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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75화 (75/193)

75화 : 시작된 러일전쟁 (2)

“이놈들! 이 손 놓지 못할까!”

며칠 후.

이용익 그 자신도 이미 짐작은 했던 대로 일본은 메이지 천황의 인가를 받아 이용익을 납치해 일본으로 압송했다.

물론 이용익은 그 전에 자신의 역할을 다한 터라 강제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말이다.

“이곳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하야시 공사님.”

이후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5촌 조카. 그리고 전 주일 공사이자 그리고 현재는 외부대신 서리였던 이지용(李址鎔)은 단돈 1만 엔에 일본에 영혼을 팔고 대한제국 대표로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그리곤 밝은 얼굴로 하야시 곤스케 공사와 화기애애하게 악수를 했다.

훗날 을사오적 중 하나로서 을사늑약 체결에도 참여하는 이지용에게 조선의 왕족이란 긍지는 이미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일본군은 대한제국의 모든 영토를 자신들의 전략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한제국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경의선과 경부선 등 철도부설권 또한 손에 넣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조선인들이 이를 반길 리 없었다.

한일의정서의 내용인 관보에 실려 조선 팔도로 퍼지자 조선인들은 말 그대로 폭발했다.

“종친이란 놈이 이딴 말도 안 되는 조약에 목숨을 바쳐 왜장과 함께 폭사하지 못할망정 순순히 왜놈들이 시키는 대로 이름 석 자를 적다니. 태조대왕을 비롯한 열성조들께 부끄럽지도 않은가!”

“고작 돈 몇 푼에 일본의 개가 된 매국노 이지용은 나가 뒈져라!”

“조정과 황제는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대체 어디서 뭘 하는가!!”

조선인들은 한일의정서에 반대하지 않은 조정을 비난하고 일본에 매수되어 한일의정서에 서명한 이지용을 매국노라 규탄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이지용을 죽이기 위해 그의 집에 폭탄을 던졌다.

“면암 대감! 어째서 움직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 유림이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게. 왜인들은 조만간 틈을 보일 것이야. 우리가 일어서야 할 때는 바로 그때일세.”

물론 최익현처럼 인내심을 발휘하며 때를 기다리는 자도 있었다.

어쨌든 일본을 향한 조선인들의 반감과 분노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고, 이에 대한 일본의 대처는 참 일본스러웠다.

탕! 타탕!

“조선인들은 일한 우호를 해치는 불법 집회를 지금 당장 해산하라! 그렇지 않으면 폭동으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진압하겠다!!”

대규모 군대를 동원한 일본의 무력 시위에 조선인들의 분노는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억지로나마 진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배후의 우환을 제거했다 생각한 일본군은 이제 고개를 북쪽으로 돌렸다.

“제군들, 드디어 황국의 힘을 만천하에 떨칠 때가 다가왔다. 전군, 진군하라!”

척! 척! 척! 척!

구로키 다메모토(黒木為楨)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육군 제1군은 한성을 떠나 의주, 그리고 압록강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청일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 연합함대는 뤼순항 해전 이후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하고 황해의 제해권을 잡기 위해 어떻게든 뤼순항에 틀어박힌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섬멸 또는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2차전에서도 일본 연합함대는 또다시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섬멸에 실패했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탈출엔 실패했지만, 뤼순항의 해안포와 손상을 입어 항구로 퇴각한 함선들의 포격 지원을 받아 가며 어떻게든 일본 함대로부터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당연하게도 무슨 수를 써서든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제거해야 했던 도고 제독과 일본 연합함대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렇게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티던 사이, 러시아 해군에서 가장 유능한 명제독이었던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Степа́н О́сипович Мака́ров) 제독이 뤼순항에 도착했다.

“도고 제독과 일본 연합함대가 안달이 나도 제대로 났군.”

마카로프 제독은 자신이 도착하기 전, 뤼순항을 둘러싼 일본 연합함대와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교전 보고서를 확인하며 그리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태평양 함대의 기함인 페트로파블롭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를 타고 감히 러시아 제국의 뒤통수를 후린 일본 연합함대를 응징하러 나가고 싶었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게 박살 났다는 정도만 알고 있는 한스의 착각에 더해 일부러 러시아군의 약함을 과장되게 말했던 것과 달리,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절대 약한 함대가 아니었다.

태평양 함대는 순양함과 구축함 전력이 일본 해군보다 부족할지언정 러시아 제국에서도 나름 최신형에 속하는 7척의 전함이 배치되어 있었기에, 전함 전력만큼은 일본 연합함대와 비등비등했다.

다만 잇따른 불운과 소극적인 지휘관들, 그리고 러시아 해군의 고질병인 승조원들의 낮은 수준과 떨어지는 사기로 인해 원 역사에선 제대로 힘을 써 보지도 못하고 일본 연합함대에게 괴멸당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마카로프 제독은 일본 함대와 충분히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마카로프 제독에겐 본국에서 받은 명령이 있었다.

그 명령의 내용은 전쟁의 향방은 육지에서 판가름 날 테니 마카로프 제독 자신은 괜히 나서서 함선들을 날려 먹지 말고 태평양 함대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라는 것이었다.

본국이 어째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독일 제국으로부터의 군사 지원.

독일인들은 러시아 제국에 무기와 탄약,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지원 품목을 헐값에 넘기면서 요새와 참호를 최대한 이용해 방어전을 펼치라고 조언했다.

‘당장 독일 제국에서 파견한 관전 장교들이 지금도 은밀히 우리에게 잔소리하는 중이지.’

그 모습이 꼭 재수 없는 시어머니 같아 마카로프 제독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며 항구에 틀어박혀 있는 것 또한 성미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마카로프 제독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일본 연합함대를 방해할 수 있는 수단은 많았다.

“부관. 함장들을 소집하게.”

마카로프 제독은 읽고 있던 ‘불멸의 리 제독’을 덮고 짓궂은 표정으로 명령했다.

부디 일본 해군을 섬멸했던 리 제독의 가호가 자신들을 돕길 바라면서.

* * *

“제독님! 러시아 함대가 뤼순항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전 함대 공격 태세를 갖춰라!”

“하잇!”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러시아 함대가 드디어 항구에서 나왔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의 얼굴은 적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활짝 웃음을 짓고 있었다.

초전과 재전 이후 한 달이 지나도 항구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드디어 움직였다.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인가.

‘마카로프 제독의 부임이 저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킨 모양이군.’

도고 헤이하치로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러시아 제국 해군의 전설, 스테판 마카로프.

그의 부임으로 사기가 오른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이번에야말로 연합함대를 뤼순항에서 쫓아낼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다!’

일본 연합함대의 제1목표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키고 뤼순을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정작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초반을 제외하고는 도고 제독의 함대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왔는데도,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보고 있는 제독이 답답할 정도로 계속 뤼순항에 틀어박힌 채 야음을 틈타 뤼순 앞바다에 깔짝깔짝 기뢰나 부설할 뿐이었다.

결국 도고 제독은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나오지 않는다면 아예 그 안에 가둬 버리겠다 마음먹고 시멘트를 가득 채운 낡은 화물선을 침몰시켜 뤼순항 봉쇄를 시도했지만, 하늘은 이번에도 도고 제독과 일본을 돕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화물선이 너무 깊이 가라앉아 버리는 바람에 봉쇄에 실패한 것이다.

결국 도고 제독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봉쇄를 시도하려 했다.

그러던 사이,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드디어 제 발로 항구에서 나온 것이다.

제발 나와서 싸워 달라는 심정이었던 일본 연합함대가 환성을 지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섬멸한다! 모두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총력을 다하라!”

“옛! 제독님!”

도고 제독의 명령에 화답하듯 일본 연합함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일본 함선들은 러시아 군함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언제든 발포할 준비를 마쳤다.

“?????”

그러나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그런 일본 연합함대의 불타는 투지를 비웃듯 일본 전함의 사정거리에 닿기 바로 직전, 선수를 돌려 다시 뤼순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저저……!!”

그리고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도고 제독은 그대로 화를 표출했다.

“당장 쫓아! 적 함대가 뤼순항으로 도망치기 전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혀야 한다!”

“네, 넷!”

도고 제독의 다급한 명령에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三笠)에 추격기가 오르고, 일본 연합함대는 싸워 보지도 않고 그대로 항구로 돌아가는 러시아 함대를 서둘러 쫓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가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전 포대 사격 개시!”

펑! 퍼펑! 펑!

그러나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따라잡으려는 순간, 뤼순항을 지키는 해안포들이 일본 함선들을 향해 일제히 불꽃을 뿜었다.

일본 군함들의 바로 앞에 굉음과 함께 커다란 물보라가 일었고, 이대로 귀중한 군함에 손상을 입힐 수 없었던 도고 제독은 부들부들 떨며 후퇴를 명령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어제와 똑같은 방법으로 일본 연합함대를 농락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으아아아아!!”

도고 제독은 러시아 해군에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주가 넘도록 농락만 당하자 결국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트렸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항상 일본과 결전을 벌일 것처럼 비장하게 항구에 나와선 일본 함대가 접근하면 얌체처럼 항구로 되돌아갔다.

게다가 몇 번이나 호구처럼 당하진 않겠다는 듯, 일본 함대가 그들을 아예 무시하면 그때는 진짜로 공격을 가하거나 아예 포위망을 빠져나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당황한 일본 연합함대가 반격하려 하면 또다시 선수를 돌려 항구로 도망쳤다.

도고 제독과 연합함대로선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끝내 장갑순양함 이와테(磐手)가 못 참고 돌격하다가 기뢰에 충돌하는 바람에 심한 손상을 입고 말았지.’

결국 이와테는 전열을 이탈해 수리를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어이없게 소중한 장갑순양함 하나를 잃고 만 도고 제독은 초췌해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카로프 제독은 그 명성이 허명이 아니라는 듯 과연 짜증 날 정도로 유능한 자였다.

그는 일본 연합함대에 반격하겠다는 생각을 아예 포기하고 그냥 뤼순항에서 버티며 자신과 연합함대를 괴롭히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도고 제독으로서는 마카로프 제독에게 놀아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 연합함대는 결코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내버려 둘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아직은 마카로프 제독과 태평양 함대가 전력을 온존하고 있었기에 그럴 기색은 전혀 없다지만, 혹시라도 러시아 제국이 본국의 함대를 극동으로 출격시키기라도 한다면 연합함대로선 그야말로 앞엔 사자요, 뒤엔 호랑이를 두는 꼴이었다.

“결국 우리 해군만으로 뤼순을 함락시키는 것은 포기해야겠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제대로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 이상, 도고 제독으로선 육군이 뤼순을 함락해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바다로 내몰아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구로키 중장의 1군이 압록강을 건너겠군.”

압록강만 넘는다면 보급로를 구축해 뤼순의 지척에 있는 다롄 방면에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은 물론 뤼순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그렇기에 도고 제독은 이번만큼은 육군과 해군의 갈등을 뒤로하고 구로키 중장과 육군이 승리해 빨리 뤼순까지 밀고 올라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총사령관 각하. 서쪽 참호선의 구축이 완료되었습니다.”

“음. 이 부근이 방어선이 좀 허술해 보이는군. 기관총 진지를 더 추가하도록 하게.”

그러나 도고 제독의 바람과 달리 지금 압록강 건너편에는 전 전쟁장관이자 현 극동 러시아군 총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파트킨이 직접 러시아군을 지휘하며 대규모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독일이 미리 러일전쟁을 경고한 덕에 전쟁이 터지고 난 뒤에야 뒤늦게 극동으로 달려와야 했던 원 역사와 달리 쿠로파트킨이 훨씬 빨리 극동에 도착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쿠로파트킨의 방어선엔 독일에서 받은 기관총과 윤형 철조망이 대량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기관단총이라 부르는 기괴한 모습의 신형 무기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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