아올 줄이야. 위트부이.”
“독일인들은 자기들끼리 축제를 여느라 바쁘더군. 난 초대받지 못했고 말이야.”
“백인들이 그렇지.”
“그래도 남작이 미안하다면서 나와 우리 부족에게 많은 술을 선물로 주었네. 그중에서 몇 병 정도는 마하레로 자네와 나눠 마셔도 뭐라 안 하겠지.”
바터베르크 전투의 승전과 헤레로 반란의 종식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리던 밤.
헨드릭 위트부이는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자무엘 마하레로를 향해 맥주병을 건넸다.
마하레로는 병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이내 술병을 손으로 낚아챘다.
위트부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맥주병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마하레로가 말했다.
“그래. 소감이 어떤가. 모두의 경고를 무시하다 결국은 패배한 내 모습이.”
“전사답게 최선을 다해 싸우다 패배했을 뿐이네. 거기에 부끄러워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마하레로는 위트부이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여전한 친구다.
“자네와 나마족이 우리 헤레로족과 함께 싸웠다면 결과가 바뀌었을까?”
“글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물론 그때도 나는 최선을 다해 싸웠겠지만.”
“그래. 그렇겠지.”
마하레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맥주를 마셨다.
독일인들의 술은 여전히 소 오줌 같은 이상한 맛이었다.
헤레로족의 술이 그립다.
다시 입에 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 헤레로족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군.”
“죽진 않겠지. 그리고 조금은 처우가 나아질 테고. 독일인들도 머리가 있는 이상 조금은 무언가를 깨닫지 않겠는가?”
“달라져 봤자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그래 봤자 사막에 물을 뿌리는 것과 다름없겠지.”
위트부이는 마하레로의 씁쓸한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로이트바인 총독이 애를 쓴다고 한들 독일인 정착민들은 여전히 헤레로족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부족들을 경멸할 테니까.
사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백인이든, 흑인이든 다르지 않았다.
“난 오히려 자네가 어떻게 앞으로 할지 궁금하군.”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하나. 그저 명예롭게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지.”
“남작과 로이트바인 총독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던데. 자네를 순교자로 만들기 싫다는군. 회유해 볼 생각인가 봐.”
회유?
자무엘 마하레로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인제 와서 독일인들에게 붙으란 건가? 어이가 없군. 애초에 그들이 날 살려 주겠다고 해서 다른 독일인들이 이를 받아들이겠나. 분명 날 죽이라고 난리를 칠 게 뻔해.”
“미안하지만, 여기 반란을 일으키고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 자네 눈앞에 있네만.”
위트부이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마하레로는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독일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위트부이가 먼저였고, 그 기간도 마하레로보다도 훨씬 길었다.
헨드릭 위트부이는 하인리히 괴링이 총독일 때도 독일과 싸운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독일인들 밑에서 일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적어도 부족원들의 안전은 보장된다네. 게다가 살아는 있어야 다음이 있는 것 아니겠나.”
위트부이의 말에 마하레로는 고개를 숙이고 고민에 빠졌다.
만약 자신이 로이트바인의 회유를 거절한다면, 그때는 정말 처형되거나 최소한 남서아프리카에서 추방될 것이다.
사실 마하레로에게 있어 그건 딱히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독일인들은 마하레로 대신 말을 잘 듣는 자를 추장으로 세울 게 뻔했고, 헤레로족은 영원히 독일에 휘둘리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회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독일군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형제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
어느 쪽이든 마하레로가 쉽게 선택할 만한 게 아니었다.
“남작은 생각보다 잔인한 사람이군. 사람에게 이런 선택을 강요하다니.”
“고민이 생긴 얼굴이군.”
“그 고민을 가져온 게 자네잖는가.”
“뭐, 오늘은 일단 마시게. 밤은 길고, 생각할 시간도 많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한 잔을 위해 사는 것 아니겠나.”
위트부이가 웃으며 병을 높이 들자 마하레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프리카의 달은 언제나처럼 밝았다.
* * *
“독일 제국과 황제 폐하를 위하여!”
“위하여!”
마하레로와 위트부이가 감옥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독일인들은 총독부에서 승리를 자축하며 건배를 외쳤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웃고 떠드는 소리와 잔과 잔을 부딪치는 소리.
연회장 한쪽에선 군인들이 아가씨들과 함께 경쾌한 바이올린 연주에 몸을 맡기며 흥겹게 춤을 추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이 시끌벅적한 잔치를 안주 삼아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론, 잔 안에 담긴 것은 술이 아니라 그냥 오렌지 주스였다.
로이트바인 총독이나 다른 사람들이 진짜 술을 권할 때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직 미성년의 음주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했던 시대였기에 딱히 법적으로 문제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술을 입에 대는 것은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유교 정신이 허락하질 않았다.
‘어차피 술도 못하고.’
“남작님. 연회는 재미있게 즐기고 계십니까?”
전생 시절 내 한심한 주량과 이로 인한 추태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던 중 레토포어베크 대위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다른 군인들처럼 식민지 보호군 제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투박한 맥주잔이 들려 있었다.
나름대로 이 조촐한 파티를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조촐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왕족과 귀족들의 파티 기준이다.
그것에 비하면 이 축하연은 조금 재수 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솔직히 동네잔치 수준이었다.
“그럭저럭요. 술은 마시지 못해도 분위기로도 취할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하, 재미있는 말이네요. 그나저나 위트부이 추장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참 아쉽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희는 괜찮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대로 헨드릭 위트부이를 비롯한 나마족은 헤레로족과의 전투에서 독일군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축하연에 초대받지 못했다.
당장 내가 이곳에 있는 것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흑인인 헨드릭 위트부이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축하연은 어디까지나 독일인, 그리고 백인들만을 위한 자리였다.
“미안하단 뜻으로 부족원들과 함께 마시라고 개인적으로 술을 보냈습니다. 그들도 함께 싸운 전우니까요.”
“후후, 위트부이 추장이 좋아하겠군요.”
“그나저나 대위님께선 당분간 아프리카에 남게 되었다고요?”
“네. 로이트바인 총독님이 절 좋게 보신 모양이라서요.”
레토포어베크 대위가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원 역사에서도 레토포어베크는 꽤 오랫동안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 머물렀다.
트로타의 삽질로 헤레로족에 이어 나마족까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런 것이지만.
그리고 레토포어베크는 그 과정에서 나마족과 전투를 벌이던 중 한쪽 눈을 다치는 부상까지 입고 만다.
하지만 이 세계의 레토포어베크는 딱히 어디 다치지도 않았고, 헨드릭 위트부이를 위시한 나마족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삶과 생존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배우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시너지가 되어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라는 아프리카의 사자는 원 역사보다 더 큰 인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작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힌덴부르크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군인이었던 루덴도르프는 긴장이 풀렸는지 술에 잔뜩 취한 채 저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이러다 원 역사보다 쓸모없어질까 걱정이 된다.
‘어쨌든 레토포어베크쯤 되는 인물을 아프리카 전선 같은 대국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전장에서만 활약하게 두는 건 그야말로 인재의 낭비지.’
아프리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를 포함한 독일의 식민지에서도 가용한 전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야 하는 만큼 흑인 부대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들의 전장이 꼭 원 역사처럼 아프리카일 필요는 없었다.
프랑스도 세네갈 등지에서 징집한 흑인 병사들을 서부전선에 투입했고, 영국의 자치권을 주겠다는 약속에 인도인들 또한 자청하여 서부전선으로 향했다.
물론 프랑스는 아프리카 병사들을 총알받이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영국은 전쟁이 끝나자 입을 싹 닦았지만.
‘오히려 영국은 그놈의 혐성국 기질이 또 한 번 발동해서 롤래트 법을 통해 자신들의 인도 통치를 더욱 공고화하려고 했지.’
이 때문에 전후 영국에 뒤통수를 맞은 인도인들과 간디에 의해 인도의 독립운동 열풍이 강해졌고, 영국은 영국대로 인도의 독립운동을 살벌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는 영국의 인도 탄압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였다.
아무리 그래도 난 독일을 위해 싸운 아프리카인들에게 영국처럼 후안무치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남작님. 여기 계셨군요.”
“로이트바인 총독님.”
“승전 축하드립니다.”
“제가 한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지휘는 로이트바인 총독님이 다하셨는데요.”
“남작님이 계셨기에 헤레로족의 반란이 제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부드럽게 끝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외신들도 독일의 관대함에 놀랐다며 우리를 칭찬하는 중 아닙니까. 다 남작님 덕분입니다.”
독일의 이미지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레오폴드 2세와 벨기에에 대한 비난은 더 거세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당연하지만 미안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걔들은 욕을 더 먹어도 싸다.
“그럼, 이제 독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래야죠.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 생각보다 재미있게 돌아가는 모양인지라 본국에서도 빨리 돌아오라더군요.”
“아쉽군요. 그래도 남작님 같은 친구를 만나서 좋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루덴도르프 소령을 여기에 두고 갈 테니 뒷정리는 로이트바인 총독님께 맡기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로이트바인 총독과 웃으며 악수한 나는 전쟁이 한창인 머나먼 동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루덴도르프는 남서아프리카에 몇 달 더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쾅! 콰쾅!!
“돌격! 돌겨어어어억!!”
한편, 봄이 지나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음에도 압록강에선 여전히 고막을 찢는 포성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타다다다다다다────!!
“히, 히익!”
“거기서 뭘 하는 거냐. 노비타 일등병! 멈추지 말고 앞으로 계속 전진해!”
“타케시 오장님, 하, 하지만……!”
“자랑스러운 황군의 일원이라는 놈이 겁쟁이처럼 굴긴! 네 목숨은 네 것이 아니라 천황 폐하와 대일본제국의 것임을 잊었느냐?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일어나서 로스케 놈들의 참호로 달려 나가라!”
그러나 일본군 병사들은 지칠 줄 모르는 러시아군의 기관총 세례에 겁을 먹고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장교와 부사관들이 권총을 겨누며 참호에 숨어 움츠리고 있는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병사들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지워 내진 못했다.
치우지도 못한 채 사방에 널브러져 썩어 가고 있는 저 시체들만 보라.
러시아군의 기관총에 의해 대체 얼마나 많은 전우가 죽었는지 그들은 이미 그 숫자를 세는 것조차 포기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본국에서 화포를 있는 대로 공수해 오고, 병사들을 끊임없이 전선에 투입했지만, 여전히 일본군은 그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의 방어선은 빌어 처먹을 정도로 난공불락이었다.
포화를 뚫고 기껏 참호에 도달해도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날아오는 총알을 막기 위해 병사들의 손에 조잡한 철 방패를 들려 주고, 아군을 향해 포탄이 떨어지든 말든 계속 대포를 쏜 끝에 일본군은 러시아군 참호로 돌입하는 것에 몇 번 성공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그때마다 산탄총과 일본군 병사들은 배관총이라 부르는 흉악한 신병기로 일본군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일본군 병사들은 절망하고 자신들을 허무하게 죽게 만든 사령부를 저주했다.
“우리는 망했어. 망했다고!”
“큭큭……. 저긴 지옥으로 향하는 관문이야. 산 자가 저곳을 넘을 순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더는 못해! 우리를 로스케의 참호로 보내고 싶으면 어디 네놈들이 먼저 앞장서 봐!”
결국, 계속되는 공격에도 압록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자 일본군의 사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져만 갔다.
심지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을 계속 러시아군의 아가리로 밀어 넣는 장교들과 지휘관들의 행태에 분노가 쌓인 일부 병사들에 의한 항명 사태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아시아를 집어삼키려는 러시아 제국의 야욕을 저지하고 동아시아의 자주독립과 평화를 되찾겠다는 선전은 이미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이제 일본군 병사들은 대일본제국의 영광이고 천황 폐하의 자부심이고 뭐고 그저 살아남기를 신불에게 기도했다.
그저 압록강이란 이름의 삼도천에서 살아남아 가족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