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대한의 미래 (2)
“남작님.”
내가 그들을 만나겠다고 하자, 하인들이 응접실로 손님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아까 말대로 정말 4명의 조선인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일단 적어도 한 명은 알아보겠다.
“민 대감님이 절 보러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개인적으로 한번 남작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지난밤은 아무래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민영환은 옆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긴, 그로선 고종의 추태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옆에 계신 다른 손님들을 알고 계신 눈치신데 저에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전 전혀 모르는 분들이라서요.”
“아, 그러죠. 일단 여기 계신 노인장은…….”
내 말에 민영환이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듯 그리 밝지 않은 얼굴로 말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이십니다.”
“오.”
민영환의 얼굴빛이 좋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최익현은 전형적인 선비 차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개화와 서양과의 통교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였고, 민영환은 깔끔한 양장 차림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온건개화파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민영환은 여흥 민씨의 얼굴 같은 존재.
강직하고 대쪽 같은 선비였던 최익현이 고종과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온갖 전횡을 저질렀던 여흥 민씨에게 호감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젊은 시절이라면 몰라도 외국 순방 이후 철이 들어 정치인으로서의 능력과 책임감을 갖추게 된 민영환은 최익현이 아직도 자신을 그리 평가하는 것이 억울했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최익현에게는 답장을 보내려 했는데 잊었네.’
아무래도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자 직접 나를 만나러 발걸음을 옮긴 모양이다.
고종 때문에 주화입마를 입은 탓에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최가요.”
최익현은 민영환을 여기서 서로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지 그를 상당히 불편해하며 나를 향해 대답했다.
한마디만 들었을 뿐인데 꼬장꼬장함이 절로 느껴지는 것이, 벌써 미래가 한눈에 보인다.
‘그런데 나머지 두 사람은 누구지?’
이들도 양장 차림인 것으로 봐선 개화파 쪽인 것은 확실했다.
이들도 최익현을 상당히 불편해하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최익현이 개화파들에게 어떤 이미지인지 한눈에 보이네.’
네 사람이 만들어 내는 불편한 분위기에 내가 침음성이 흘리는 사이, 민영환이 나머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이상설 군과 이회영 군입니다. 이상설 군은 조정의 관료이고 이회영 군은 창덕궁선원전제1실상량문(昌德宮璿源殿第一室上樑文) 서사관인 이유승 대감의 4남입니다. 두 사람 다 대한의 미래를 책임질 유망한 젊은이들입니다.”
“순오 이상설입니다.”
“우당 이회영이라고 합니다.”
이상설과 이회영!
나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더불어 헤이그 특사 삼인방 중 한 사람으로, 훗날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17년에 병으로 순국한 인물.
그리고 이회영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잣집 도련님이었음에도 부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이시영을 비롯한 5명의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한 위대한 독립운동가 중 하나다.
비록 두 사람 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지만, 독립운동사에 있어 각자 큰 역할을 한 인물들.
대한제국에 와서 미래의 매국노들만 줄창 보다가 진짜 독립운동가들을 보게 되니 나름 감회가 새롭다.
“자, 자리에 앉으시죠.”
나는 그들에게 그리 권하며 의자에 앉았다.
최익현, 민영환, 이상설, 이회영.
각자 다른 사상을 지니고 다른 삶을 살아갔지만, 일본에 항거했다는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 인물들.
나는 과연 이들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나올지 기대를 품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남작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워낙 과장된 것이 많은지라 그 모든 것이 정말 진실인지는 모르겠소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최익현이었다.
“그렇지만 삼전도의 굴욕을 갚았다는 이야기는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그 일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흐음. 생각보다 겸손하군.”
최익현이 내가 자만하지 굴지 않고 겸허하게 군다고 생각한 것인지, 상당히 흡족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왜 다들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이리 오해를 하는 건지 참.
“솔직히 나는 남작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품지 않았소. 내 서양에도 의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양인들이 앞으론 도덕을 외치며 뒤로는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는 것 또한 현실이니.”
“하하,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러고 보니 최익현은 의외로 서양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양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알고 있다.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둔 자치고 방종에 빠지지 않는 자가 없는 법이지 않소. 내 옆의 문약 대감처럼 말이오.”
“크흠! 면암 선생. 대체 언제까지 옛날 일을 들먹이실 생각이십니까.”
최익현이 은근히 민영환을 까자, 민영환이 발끈하며 말했다.
물론 최익현은 민영환의 말에 자그마한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만 말이다.
젊었을 때의 민영환은 행실이 방자하다고 욕을 먹었던 데다가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말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다만, 민영환이 정말 탐관오리였는지에 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오히려 당시 조선 조정에서 민영환은 청렴하단 평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영환이 탐관오리라고 욕을 먹었던 것은 그가 여흥 민씨의 얼굴마담 같은 존재였던 탓이 크다고 본다.
게다가 과거보단 현재가 중요한 법.
지금의 민영환은 젊은 민영환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양인 중에도 좋은 사람들은 많습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편설라(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선생이나 원두우(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생 같은 분들을 보십시오.”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전자는 작년에 사망했기에 독립운동엔 직접적으로 관여하진 않았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배재학당의 설립자였고, 후자는 한국 개신교 장로회의 아버지이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경희학교 대학부를 설립하고 세브란스 병원의 창설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둘 다 미국인이었지만 진심으로 조선인들을 위해 살았던 인물들로, 오늘날에도 많은 존경을 받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원조 석호필로 유명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나 어니스트 베텔, 호머 헐버트 등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 그리고 때론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조선과 조선인들을 도왔다.
그러나 최익현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들도 결국엔 자신들의 신앙을 포교하기 위해 대한에 찾아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리고 양인들의 종교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최익현의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의 말대로 이 시절 서구 열강들과 그들을 따라 한 일본제국은 사람 같지 않은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으니까.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최익현을 비롯한 위정척사파들이 결국엔 성리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론 조선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곤 하나 양인 대부분은 여전히 이 조선 땅을 수탈하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에만 바쁘오. 그들을 따라 한 왜인들도 마찬가지고.”
“…….”
최익현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계속 제 할 말만 하자 민영환이 그냥 말을 말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상설이나 이회영도 마찬가지였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민 대감님께서는 절 무슨 연유로 만나고자 하신 겁니까? 정말 저와 이야기만 나눌 생각은 아니신 것 같은데.”
내가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민영환에게 그리 질문했다.
민영환이 말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와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밤이라면…… 아.”
고종과의 밀담을 말하는 모양이다.
이에 대해 사과와 감사를 한다는 것은 역시 민영환도 고종의 계획을 무리수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간도 진출 자체는 나름 합리적일지는 몰라도 대한제국을 둘러싼 주변 상황이 상황이니까.
차라리 대한제국의 간도 진출을 묵인해 달라는 거면 모르겠는데, 그걸 넘어 청을 치는 것을 지원해 달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나는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대놓고 꺼내진 않았다.
이상설이나 이회영이라면 몰라도 최익현이 있는 자리다.
이 꼬장꼬장한 영감님의 귀에 고종의 계획이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어쩌면 도끼를 들고 경운궁으로 쳐들어가 지부상소를 하거나, 아예 고종의 계획에 동참해 병자년의 복수를 갚자며 나설지도 모른다.
‘최익현이라면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긴 해.’
그렇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고종과의 밀담에 대해 함구했다.
민영환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이상설과 이회영 쪽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순오와 우당, 자네들은 왜 남작님을 만나러 온 건가?”
“아, 그게…… 순오 이 친구가 소문의 꼬마 남작을 만나고 싶다고 하도 노래를 불러서 말입니다. 그래서 한번 와 본 건데 마침 민 대감께서 계시지 뭡니까. 좋은 기회다 싶었죠.”
“우당, 사람 무안하게시리 그 이야기는 왜 꺼내고 그러나.”
“하하, 괜찮습니다. 그래서 이상설 씨께선 왜 절 그리 만나고 싶어 하셨던 겁니까?”
내 말에 이상설이 긴장을 풀려는 듯 숨을 깊게 내쉬곤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작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다.”
“제게요?”
이상설의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자세를 고쳐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작님께선 우리 대한제국의 미래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상설의 입에서 흘러나온 묵직한 질문에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대한의 미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 전달할까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제국이 머지않아 겪게 될 일들은 이 네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배드엔딩이었으니까.
‘하지만 잘하면 이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어.’
확실히 말해 두자면, 나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굳이 막을 생각이 없었고 막을 수도 없었다.
독일 제국에 이득이 되지 않을뿐더러 그럴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러일전쟁을 무승부로 끝내려고 하고 있었기에 대한제국이 당장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굳이 식민지가 아니더라도 일본은 어떤 형태로든 절대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그리고 그보다 먼 미래를 보자.
어차피 제1차 세계대전, 또는 역사가 바뀌어서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되더라도 독일 제국과 일본은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다.
독일 제국은 중국에선 키아우초우와 톈진(天津), 태평양 지역엔 독일령 뉴기니와 사모아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으니까.
‘죄다 양차 대전에서 일본에 점령당한 지역이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은 영국의 동맹이자 협상국의 일원으로서 독일의 아시아 식민지를 공격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다들 알다시피 추축국의 한 축으로서 중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며 이 지역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일본의 행보는 딱히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일본제국의 광기 어린 야욕은 내가, 아니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독일 제국이 건재하는 한 이 지역들은 계속 독일의 식민지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고, 일본은 한반도를 노리는 것처럼 독일의 식민지에도 언젠가 침을 흘릴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홍콩과 싱가포르를 비롯한 영국 식민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미국령 필리핀을 점령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과 독립군을 잘만 키워 놓는다면?
훗날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일본과 부딪혔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이 지역들은 독일 제국이 직접 힘을 쏟기엔 어려운 지역들이었으니까.
다만 오해할 수 있어서 말해 두는데, 나는 독립운동가들을 내 입맛대로 이용하다가 가차 없이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나와 손을 잡는 것은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충분히 이익일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나와 협력함으로써 독일산 무기와 물자 등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또한 나는 독일령 식민지에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을 마련해 줄 수도 있었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흩어져 독립운동을 이어 가야만 했던 슬픈 역사와 다르게 말이다.
‘어쩌면 나중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는 곳이 상하이가 아니라 칭다오가 될지도.’
어쨌든 나도 독립운동가들과 손을 잡으면서 얻는 이익이 있었고, 독립운동가들도 나와 손을 잡으면서 얻는 이익이 있었다.
누구도 손해 볼 것 없는 완벽한 윈-윈 관계였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나는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이상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대한제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인상 깊게. 또 단호하게.
“그리고 일본의 노예가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