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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81화 (81/193)

81화 : 바터베르크 전투 (1)

바터베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독일군은 로이트바인 총독의 명령에 따라 캠프를 꾸리고 바터베르크를 포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기저기서 말과 낙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나는 로이트바인 총독에게 레토포어베크와 헨드릭 위트부이, 그리고 루덴도르프와 함께 전장이 될 지형을 눈에 익힐 겸 이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물론, 내가 직접 나서지는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들 바쁘게 일하는데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엔 눈치가 좀 보였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쉬라고 만든 힐링 게임에서도 노동과 고생을 자처하는 한국인의 핏줄이 발동된 것이다.

“예? 저도 말입니까?”

한편 뒤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다 같이 정찰하러 가자는 말에 가기 싫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며 얼굴을 찡그리는 루덴도르프.

나도 솔직히 이 인간을 데려가기 싫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루덴도르프 소령님은 참모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직접 두 눈으로 전장을 살펴보고 파악해야죠.”

“아니, 그건 지도를 보면…….”

“지도만 믿고 정찰을 소홀히 했다가 큰일이 나면, 루덴도르프 소령님이 책임질 겁니까?”

이 시대 지도는 RTS 게임에 나오는 미니맵이 아니었다.

GPS도 없는 시대에 최소 20세기 초에서 19세기 중후반에 그려진 아프리카 지도가 정확하면 얼마나 정확하겠나?

“끄응……. 알겠습니다. 가면 될 것 아닙니까.”

내 논리정연한 말에 반박하지 못한 루덴도르프가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루덴도르프 정도 되는 참모가 이런 기초적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이 인간은 말년 병장처럼 그냥 귀찮아서 이러는 거다.

“남작님, 루덴도르프 소령과 사이가 안 좋으신 모양입니다?”

루덴도르프가 애꿎은 말단 병사에게 화를 내며 정찰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레토포어베크가 호기심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헨드릭 위트부이도 궁금했는지 왠지 모르게 흥미진진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다들 남의 인간관계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은 건지.

“융커지 않습니까. 저와 사이가 좋을 리가 만무하지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로이트바인 총독님도 융커지만, 남작님과 나름 친하지 않습니까.”

나를 좋게 봐주는 레토포어베크의 말은 정말 고맙지만, 여긴 나름대로 복잡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은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발더제 원수 덕분이다.

‘아니, 이참에 그 문제에 대해 확실히 끝을 봐야겠어.’

다만, 아무리 발더제가 날 죽이라고 칼을 들이대고 협박을 했대도, 루덴도르프가 생각이 있다면 날 정말 죽일 생각까진 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 둘의 악연은 둘째 치고 잘못하면 자신이 덤터기를 전부 뒤집어쓸 텐데, 발더제의 무엇을 믿고 일을 저지르겠나?

‘시연회 때라면 모를까, 죽기 일보 직전의 발더제가 루덴도르프의 앞날에 그리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루덴도르프가 남서아프리카 식민지로 온 이래 계속 심기가 불편한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를 역이용하면 어쩌면 에리히 루덴도르프라는 쓸 만한 인재 하나를 내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원 역사에서 루덴도르프가 제1차 세계대전 후반에 빌헬름 2세를 뒷방 늙은이로 만들고 군부독재를 이어 나가며 독일의 패망에 일조했다지만,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참모로서 능력은 출중한 편이었으니까.

게다가 인재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라 그를 써먹기는 해야 한다.

허튼짓을 못하게 목줄을 꽉 붙잡은 채 말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루덴도르프 스스로 자신의 목에 목줄을 차게 만들기에 딱 좋았다.

“루덴도르프 소령과 저 사이의 문제에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두 분께 도움을 구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도움이요?”

“예. 이참에 노예 하나 새로 장만하려고요.”

내 말에 뭔 소리냐는 듯 레토포어베크와 위트부이가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지금은 루덴도르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 그럼 슬슬 가실까요?”

앞서 말했듯이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은 전투가 우선이었다.

* * *

“남작님. 모든 부대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후. 드디어 이날이 왔군요.”

“심호흡하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남자라면 누구 할 것 없이 언젠가 겪게 될 일입니다. 남작님은 그저 그것이 남들보다 조금 빨랐을 뿐이지요.”

내 긴장을 풀어 주려는 로이트바인 총독의 듬직한 목소리에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침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지만 졸리지는 않았다.

그보단 원초적인 인간의 두려움과 극도의 긴장 속에 샘솟는 아드레날린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이 어지럽게 교차해 오히려 잠이 싹 달아난 상태였다.

곧 전장이 될 동트는 아프리카 초원을 눈으로 훑으며 명령을 내렸다.

“로이트바인 총독님. 공격을 시작하세요.”

“넷. 전원 지금부터 공세를 개시한다. 전군, 전진 앞으로!”

“전진 앞으로!”

로이트바인 총독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장교들과 부사관들이 명령을 복창했다.

곧 바터베르크 사방에서 깃발 신호와 함께 진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독일군이 온다!”

“전사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그리고 그 소리는 강 건너편에 목책을 세워 독일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헤레로족에게도 전해졌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빰빠라~빰빠빠라~빰빠라빰빠~!

“전진! 전진!”

“거기 발맞춰서 똑바로 걸어!”

척! 척! 척! 척!

일사불란한 발소리와 사방에서 헤레로족의 목을 조이듯 바터베르크 고원으로 전진하기 시작하는 독일군 전열.

엄격한 군기를 자랑하는 독일군답게 그 발걸음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강의 수위가 높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지금은 건기이니까요. 우기였다면 곤란해졌을 겁니다.”

로이트바인 총독의 말처럼 이 시기 나미비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남부는 건기였다.

덕분에 강의 수위는 별다른 도하 준비 없이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준 상태였다.

“슬슬 포격을 시작해야겠군요.”

그렇게 중얼거린 로이트바인 총독이 쌍안경에서 눈을 떼고 대기하던 포병대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포병대, 포격 개시. 목표는 전방의 헤레로족이다.”

“Jawohl(넷)! 포병대, 포격 준비!”

포병대 지휘관이 경례를 올리고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자 포병들이 서둘러 대포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곧 포병들이 대포가 발사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를 보냈고, 나와 로이트바인 총독은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Feuer!”

퍼엉!! 펑!

귀를 막았음에도 찡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야전포가 일제히 불꽃을 뿜어냈다.

쾅! 콰쾅!!

“으악!”

“목책이……!”

잠시 후 강 건너편은 순식간에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헤레로족이 기껏 세운 목책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것이 중화기와 대포가 부족한 슈츠트루페뿐만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본토에서 30문이 넘는 대포를 가져온 지금의 독일군엔 목책 따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와아아아아아~!!”

“정지! 정지!”

“헤레로족이 온다!”

포격이 계속되자 헤레로족은 결국 돌격을 택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잊으려는 듯 큰 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총과 더불어 전통적인 창과 방패로 무장한 채 빠른 속도로 독일군을 향해 접근했다.

“포격에 계속 맞느니 아예 아군 전열에 붙어 포탄을 피함과 동시에 수적 우세를 앞세워 볼 속셈이군요.”

“본토에서 그것들을 가져온 보람이 있었네요.”

내 말에 로이트바인 총독이 기대된다는 듯 씩 미소를 지었다.

한편 아군 부대들은 헤레로족의 접근에 일제히 사격 자세를 취했다.

“발사!”

타타타타탕──!!

장교들의 짧은 명령과 동시에 아군 병사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독일군의 일제사격에 선두에 서 있던 헤레로족 전사들이 피를 흘리며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이미 익숙한 일이라는 듯 헤레로족은 동료들의 죽음을 뒤로한 채 속도를 늦추지 않고 검은 파도처럼 독일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어엇!”

헤레로족의 번쩍거리는 창날이 아군 병사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기관단총 사수 앞으로!”

독일군은 헤레로족의 돌격에 맞서 기관단총을 꺼내 들었다.

저 기관단총들은 내가 베르크만 조병창에 부탁해 가져온 것들로, 러시아군에 시험 삼아 보낸 프로토타입들보다 훨씬 개량된 버전으로 기존의 것보다 더 빠르고 튼튼해진 상태였다.

타다다다다다다───!!

“?!”

곧 기관단총 특유의 날카로운 파열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기관단총은 헤레로족이 독일군에 가까이 접근하는 족족 그들에게 총알을 끊임없이 토해 냈고, 헤레로족은 처음 보는 신무기에 당황할 새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몇몇 헤레로족 전사들은 방패를 들어 총알을 막아 보려 했지만, 나무와 가죽으로 이루어진 헤레로족의 방패는 기관단총의 총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돌격!”

“와아아아아~!!”

독일군 장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재빨리 돌격 명령을 내렸고, 독일군 병사들은 총검을 들이밀며 혼란에 빠진 헤레로족 전열을 강타했다.

이어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고, 멀리서 보아도 불쾌함을 참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한 나는 목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우욱…….”

하지만 나는 그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솔직히 말해 몸을 돌려 캠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게 내가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두렵고 무서울지라도 참는 게 옳았다.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내 결정으로 인해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 것이다.

“총독님! 헤레로족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있네.”

“추격할까요?”

“아니, 추격은 금한다. 잘못했다간 포위망이 무너질 수도 있어. 전방 부대들엔 이대로 전열을 유지하면서 기존 계획대로 천천히 진격하라고 전해. 늑대 무리가 사슴을 사냥하듯이 말이야.”

“넷!”

부하가 경례를 올리자 로이트바인 총독은 고개를 돌려 작전계획을 총괄하고 있던 루덴도르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루덴도르프 소령. 다른 부대들이 출발한 지 얼마나 되었소?”

“28분 지났습니다. 차질이 없다면 곧 강을 건너 헤레로족 진영에 도착할 것입니다.”

루덴도르프가 시계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여기서 다른 부대들이란 헤레로족을 포위하기 위해 전방이 아닌 측면과 후면에서 각자 진격하고 있는 부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우린 그사이 바터베르크에 포격을 가해서 마하레로를 압박하도록 하지. 포병대, 헤레로족 진영으로 조준 변경해.”

로이트바인 총독의 명령에 대포들이 각도를 높여 헤레로족 진영을 조준했다.

퍼엉! 펑!

곧이어 커다란 폭음과 함께 산 아래 고지에 불꽃이 솟아올랐다.

* * *

쾅! 콰쾅!!

“꺄아아악──!”

“빨리 소들을 피신시켜. 소를 잃으면 우리 모두 끝장이야!”

“여기 사람이 깔렸어! 누가 좀 도와줘!”

독일군의 무자비한 포격이 시작되자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포탄에 헤레로족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십 문의 대포를 동원한 독일군의 포격은 지금껏 헤레로족이 겪어 보지 못했던 강력한 화력이었다.

그들은 그제야 본토 독일군이 기껏해야 슈츠트루페 수준이리란 자신들의 오판을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가 언제나 그렇듯 이미 늦은 뒤였다.

그나마 독일군의 사투를 경험한 전사들은 금방 정신을 차렸지만, 그 밖의 여자와 아이들 같은 일반 부족민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하며 혼란에 빠졌고, 굉음과 폭발에 놀라 사방에서 날뛰는 가축들은 그 혼란을 사방에 전염시켰다.

“모두 당황하지 마라. 함부로 움직이면 오히려 위험하다!”

독일군의 포격에 헤레로족 전체가 흔들리자 자무엘 마하레로가 포격이 내는 강렬한 소리에 지지 않겠다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마하레로 또한 전사와 민간인, 여성과 아이, 사람과 가축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 떨어지는 독일군의 눈먼 포탄에 침음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너무 크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부족원들의 비명과 가축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바로 전까지만 해도 독일군을 무찌르겠다는 투지로 가득 차 있던 전사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독일군의 화력은 마하레로와 헤레로족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했고, 심지어 독일군을 막기 위해 강가로 나간 이들마저 한 번도 보지 못한 무기에 패퇴해 도망쳐 온 상태.

이대로라면 헤레로족은 대지에 불꽃과 연기를 일으키는 강철의 비로 인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마하레로 추장! 북쪽에서 산길을 통해 독일군이 오고 있습니다!”

“서쪽과 동쪽에서도 독일군의 깃발이 보입니다!”

“추장, 남쪽의 독일군이 강을 건너고 있소!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이곳까지 밀어닥칠 것이오!”

그러나 문제는 독일군의 대포와 신무기만이 아니었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이 흔들리며 빈틈을 내보이는 것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북쪽, 서쪽, 동쪽, 남쪽 할 것 없이 진격이 가능한 모든 방향에서 사냥꾼이 사냥감을 몰 듯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독일군은 이곳에서 헤레로족을 완전히 섬멸시키든, 큰 피해를 주고 항복을 유도하든 해서 반란을 완전히 끝낼 생각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죽을 뿐이다!’

자신과 전사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었지만, 여자와 아이들을 비롯한 6만에 달하는 일반 부족민들은 달랐다.

헤레로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들만큼은 살려야만 했다.

“계획을 바꾼다.”

자무엘 마하레로가 비장한 얼굴로 부족원들에게 말했다.

그의 두 눈동자에는 저 멀리 붉게 빛나는 죽음의 땅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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