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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76화 (76/193)

76화 : 압록강 전투 (1)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뤼순항과 제물포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선들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해졌을 때.

니콜라이 2세와 러시아 귀족들은 일본이 그럴 리가 없다며 현실을 부정하던 원 역사보다 달리 상당히 침착한 모습으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인리히와 한스 폰 초이 남작의 말이 맞았다. 일본이 기어코 우리 러시아 제국에 독니를 드러냈구나!”

그렇다고 차르가 분노를 터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러시아 제국은 독일의 군사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미리 준비해 온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쟁장관 쿠로파트킨이 극동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극동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쿠로파트킨은 극동에 오자마자 짐을 풀기도 전에 방어 계획부터 준비했다.

물론, 이 와중에 극동 총독으로 부임한 알렉세예프 제독이 은근히 쿠로파트킨의 지휘권을 욕심내는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쿠로파트킨은 탐욕스럽고 무능해 빠진 알렉세예프 제독에게 지휘권을 넘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쿠로파트킨 또한 비테와 마찬가지로 알렉세예프 제독을 비롯한 베조브라조프 파벌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극동 러시아군을 총괄하게 된 쿠로파트킨은 일본군에 맞설 준비를 했다.

쿠로파트킨의 목표는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는 것.

그리고 그의 손엔 MG99를 비롯한 독일제 무기들과 윤형 철조망이라는 신기한 모양의 방어구조물, 더불어 독일에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극동으로 잔뜩 파견한 독일 관전 무관단이 있었다.

슐리펜 참모총장에게 러시아군이 절대 무너지지 않게 도우라고 명령받은 독일인 장교들은 쿠로파트킨에게 참호를 파고 지뢰를 매설해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하라 조언했다.

아무리 우수한 독일제 무기를 손에 쥐여 주었다고 한들, 독일의 전쟁 기계들이 보기에 극동 러시아군의 상태로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함부로 공격에 나섰다간 러시아군이 일본군을 격퇴할 확률보다 아까운 무기들을 날려 먹은 채 일본군에 박살이 날 확률이 더 높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독일인 관전 무관들은 러시아군 장교들을 향해 괜히 반격할 생각은 집어치우고 방어에나 집중하라고 말했다.

물론 러시아 장교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독일인 장교들의 오만함에 발끈했지만, 쿠로파트킨은 순순히 독일 관전 무관단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원 역사에서 러일전쟁의 패배에 일조할 정도로 과감하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던 쿠로파트킨 또한 괜히 위험한 길을 가는 것보단 훨씬 안전한 선택지인 방어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문제는 과연 어디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할까였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한반도는 산과 강이 많은 천혜의 요새지대였다.

그곳에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일본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쿠로파트킨에겐 아쉽게도 한반도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유는 정치적, 그리고 외교적 문제 때문이었다.

한반도에 대규모 러시아군이 주둔하며 방어선을 건설하는 것을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용납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쿠로파트킨의 시선이 옮겨 간 곳은 한반도와 만주의 경계선인 압록강 하류에 위치한 의주(義州)였다.

의주는 오랫동안 중국과 조선을 잇는 교역 거점으로 활용되어 왔고, 일본군 또한 청일전쟁 당시 의주를 거쳐 만주로 진입했다.

그렇기에 쿠로파트킨은 일본군의 최우선 목표가 청일전쟁 때처럼 뤼순과 봉천인 이상 그들의 진격로 역시 청일전쟁 때와 그리 다르진 않으리라 예측했다.

“의주에 방어선을 건설하는 것은…… 아니, 잘못하면 압록강을 등지고 싸우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보급에도 상당한 차질이 있을 테고.”

단순한 지연 작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압록강을 등지고 의주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쿠로파트킨은 의주 방어를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 대신 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안둥(安東, 오늘날의 단둥)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 뤼순으로 가든, 봉천으로 가든 반드시 이곳 안둥을 지나야만 했다.

또한 안둥에 방어선을 구축하면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해 다롄 방면을 지키고 있는 남산과 진저우 일대의 러시아군 방어선과 연계하기도 쉬웠다.

“그럼 제군들, 모두 삽을 들게나.”

그렇게 참호를 파고 방어선을 건설하라는 쿠로파트킨의 명령에 따라 극동 러시아군은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아 가며 얼어붙은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독일인들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끔찍한 찬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따뜻한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대다수가 시베리아 출신이었던 극동 러시아군에 이 정도 추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러시아군의 참호는 점점 넓어져 거미줄을 만드는 것처럼 안둥 일대를 침식해 갔다.

그리고 각각의 참호와 보루에 윤형 철조망과 지뢰, 그리고 기관총이 대량으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천막에서 나온 독일 관전 무관들은 모포를 온몸에 두른 채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참호 자체는 오래전부터 공성전 등에 사용되었기에 생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방식의 대규모 참호 방어전은 이들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군인이라면 두근거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온 4월 하순.

척! 척! 척! 척!

구로키 다메모토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육군 제1군이 드디어 의주에 도착했다.

* * *

“러시아군이 보이질 않는군.”

의주에 도착한 구로키 사령관은 러시아군의 러 자도 찾아볼 수 없는 의주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러시아군도 자신들이 이곳 의주로 오리란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구로키 중장은 의주에 대규모 러시아 방어 병력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의주를 그냥 포기하기로 한 모양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사령관 각하.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압록강 건너편 안둥 일대에 방어선을 편 모양입니다.”

“안둥? 일청전쟁 때 청나라군처럼 말인가?”

그땐 일본군이 청나라군에게 압승을 거뒀다.

청나라군은 압록강을 끼고 16km에 달하는 방어선과 100개가 넘는 보루를 건설해 일본군을 막을 생각이었지만, 일본군은 배다리를 이용해 순식간에 압록강을 도하 했고, 전투가 시작된 지 3시간 만에 청나라군을 격퇴했다.

“다만, 러시아군의 방어선은 강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언덕에 가려져 있어 이쪽에선 제대로 된 관찰이 불가능하다는군요. 조선인 어부로 위장해 강을 건너 정찰을 시도해 보기도 했는데, 러시아 초병들이 자신들을 발견하자마자 총을 쏴서 어쩔 수 물러났다고 합니다.”

“흠. 적 총사령관 쿠로파트킨이 직접 나섰다더니 역시 경계가 삼엄한 모양이군.”

그러나 아무리 극동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상대라 할지라도 승산은 있었다.

구로키 중장이 이끄는 제1군의 병력은 거의 4만 3천 명에 달했지만, 첩보에 의하면 적 총사령관 쿠로파트킨의 병력은 2만 5천 명에 불과했다.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고, 못 이길 것도 없는 싸움이었다.

“압록강을 건널 준비를 해야겠군.”

“선봉은 어느 사단으로 하시겠습니까?”

제1군 참모장 후지이 시게타(藤井茂太) 소장의 말에 구로키 중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결정을 내렸다는 듯 후지이 참모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12사단으로 하지.”

“이노우에 중장이 좋아하겠군요.”

한일의정서 문제로 하야시 곤스케 공사와 함께 고종을 압박하기도 했던 이노우에 히카루 중장이 지휘하는 호쿠부큐슈(北部九州) 12사단.

12사단이라면 검(劍)이라는 사단의 약칭답게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무자비하게 베어 넘길 것이다.

“전군 도하하라!”

“와아아아~!!”

그렇게 러시아군 방어선에 대한 공격이 결정되고 며칠이 지난 후.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일사불란하고 신속하게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강을 건너는 도중 러시아군이 공격해 오진 않을까 긴장했지만, 러시아군은 어째서인지 공격은커녕 여전히 그 어떠한 행동도 보이질 않았다.

“러시아 함대도 뤼순항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하고 있다더니, 러시아 육군도 그건 마찬가지인 모양이군.”

병사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온 이노우에 중장이 그리 중얼거렸다.

이러다 러시아군의 별명이 거북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노우에 중장은 병사들에게 진지를 건설하라고 말한 뒤, 러시아군이 자리 잡은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공격 전에 러시아군 방어선을 정찰하고 싶은데 가능한가?”

“저격수가 돌아다닌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저격수란 말에 이노우에 사단장은 혀를 찼다.

이미 남북전쟁 시대에도 망원조준경을 사용하는 저격수들이 존재했고, 극동 러시아군 또한 사격 실력만큼은 뛰어난 시베리아 출신 사냥꾼들이 많았던 만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것이 러시아군의 허장성세가 아니었으면 좋겠군. 공을 세우지 못할 테니.”

기껏 일본 육군 최초로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일 명예로운 선봉 자리를 얻어 냈다.

잘하면 적의 총사령관을 사로잡아 이대로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사실 적 방어선이 빈집이라면 허무한 것을 넘어 적 총사령관을 향해 저주를 퍼부어도 모자를 일이다.

“후쿠오카, 구마모토, 오이타, 나가사키, 그리고 사가의 아들들이여!”

그러니 부디 러시아군이 제대로 있기를 바라며 이노우에 사단장은 허리춤에서 군도를 뽑아 들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다. 황국의 영광스러운 첫 선봉답게 적을 당당히 무찌르고, 우리 선배들처럼 저 드넓은 만주 벌판으로 나아가자!”

“와아아아아~!”

“12사단! 전진!”

빰빠밤 빰빠바밤~!!!

나팔 신호와 함께 12사단이 러시아 방어선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러시아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며 용감히 나아갔다.

“어?”

그러나 어떠한 저항도 없이 언덕을 넘는 순간, 그들은 보았다.

“칙쇼……! 저게 대체 뭐야?!”

언덕 아래에 펼쳐져 있는 러시아군의 거대한 참호선을.

참호선은 마치 들어가자마자 길을 잃을 것 같은 미로의 모습이었던지라 일본군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기가 질렸다.

빰빠밤! 빠바바밤!!

그러나 일본군 병사들은 이내 귀에 울려 퍼지는 돌격 준비 나팔 신호에 정신을 차리곤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적의 방어선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다.

“덴노 헤이카…….”

자신들은 저 미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일본제국과 천황 폐하를 위해서.

“반자이이이이이이이이───!!”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장교들이 군도와 권총을 빼 들고 만세를 부르짖으며 앞으로 뛰쳐나가자 일본 육군 12사단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펑! 펑펑! 펑!

그와 동시에 일본군의 아리사카(有坂) 31년식 속사포가 러시아군의 진지를 향해 포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라고 일본군의 포격에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обстре́л(발포)!”

퍼엉! 펑!

러시아군 포진지에서 3인치 야전포와 6인치 야전포들이 맹렬하게 불꽃을 뿜기 시작했다.

포탄은 일본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일본군 전열에 계속 구멍을 냈지만, 일본군은 계속해서 러시아군 참호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보는 특이한 모양의 구조물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름 아닌 윤형 철조망이었다.

“젠장, 이거 뭐야?!”

“으악! 몸, 몸에서 안 떨어져!!”

“누가 좀 도와줘!”

앞장서서 돌격하던 일본군 병사들이 멈추지 못하고 뒷사람에게 밀려 그대로 철조망에 얽히고설켰다.

윤형 철조망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움직일수록 철조망이 들러붙는 바람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동료들의 모습에 일본군 병사들은 철조망을 총검으로 잘라 보려고도 하고, 아예 장갑 낀 손으로 빼 보려고도 해 봤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러시아군은 독일 관전 무관단이 계속 잔소리를 한 보람이 있다는 듯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으앜?!”

“컥!!”

러시아군 참호에서 독일제 기관총이 무자비하게 총알을 쏟아 내며 일본군 병사들을 갈아 버리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납의 폭풍에 일본군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걸레짝이 되어 쓰러져만 갔다.

“젠장, 젠장, 젠장! 당장 여기서 후퇴해야 해!”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방패 삼아 몸을 숨긴 장교 하나가 그리 소리쳤다.

생각보다 러시아군의 방어가 장난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전부 죽는다.

일단 후퇴해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공격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멈추지 마라! 계속해서 밀어붙여라!]

장교의 이성은 끊임없이 그리 외쳤지만, 통신병이 벌벌 떨며 건넨 수화기에서 들려온 이노우에 사단장의 명령은 공격.

계속해서 러시아군 방어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장교는 사단장의 명령에 피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전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에겐 애석하게도 전투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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