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82화 (82/193)

82화 : 바터베르크 전투 (2)

“부족원들을 이끌고 오하마카리를 탈출한다.”

자무엘 마하레로가 그리 결정을 내리자 헤레로족 전사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결국 탈출이라니. 마음에 드는 결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전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부족민들도 죽을 것이다. 가족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가족들을 언급하는 마하레로의 말에 결국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사들에게도 가족은 소중했고,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현실은 더 냉혹했으니까.

결국, 헤레로족은 바터베르크에서 농성을 하려던 기존 계획을 포기하고, 독일군을 돌파하여 바터베르크를 탈출하는 것으로 작전을 바꿨다.

마하레로가 곧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북쪽에서 다가오는 독일군부터 막는다. 너희는 움직일 수 있는 부족의 남자들을 데리고 가서 바위와 돌, 그리고 나무로 협곡을 틀어막아라.”

“예. 추장!”

본래 바터베르크 산맥 사이에 난 협곡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북쪽으로 빠져나가기 위한 탈출로로 생각해 둔 길이지만 독일군이 그쪽으로 진격해 오는 이상, 배후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 길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사들이 부족의 남자들을 이끌고 서둘러 협곡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확인한 마하레로는 이내 시선을 북쪽에서 서쪽으로 옮겼다.

“너희는 서쪽으로 가 어떻게든 독일군의 시선을 끌어라.”

사실상 자살에 가까운 명령.

하지만 자신들의 죽음으로 부족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전사들은 별말 없이 마하레로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독일군의 신무기가 강력하다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가까이 접근하고 나서야 발사했다니, 최대한 거리를 두고 가축들을 끼고 싸우면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가축들을 말입니까?”

하지만 죽을 각오를 마친 전사들마저 부족의 생명줄인 가축을 방패로 써야 한다는 사실엔 착잡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하레로의 결심은 확고했다.

지금은 많은 것을 포기해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추장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남은 전사들과 부족원들을 데리고 남동쪽으로 향하겠다.”

“남동쪽이요?”

“하, 하지만 마하레로 추장! 그쪽으로 가면……!”

칼라하리(Kalahari).

나미비아와 보츠나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사막.

츠와나족의 말로 ‘물 없는 땅’이라는 이름답게 남아메리카의 아타카마 사막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이다.

헤레로족을 비롯한 나미비아의 부족들은 오마헤케라 부르는 칼라하리는 말라붙은 죽음의 땅.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한 사자조차 발을 딛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단단한 뼈조차 씹어먹는 악착같은 하이에나와 아프리카 들개만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곳이다.

그곳에 준비 없이 발을 잘못 디뎠다간 갈증에 허덕이다 사막을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는 헤레로족을 비롯한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그리고 독일인들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자무엘 마하레로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독일인들도 우리가 오마헤케로 탈출하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오히려 북쪽 아니면 서쪽으로 탈출하리라 생각해 그쪽에 병력을 집중하겠지.”

그렇다면 그 반대쪽은 그만큼 포위망이 헐거워질 것이다.

독일인들도 헤레로족이 설마 칼라하리 사막으로 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게다가 로이트바인 또한 아무런 준비 없이 오마헤케로 들어가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 독일군도 우릴 쉽사리 추격하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마헤케를 건너서 베추아날란드(보츠와나)로 간다.”

항복 여부를 논의하는 회의 때 마하레로가 말했던 것처럼 그곳의 추장들은 마하레로와 친분이 있을뿐더러 헤레로족에게도 동정적이었다.

그곳이라면 분명 안전할 것이다.

‘물론 희생이 많이 나오겠지.’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과정에서도, 사막을 건너는 과정에서도.

그러나 마하레로가 생각하기에 현 상황에서 최대한 많은 부족민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었다.

“물을 최대한 많이 챙겨라. 그리고 전사들은 날 따라와라!”

“예!”

자무엘 마하레로가 직접 총을 들고 앞장서자 헤레로 전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헤레로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독일군의 움직임 또한 바빠졌다.

* * *

“폴크만 부대에서 보고! 협곡이 막혀서 더 이상의 진격 불가합니다!”

“협곡이 막혔다고? 길을 뚫을 순 없나?”

“가능은 하지만, 최소 한두 시간은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후, 하는 수 없지. 즉시 북서쪽에서 산맥을 우회하고 있는 피들러 부대와 합류해서 그쪽으로 진군하라 해.”

“옛!”

로이트바인 총독의 명령에 전령이 경례를 올리자마자 다시 부대를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진격로 한 곳이 막혔군요.”

“괜찮소. 그 정도는 상정 내요. 게다가 길을 막는 건 헤레로족에게도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고.”

“하긴 헤레로족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소중한 탈출로 하나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아마 그들로서도 뼈를 깎는 결정이었겠지. 그렇다고 저 산을 기어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오.”

전령의 보고에 따라 지도에 표시된 부대 배치를 바꾸는 루덴도르프를 향해 로이트바인 총독이 말했다.

확실히 헤레로족이 바터베르크 고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저 산을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야 저 산은 어디 동네 뒷산 같은 게 아닌, 바위로 이루어진 깎아지는 수직 절벽이었으니까.

저곳을 아무런 장비 없이 맨손으로 기어올라 가는 건 전문 산악인이 와도 무리였다.

“데임링 부대에서 보고! 헤레로족과 교전 시작!”

“얼마나 되었나?”

“15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바테베르크 산을 바라보던 사이, 또 다른 전령이 나타나 외쳤다.

그나저나 15분이라. 말을 타고도 거리가 거리인지라 보고가 꽤 오래 걸린다.

‘이럴 때 무전기가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얼른 테슬라가 라디오를 완성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 기술을 더욱 개선해서 무전기 쪽으로도 활용할 테니까.

탕! 타탕! 탕!

교전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이 멀리서 총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나는 망원경을 들어 데임링 부대의 진격로인 서쪽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헤레로족이 잘 싸우고 있네요.”

그 말대로 헤레로족은 기관단총을 의식한 듯, 독일군 전열과 거리를 둔 채 자신들이 기르는 소까지 총알받이로 사용하며 독일군의 공세를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로이트바인 총독 또한 이를 보고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헤레로족이 작정하고 엄폐물로 소중한 가축들까지 동원했으니까요. 데임링이 꽤 고생하겠군요. 대포 몇 개를 돌려 포격으로 지원해야겠습니다.”

‘음?’

그렇게 전투를 계속 지켜보고 있을 때, 순간 내 머릿속에 자그마한 위화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자무엘 마하레로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군요.”

나는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로이트바인 총독에게 말했다.

내가 만난 자무엘 마하레로는 부하들의 뒤에 숨어 있을 타입이 아니었다.

특히 헤레로족의 사기가 흔들리는 지금 같은 상황이면 더더욱.

그는 분명 어디선가 지휘를 하고 있을 터였다.

‘절대로 마하레로를 놓쳐선 안 돼.’

그랬다간 전술적으론 승리해도 이곳에서 헤레로 반란을 끝낸다는 전략적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

그건 트로타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헉…… 헉……! 보, 보고! 자무엘 마하레로가 이끄는 헤레로 전사들이 남동쪽으로 돌파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니, 여긴 아프리카니까 사자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한 병사 하나가 경례도 올리지 못한 채 헉헉거리며 외쳤다.

어지간히 급히 달려온 모양이다.

로이트바인 총독도 그것을 알기에 병사를 탓하지 않고 수고했다며 물을 건넨 뒤, 지도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남동쪽이라면 오마헤케. 칼라하리 사막으로 가는 길이군요.”

칼라하리 사막이란 말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로이트바인 총독 대신 트로타가 지휘했던 바터베르크 전투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마하레로는 헤레로족이 독일군 추격대에 사살당하거나 칼라하리 사막에서 탈수로 사망하는 상황 속에서도 기어코 칼라하리를 건너 영국령 베추아날란드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엔 전공 욕심에 성급하게 굴다 일을 망친 트로타 대신 몇 달에 걸쳐 헤레로족 반란을 차근차근 진압해 온 로이트바인 총독이 있었고, 무엇보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레토포어베크 대위의 부대와 나마족 용병대를 예비대로 배치해 두길 잘했습니다. 만약 자무엘 마하레로와 헤레로족이 칼라하리 사막으로 들어갔다간 추격하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을 테니까요.”

“네. 마하레로도 깜짝 놀라겠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하레로가 있을 동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무엘 마하레로에겐 미안하지만, 헤레로 반란은 여기서 끝이다.

* * *

탕! 타탕! 탕! 탕! 타다다다다!!

“……독일군은 우리가 오마헤케로 향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가.”

“추장! 적이 너무 많습니…… 컥?!”

다급하게 마하레로를 향해 그리 외치던 헤레로족 전사가 날아온 흉탄에 맞고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자무엘 마하레로는 명령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허탈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헤레로족이 가축들을 독일군 진형으로 돌격시켜 진형을 흐트러트리고 수적 우세를 이용해 어떻게든 독일군을 돌파한 순간,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레토포어베크가 지휘하는 슈츠트루페 기병대와 나마족이었다.

헤레로족은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며 돌파를 시도했지만, 레토포어베크는 이에 기관총과 기관단총으로 맞섰다.

독일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헤레로족은 무력하게 쓰러졌고, 사실상 승기는 독일군 쪽으로 기울었다.

“마하레로!”

그때 앞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헨드릭 위트부이.

과거의 악감정을 잊고 독일에 맞서 함께 싸우자 호소했지만,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자.

그가 나마족과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자신을 향해 소리쳤다.

“전투는 이미 끝났다. 부족원들을 생각한다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라!”

“웃기지 마. 우린 너희 나마족처럼 백인 밑에서 개처럼 살 생각은 없어!”

헤레로족 전사 하나가 그리 외치며 창을 들고 위트부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창끝은 위트부이에게 닿지 못했다.

탕! 탕!

“위트부이 추장. 괜찮으십니까?”

“훌륭한 솜씨군. 레토포어베크 대위.”

헨드릭 위트부이가 권총으로 정확하게 헤레로족 전사를 맞춘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를 칭찬과 동시에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레토포어베크 대위는 백인 군인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자신들의 풍습과 전투 방식에도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배워 가기도 했고.

‘독일인들이 모두 대위나 그 남작 같았더라면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한때 그도 독일 제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했던 몸.

독일인 정착민들의 온갖 횡포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하지만 헨드릭 위트부이는 결국 자신의 부족원들을 위해 로이트바인 총독의 제안에 따라 무기를 내려놓고 독일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젠 자무엘 마하레로가 그의 부족원들을 위해 그리해야 할 때였다.

“항복하게. 마하레로.”

“…….”

“자네만 항복하면 피는 더 흐르지 않을 것이네. 남작이 그리 약속했네.”

헨드릭 위트부이의 말에 헤레로족이 싸움을 멈추고 자무엘 마하레로 만을 바라봤다.

총성이 사라진 초원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헤레로족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아프리카의 대지 위에서 자무엘 마하레로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툭!

그러곤 아직 식지 않은 자신의 총을 땅에 던졌다.

“……항복……하겠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추장의 항복에 헤레로족은 비통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무기를 내려놓았다.

여인들은 울음을 터트렸고, 전사들은 차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독일인들과 나마족에게 보이기 싫었는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마하레로가 항복했단 소식이 곧 바터베르크 전체에 퍼졌다.

독일군과 교전을 이어 나가던 헤레로족도 마하레로가 독일군에 포로 붙잡혔다는 말을 듣고 싸움을 포기했다.

바터베르크 전투의 끝.

그리고 헤레로 전쟁의 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지요? 루덴도르프 소령님.”

“……!”

그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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