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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74화 (74/193)

74화 : 시작된 러일전쟁 (1)

가장 처음 전쟁의 포성이 울린 곳은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대한제국이었다.

와아아아아~!!!

“에구머니나, 이게 무슨 소리야?”

“왜, 왜놈들이다! 왜놈들이 쳐들어왔다!”

1904년 2월 6일 오전 4시.

일본 제국이 어떠한 선전포고 없이 부산에 상륙, 전신국을 점령해 한성으로 가는 모든 통신을 차단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2월 8일.

퍼엉! 펑!

“헉! 허억!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가?!”

“일본 함대입니다. 일본 함대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일본이 우리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했단 보고는 없었잖나!”

“아무래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 같습니다!”

“이……이 비열한 원숭이 놈들이 감히……!!”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해군이 뤼순항과 제물포에 주둔 중이었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면서 공식적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선전포고 따윈 없었던 명백한 기습전쟁이었다.

뤼순항 해전과 제물포 해전은 다음날인 2월 9일까지 이어졌다.

일본 연합함대는 뤼순항 해전에서 구축함을 이용해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일본 구축함의 어뢰 공격으로 전함 레트비잔(Ретвизан)과 체사레비치(Цесаревич), 방호순양함 팔라다(Паллада) 등 러시아 해군 함선 3척이 손상을 입었지만, 일본 연합함대는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다.

한편 제물포 해전의 경우 제물포항에 주둔 중이던 러시아 방호순양함 바랴크(Варя́г)와 포함 코리에츠(Кореец)가 일본군의 기습 공격에 손상을 입고 스스로 자침을 선택하면서 일본 함대가 승리를 거두었다.

제물포 공격을 지휘하던 일본의 우류 소토키치(瓜生外吉) 제독은 러시아 함대란 방해물이 사라지자 곧바로 제물포에 5만 명의 육군 병력을 상륙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렇게 일본군은 청일전쟁 이후 다시 한번 조선에 발을 딛게 되었다.

순식간에 제물포를 점령한 곧바로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으로 진격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 제국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한 상태였지만, 일본군의 행동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밀려오는 일본군에 제대로 된 반격 하나 못 해 본 채 허무할 정도로 쉽게 수도를 내주고 말았다.

“파블로프 공사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후우, 이 나라와도 이젠 안녕이군. 출발하자.”

그로부터 3일 후인 2월 12일.

주한 러시아 공사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파블로프(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Павлов)가 공사관을 지키던 러시아군의 호위를 받으며 한성을 탈출하면서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그리고 아관파천 때처럼 러시아 공사관이나 타국의 공사관으로 피신도 못 하게 된 고종은 결국 일본의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성을 점령하고 고종을 손에 넣으면서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게 된 일본은 순조롭게 다음 계획으로 넘어갔다.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일본 제국의 조선 식민지화의 본격적인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 * *

“폐하. 조약서의 내용은 확인하셨습니까?”

“…….”

한성이 일본군에 점령된 지 며칠 후.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듯한 물음에 고종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내 궁궐에서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기엔 하야시 공사의 옆에서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던 일본 육군 12사단장 이노우에 히카루(井上光)가 무서웠다.

“그럼 폐하께서도 동의하셨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

고종이 끝까지 고개를 돌린 채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자, 하야시 공사는 살짝 짜증이 났음에도 미소를 유지하며 그리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귀찮게시리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긴.’

하야시 공사는 내심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지만,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눈앞의 무력한 황제에겐 자신들의 말을 따르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하야시 곤스케와 이노우에 히카루는 고종에게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편전을 나섰다.

그리고 고종은 두 일본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었다.

“……괜찮다. 아직 희망은 있어.”

일본인들의 무례도, 이 한일의정서라는 온갖 가식으로 가득 찬 종이 쪼가리도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이 승리하기만 한다면 무효로 돌아갈 것이다.

비록 초전에선 기습 공격에 당한 만큼 밀리는 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살아날 기회는 아직 있었다.

“게다가 석현(石峴, 이용익의 호)과 계정(桂庭, 민영환의 호)도 이런 날을 대비해 무언가를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둘 다 두루뭉술하게 말했던 터라 그것이 무엇인지는 고종도 잘 몰랐지만, 자신과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비책이라고 했다.

이용익과 민영환, 두 사람은 다른 모리배들과 달리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근왕파였던 만큼 믿을 수 있었다.

“제발 러시아가 이겨라. 러시아가.”

고종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를 거두길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한편, 경운궁을 나온 이노우에 히카루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하야시 곤스케에게 물었다.

“조선 황제는 신경 쓸 것 없다지만, 조선의 관료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조선 관료들은 우리의 편에 서거나 방관할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서라도 말입니다.”

하야시 곤스케 공사의 경험에 의하면 조선 관료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 쪽에 서는 것이 이득인지 충분히 알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알고도 알량한 애국심과 충성심으로 여전히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중장의 말씀대로 우리를 막으려고 애를 쓰는 자들도 있겠죠.”

“친러파들 말씀이군요.”

“예. 특히 이용익 그자가 문제입니다.”

하야시 곤스케가 이용익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친러파의 거두이자 반일 세력의 선봉장인 탁지부대신 이용익을 제거하지 않으면 의정서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원하신다면 제가…….”

“아닙니다. 이노우에 중장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미 본국에서 이용익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천황 폐하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이용익 그자는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야시 곤스케가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일본은 친러파의 거두이자 반일 세력의 선봉장인 이용익을 제거하지 않으면 한일의정서에 지장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기 전, 메이지 천황까지 가담해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한다.

“이미 이 나라는 우리 대일본제국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러시아를 쳐부수는 것뿐이다.

* * *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

하야시 곤스케와 이노우에 히카루가 밝은 일본의 미래에 웃음보를 터트리고 있을 때, 그들의 입에서 거론된 탁지부대신 이용익은 민영환의 저택에서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중립 선언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말이지.”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민영환이 이용익을 위로하며 말했다.

그의 주변에는 헤이그 특사 삼인방 중 하나였던 이준(李儁), 훗날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의 회장을 맡았던 이상재(李商在) 등의 민영환의 옛 개혁당 동료들.

그리고 이상설과 이회영, 박은식을 비롯한 훗날의 독립운동가들과 언더우드 목사 같은 조선의 우호적인 선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결국 터져 버린 러일전쟁과 기어코 조선을 향해 발톱을 드러낸 일본의 행동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목사님. 서양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선에 대해선 그 누구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아요.”

언더우드 목사가 그리 말하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태어난 곳은 먼바다 건너였지만, 그 또한 진심으로 조선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계정. 독일 제국의 반응도 마찬가지인가?”

“지금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식민지 반란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듣기론 하필이면 우리의 꼬마 남작께서 반란 진압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는군요.”

민영환의 말에 이용익이 탄식을 흘렸다.

한스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이용익은 볼일이 있어서 한동안 한성을 떠나 있었기에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남작을 만나 본 민영환과 이상설, 이회영의 말에 따르면 남작은 독일 황제의 신하인 만큼 독일을 우선하긴 하지만, 이 나라 조선이 처한 현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기에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엔 믿을 만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물론 반란 진압이란 중책을 맡을 정도로 꼬마 남작의 위상이 점점 올라가는 것은 나름 자랑스러웠지만 말이다.

“설마 그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있진 않겠지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상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스의 만남이 있고 나서 민영환과 여기 모인 미래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후를 위해 준비를 하고자 했다.

물론 최익현처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냉정하게 생각해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또는 괴뢰국이 되는 것은 사실상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당장 지금 한성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일본군을 보라.

자신들의 조국은 이용익과 민영환의 주도로 근대화된 군대를 갖추려는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하게, 총 한 번 제대로 쏴 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수도를 넘겨주었고 나라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미 한일의정서를 통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모르겠지만.’

민영환, 이상설, 이회영은 이미 남작에게서 일본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순간 전쟁이 어찌 끝나든 조선이 일본의 전리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는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앞날을 생각해야만 했다.

머지않아 찾아올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그리고 이 나라 백성들에게 닥칠 일본 제국의 지배를.

그렇기에 민영환은 나라를 빼앗길지라도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남작은 대한제국을 떠나기 전 민영환에게 이를 이룰 수 있는 한 가지 계책을 주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들은 민영환과 이상설, 이회영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이는 조선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영환은 수많은 고민 끝에 남작의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못 해 본 채 순순히 이 나라를 넘겨줄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잘만 하면 일본에 큰 엿을 먹일 수 있었다.

그래서 민영환은 나라의 재정을 관리하는 탁지부대신이자 황실의 내탕금을 관리하던 내장원경이었던 이용익을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이 계획은 이용익의 도움이 없다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이 직접 팔 걷고 나섰다면 일이 더 쉬워졌겠지만 바랄 것을 바라야 했다.

민영환의 머릿속엔 자신의 계획을 듣는 순간 고종이 자신에게 역정을 내는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민영환의 계획을 들은 이용익 역시 황제 폐하의 허락도 없이 감히 그런 짓을 할 순 없다며 처음엔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한스에게 못된 것만 배운 민영환의 계속되는 설득과 점점 암울하게 변하고 있는 대한제국의 처지에, 결국 이용익도 민영환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폐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지. 아마 역적이 될지도 모르겠어.”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이었던 완풍대군의 16대손으로 종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주 이씨의 일원이었던 이용익이 그리 말하며 쓰게 웃었다.

“이 대감. 나라를 허무하게 뺏긴 역적보단 그래도 나라를 지키려고 노력한 역적이 더 나은 법입니다.”

“만약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해서 일본이 물러간다면…….”

“맹세컨대 그땐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겠습니다.”

민영환의 말에 이용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것은 만일을 위해서다.

“모든 준비는 끝났소. 이제는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겨야 할 때요.”

제갈무후가 말했듯,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불가강야(不可强也)라.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게 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언제나 하늘인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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