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78화 (78/193)

78화 : 헤레로 전쟁 (1)

1904년 4월 말.

극동에선 러일전쟁이 한참 진행 중인 와중에 나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식민지, 훗날 나미비아라 불리게 되는 땅에 있는 스바코프문트(Swakopmund) 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내 얼굴은 독일에서 아프리카로 오는 내내 펴질 줄 몰랐다.

첫째는 잊을 만하면 날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긋지긋한 뱃멀미요.

둘째는 러일전쟁 신경 써도 모자를 시간에 무더운 아프리카에서 헤레로족들이랑 티격태격하기 싫다는 솔직한 마음 때문이며.

셋째는 나와 마찬가지로 불만스러운 얼굴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지금 이 자리에, 그리고 하필이면 참모로서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었기에.

‘루덴도르프가 헤레로 전쟁에 참전했다는 말은 전혀 못 들은 것 같은데.’

차라리 아버지가 전 남서아프리카 식민지 총독이었던 괴링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더 현실적일 것이다.

분명 루덴도르프가 남서아프리카에 나와 같이 오게 된 것은 발더제의 음모 중 하나일 게 뻔했다.

루덴도르프는 지난번 기관단총 시연회 때 발더제의 하수인으로 바람잡이 노릇을 했으니까.

아마 아무도 안 보는 틈에 날 뒤에서 쏘라고 명령이라도 받은 것 아닐까?

물론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스 폰 초이 남작님?”

헤레로족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와 함께 독일을 떠나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온 독일군 병사들이 차례대로 수송선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독일의 식민지 보호 부대 슈츠트루페 장교로 보이는 사람들이 날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중 가장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나를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남서아프리카 식민지에 잘 오셨습니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총독이자 이곳의 슈츠트루페 총사령관직을 맡은 테오도어 로이트바인 대령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스 폰 초이 남작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참모인 루덴도르프 소령이고요.”

“……에리히 루덴도르프입니다.”

내가 먼저 자신을 소개한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루덴도르프가 떨떠름한 얼굴로 상급자인 로이트바인 총독에게 경례를 올렸다.

로이트바인 총독은 루덴도르프의 경례를 받아 준 다음 나에게 말했다.

“병력과 물자의 하선이 끝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 남작님께선 저와 함께 먼저 빈트후크로 가시죠.”

“이곳에서 빈트후크까지 거리가 250km가 넘는다고 알고 있는데, 말을 타고 갑니까?”

“하하, 몇 년 전까지는 그래야 했죠. 하지만 재작년에 스바코프문트와 빈트후크를 잇는 철도가 지어졌습니다. 물론 본국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만.”

“그것만 해도 어디입니까.”

나는 로이트바인 총독에게 그리 미소 지으면서 빈트후크에 대해 떠올렸다.

빈트후크(Windhoek).

훗날 나미비아의 수도로 남서아프리카 식민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21세기에도 독일식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또한 자무엘 마하레로와 헤레로족이 반란을 일으킨 오카한자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헤레로족의 반란이 빈트후크에까진 미치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진 어떻게든 버티고 있습니다. 이제 본국에서 지원군이 도착했으니 그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요.”

로이트바인 총독은 헤레로족과의 전투 때문에 그동안 속을 많이 썩였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자, 자세한 이야기는 빈트후크에 가서 하시죠. 모두가 남작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 그러도록 하죠.”

나는 로이트바인 총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에는 독일에서 보던 것보단 훨씬 낡았지만 어쨌든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은 없어 보이는 기차 한 대가 놓여 있었다.

“환상적이군.”

세상 모든 것이 불만스럽게 보이는 상태였던 루덴도르프가 타고 갈 기차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삐딱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기차를 안 타면 정말 말을 타고 며칠 동안 맹수가 가득 한 아프리카 초원을 횡단해야 했기에 루덴도르프는 입으론 불만을 내뱉으면서도 순순히 기차 위에 올라탔다.

꽤애애액───!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기차.

나는 객차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아프리카 초원을 지긋이 바라봤다.

저 멀리 한 무리의 얼룩말들이 작은 호수에서 물을 마시는 게 보인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

그러나 앞으로 있을 일들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기에 씁쓸했다.

* * *

“총원 경례!”

척!

기차를 타고도 다음날이 되어서야 빈트후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늘어선 슈츠트루페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아프리카 식민지 수준으로 도시라는 거지, 유럽과 비교하면 실제로는 큰 마을에 가까웠다.

“남서아프리카 식민지의 중심지답게 백인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독일인 정착민들입니까?”

“대부분은요. 영국인이나 보어인들도 꽤 있습니다. 남서아프리카 식민지는 영국령 남아프리카랑도 접하고 있으니까요.”

내 옆에서 말을 타고 길을 걷던 로이트바인 총독이 말했다.

나는 천천히 식민지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상당수는 이제야 헤레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수 있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에 굶주려 있었고, 몇몇은 내 피부색을 보자마자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서아프리카에 정착한 대다수의 독일인은 아랫동네에 사는 보어인들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아프리카란 땅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인종차별에 절어 있는 상태인 모양이었다.

‘헤레로족이 괜히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지.’

독일인 정착민들은 헤레로족을 비롯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결코 같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헤레로족의 반란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참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들이나 다름없다.

나는 독일인 정착민들을 짜게 식은 눈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로이트바인 총독과 함께 총독부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님.”

총독부에 도착하자 식민지 관료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빈트후크에 와 있던 모양인지 본국에서 온 독일인 장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은 나를 향해 공손한 태도로 경례를 올리거나 인사를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빌헬름 2세가 직접 임명한 반란 진압 총책임자라는 명함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나를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곧 나를 임명한 카이저를 모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또 모르겠지만.

뭐, 이유가 어떻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 준 뒤, 짐을 푸는 것은 사용인들에게 맡기고 곧바로 장교들과 회의실로 향했다.

물론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군사 회의에 끌려가게 된 루덴도르프는 소리 없이 나에게 항의를 보냈지만, 루덴도르프의 기분 따위 내 알 바 아니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헤레로 반란을 끝내고 독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 다들 앉으시죠.”

내가 상석에 앉으며 말하자 장교들과 식민지 관리들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물론 내가 자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자도 있었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당자 나를 제외한 이 식민지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라 할 수 있는 로이트바인 총독도 군말 없이 내 옆에 앉았는데, 그치들이 나에게 불만이 있다고 해서 뭘 어쩔 수 있겠나?

어쨌든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나는 좌중을 눈으로 쭉 훑어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저와 황제 폐하께서 제게 내리신 직책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은 없을 테니, 자기소개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로이트바인 총독님, 전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일단 헤레로족은 오카한자와 오마루루 등 점령했던 도시에서 물러나 북쪽의 바터베르크(Waterberg) 고원에 집결해 있는 상태입니다.”

바터베르크.

나미비아 원주민들은 오하마카리(Ohamakari)라 부르는 곳으로 원 역사에서 헤레로 전쟁의 전환점이 된 바터베르크(Battle of Waterberg) 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다만, 헤레로족이 물러났다고 해서 그 지역의 반란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닙니다. 헤레로족이 반란을 일으킨 영향으로 온동가(Ondonga) 왕국을 비롯한 북부 부족들 또한 제각기 독일을 향해 무기를 들기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될 동안 슈츠트루페는 뭘 하고 있던 겁니까?”

“우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도 병력도 부족한 상태요. 소령. 또한 남서아프리카 식민지는 매우 넓은 곳이고. 우리가 괜히 본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겠소?”

루덴도르프의 빈정거림 섞인 말에 로이트바인 총독이 화를 내긴커녕 한숨 쉬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 아저씨는 언제까지 대놓고 뾰로통한 얼굴로 있을 건지.

아무래도 우리 루덴도르프 씨는 나 때문에 아프리카까지 온 게 여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게다가 로이트바인 총독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남서아프리카에 주둔 중인 식민지 보호 부대 슈츠트루페는 고작해야 2,000명 정도였다.

이들을 돕기 위해 해군에서도 해병대를 비롯한 지원군을 보냈지만, 그들 또한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마라헤로의 헤레로족은 약 8만 명에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전사들만 따져도 최소 5,000명 사이에 최대 7,000명이었고, 아프리카 초원 곳곳에서 게릴라전으로 슈츠트루페를 괴롭혔다.

슈츠트루페가 그동안 헤레로족을 진압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독일군은 본토에서 온 병력을 포함해서 1만이 넘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남서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원주민 반란에 이 정도의 대규모 군대가 파견된 것은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던 만큼, 지금 헤레로족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헤레로족과 이야기를 나누기엔 딱 좋은 타이밍이군요.”

“자무엘 마하레로에게 항복을 제안할 생각이십니까?”

“예.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이는데, 혹시 이의 있는 분 있으십니까?”

웅성웅성

내 말에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로이트바인 총독은 반색하며 바로 내 생각에 찬성했지만, 그를 제외한 사람들은 헤레로족과 대화하겠다는 내 생각을 그리 반기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특히 식민지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본토에서 온 장교들이 문제였다.

“남작님. 과연 헤레로 그 야만인 놈들이 순순히 항복하란다고 해서 항복하겠습니까?”

“애초에 반란군 놈들에게 그런 자비를 베풀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냥 군대로 밀어 버리시죠.”

“물론 필요하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헤레로족의 상황을 직접 두 눈으로 살필 겸 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눠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직접 적진에 가서 그들의 동태를 살펴보겠다고 말하자 반대의 목소리가 꽤 줄어들었다.

이들도 군인인 만큼 정찰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헤레로족과의 회담은 좋은 명분이었으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그동안 만일에 대비해 헤레로족을 공격할 준비를 해 주십시오.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면 본보기를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내 말에 장교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다들 왜 이렇게 피를 못 봐서 안달인 건지.

“그럼 남작님. 저와 함께 바터베르크로 가시죠. 루덴도르프 소령은 어쩌겠소?”

“전 이곳에 남아 다른 장교들과 함께 작전 계획을 손보겠습니다.”

나를 따라서 반란군 진영까지 가는 게 싫었던 모양인지 루덴도르프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 보는 얼굴의 다른 장교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럼 제가 남작님과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저야 괜찮습니다만 당신은……?”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Paul Emil von Lettow-Vorbeck) 대위라고 합니다.”

레토포어베크.

그 이름 여섯 자를 듣자마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물론, 그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는 제2차 세계대전보다 마이너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아프리카 전선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장에서 활약한 인물이니까.

하지만 레토포어베크는 30만 명에 달하는 협상국 군대를 상대로 3천의 독일군과 1만의 흑인 부대, 아스카리를 이끌며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게릴라전으로 협상국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아프리카의 사자(Der Löwe von Afrika), 독일군의 숨겨진 명장이다.

‘어찌 보면 사막의 여우, 롬멜의 대선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롬멜은 끝내 패배해서 아프리카를 떠나야 했지만, 레토포어베크는 독일 제국이 항복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후 독일 제국에서 레토포어베크의 위상은 드높았고, 그 히틀러와 나치조차 레토포어베크가 자신들의 영입 제안을 대놓고 거절했음에도 그를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탐나네.’

그가 이 시기에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 파견되어 헤레로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니 더 놀라웠다.

동시에 내 사람으로 삼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레토포어베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검증된 뛰어난 명장.

게다가 흑인 병사들을 인간적으로 대해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격자이기도 했다.

다만 헤레로 전쟁 때는 누가 훗날 게릴라 전문가가 되는 사람 아니랄까 봐, 반란의 빠른 종결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을 막기 위해 트로타의 초토화 전술에 찬성한 흑역사도 있었지다.

물론, 이번에는 학살 자체가 없을 예정이니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좋습니다. 레토포어베크 대위. 그럼 함께 가시죠.”

레토포어베크와 친분을 쌓을 좋은 기회다.

S급 인재는 놓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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