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대한의 미래 (1)
“어찌 이리 무엄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어린 것을 믿었던 짐이 어리석었도다!”
“그렇습니다. 폐하.”
“양인들이 대우해 준다고 해서 제가 정말로 무엇이라도 된 줄 아는 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한스가 돌아간 뒤.
민영환은 고종의 분노에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종은 꼬마 남작의 냉랭한 거절에 실망을 넘어 분노했지만, 민영환으로서는 차라리 이렇게 시원하게 거절당한 것이 나았다.
민영환의 생각에도 고종의 계획은 너무나도 허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의 힘을 빌려 청을 치는 순간, 러시아 제국이 우리 대한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제국이 현재 대한제국이 간도에서 청과 국경 분쟁을 벌이는 것을 대놓고 눈감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러시아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러시아의 보호국이나 마찬가지인 대한제국이 자신들을 대신해 간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러시아 제국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대한제국이 독일의 지원을 받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곧 간도의 이권을 러시아가 아닌 독일이 가져갈 수도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리고 서구 열강들은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자신들의 이익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만큼은 못 참는 존재들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이를 대한제국의 배신이라 여길 것이고, 대한제국을 버리거나 아예 자신들이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려고 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승냥이처럼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이 간도 분쟁을 명분으로 아예 선수를 쳐서 대한제국을 침공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만은 안 된다!’
민영환은 친러파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러시아의 힘으로 대한제국을 집어삼킬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민영환은 반대로 러시아 제국이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나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나, 결국 이 나라와 백성들에게 닥칠 불행은 그리 다르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간도 문제가 열강 간의 분쟁으로 번져서 괜한 불똥이 튀었다간 위태위태한 상태였던 대한제국은 그때야말로 500년 종사의 문을 닫고 말 것이다.
‘폐하께서 어째서 나에게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신 것인지.’
민영환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눈앞에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온 것인지 회의감이 들었다.
대한제국은 옛날보다 확실히 개혁과 근대화를 통해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기엔 여전히 역부족이었고, 자신의 조국엔 매국노들이 즐비했다.
게다가 민영환 또한 알고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결전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옛 개혁당 동지이자 친러파의 거두인 이용익 대감은 러시아와 일본, 둘 중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채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어떻게든 이 나라에 닥칠 폭풍을 피하려고 했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민영환은 철없던 시절의 자신을 송두리째 바꾼 세계 순방 때 배운 경험으로 약소국의 목소리만큼 허무한 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러일전쟁은 이 나라에 큰 위기가 되겠지.’
러시아가 승리하면 그나마 나았지만, 만약 일본이 승리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서 아직도 남작에 대해 악담을 퍼붓고 있는 고종은 이 와중에 독일의 힘을 빌려 청을 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어쩌면 꼬마 남작의 존재 자체가 황상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조선인이니까. 그저 어린아이니까 잘 구슬리면 독일의 군사 지원이든 뭐든 얻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오만한 양인들 틈에서 귀족 작위까지 거머쥔 것도 모자라 독일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것이 꼬마 남작이었다.
호랑이 무리 사이에 있는 토끼가 그냥 토끼일 리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의 예상대로 꼬마 남작은 무척이나 총명한 소년이었다.
만약 과거제가 폐지되지 않고 남아 있다면 최연소 과거 급제자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꼬마 남작에겐 개인적으로 감사해야겠어.’
민영환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물론 그쪽에서도 자신과 독일 제국에 전혀 이익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거절한 것이겠지만, 덕분에 자기 혼자 폭주하던 황상의 망상에 제동이 걸렸다.
민영환은 이런 자리가 아닌 자유롭게 말을 나눌 수 있는 자리에서 그 소년과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졌다.
그는 나중에 선물이라도 챙겨서 개인적으로 남작을 찾아가자고 마음먹었다.
* * *
“여기가 리 제독의 묘소가 있는 곳인가…….”
고종과의 밀담이 영 좋지 않게 끝난 뒤.
나와 아달베르트 왕자는 대한제국에서 조선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는 덕어학교를 방문하고, 독일 기업인 세창양행을 방문해 직원들을 위무하고, 독일인 교관 에케르트에게 훈련을 받은 대한제국 군악대를 시찰하는 등등 미리 정해진 일정에 따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고종은 나에 대한 기대를 접었는지 그 뒤로 나에 대한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
그냥 꼴 보기 싫으니 내가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종의 요청은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외교독립론 이야기를 꺼냈으면 이런저런 조언이라도 해 줬을 텐데, 청나라를 치는 데 독일 제국의 도움을 바란다는 것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어쨌든 이젠 끝난 이야기.
그리고 나는 고종과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아달베르트 왕자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일정을 소화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기어코 이곳에 와 버렸다.
우리 방한 일정의 마지막.
이순신 장군님의 묘소가 있는 충남 아산이었다.
나로선 대체 왜 여기까지 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아달베르트 왕자의 의지는 강력했다.
참고로 지금 우리 왕자님께서는 성지를 순례하는 경건한 순례자처럼 경건한 표정으로 아산의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봐라. 누가 보면 여기가 고향인 줄 착각할 정도로 감회의 젖은 아달베르트 왕자의 얼굴을.
덕분에 아산 주민들은 별로 볼 일이 없던 서양인들이 마을에 잔뜩 나타난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자 미친놈들을 보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아따, 마을에 왠 양인들이 떼거리로 돌아다니는 겨? 저건 또 뭐 하는 짓이고.”
“나랏일 하는 양반들이 그러는데 이 충무공 묘소에 참배하러 왔다는데유.”
“으메, 양인들이 이 장군님은 어찌 아느겨?”
“거 우리 이 장군님이 어디 보통 장군인가유? 저거 바다 건너에 이름이 알려져도 이상할 게 없는 분이잖아유.”
“으응, 그건 그려. 우리 이 장군님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장군이시니까 말이여.”
“적어도 떼놈이나 왜놈들처럼 깽판은 안 치니 다행 아니겠어유?”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거 맞는 겨? 어째 더위를 먹어서 단체로 정신줄을 놓은 것 같은디.”
서양인들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자신들의 생각을 대놓고 마음껏 떠들어대는 마을 사람들.
그래도 나쁜 반응은 아니니 되었다.
‘게다가 날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여기는 한성이나 제물포와 달리 시골 지방인지라 나에 대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한성은 길을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몰려드는 일이 너무 잦아서 꽤 곤욕을 치렀는데, 여기선 그러질 않아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스윽─
“저기 저기 오라벙이는 서울에서 왔어유?”
내가 아달베르트 왕자의 기행을 썩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이,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마을 어린애 하나가 내 바짓단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응. 서울 말고 저기 바다 건너 구라파에서 왔어.”
“구라파? 어째 조선 사람이 구라파에서 왔데유?”
“거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단다. 덕분에 남들이 주는 것은 함부로 먹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지.”
“?”
“오. 한스. 그 애는 뭐야?”
드디어 사색에서 벗어났는지 아달베르트 왕자가 나를 향해 말했다.
“마을 어린애지 뭡니까?”
“오. 그럼 그 애랑 사진(Foto) 하나 찍어 줄까?”
“뽀토?”
아이가 아달베르트의 왕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이것도 인연이다.
나는 아이의 부모에게 양해를 구한 뒤, 아이와 같이 사진기 앞에 섰다.
“그럼 찍는다?”
퍼엉!
왕자의 목소리와 함께 사진기의 조명 전구가 큰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사진기에 익숙하지 않은 마을 노인들은 깜짝 놀랐지만, 아이는 오히려 재밌었는지 꺄르륵거렸다.
“사진은 나중에 사람을 시켜서 보내 줄게. 대대손손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비싸질 때 팔아먹으렴.”
“으잉?”
“한스! 빨리 와. 리 제독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오랜만에 느긋한 분위기에서 시골 풍경을 즐기려는 참에 대한제국에서 와서 가장 신난 모습의 아달베르트 왕자가 나를 불렀다.
이제 이순신 장군님의 묘소에 갈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저 방방 뛰는 왕자를 보라.
여기서 누가 어린애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리 제독에 관련된 거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나는 툴툴대며 아달베르트 왕자의 뒤를 따라 현지인의 안내에 따라 아산 인근에 있는 금성산으로 향했다.
전생 시절 벌레랑 여기저기 자란 잡초들 때문에 여름 성묘라면 질색했는데, 그 기분을 여기서 다시 느낄 줄은 몰랐다.
“여기가 리 제독님이 묻히신 곳……!”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충무공 이순신 묘에 도착하자 아달베르트 왕자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그러곤 왕자와 마찬가지로 내 소설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다른 카이저마리네 장교들과 함께 엄숙한 얼굴로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언제 준비해 왔는지 모를 하얀 국화꽃을 이순신 장군님의 묘에 헌화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저게 도당체 뭐 하는 짓인 겨?”
“글쎄유? 양인들 풍습을 지가 어찌 알겠어유.”
물론 호기심에 우리 일행을 따라온 아산 주민들은 이 광경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말이다.
나는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달베르트 왕자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저게 결코 나쁜 짓은 아닌데 아달베르트 왕자가 너무 진지한 바람에 어째선지 내가 다 부끄러워져서 도저히 맨정신으론 못 쳐다보겠다.
게다가 아달베르트 왕자는 리 제독에겐 최고의 대우를 해야 한다며 예포까지 쏘려고 했다!
물론 그건 주민들이 놀랄 수가 있고 다른 문제도 있어서 내가 어떻게든 뜯어말렸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조선에선 총을 쏘거나 대포를 쏘는 행위는 귀신을 쫓아내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이순신 장군님 묘 앞에서 총을 쐈다간 아산 주민들이 오해하고 우리 일행을 향해 분노를 터트릴지도 모른다.
‘나중에 국사 교과서 한 편에, 조선의 풍습에 무지했던 독일인들과 한스 폰 초이의 행동으로 인해 아산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적히기는 싫어.’
그것도 어디 서X라X즈에 나올 법한 부끄러운 해프닝으로 말이다.
나는 앨리스 루스벨트와 동급의 인간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진 않았다.
“자, 받으시죠. 왕자님.”
“이건?”
“원래 조선에선 성묘할 때 술을 올리는 법입니다.”
“오. 그것참 멋진 풍습이네. 그래. 뱃사람에게 어디 술이 빠져서야 되나.”
내가 미리 준비해 온 소주를 잔에 따라 건네자 아달베르트 왕자가 그것을 그대로 이순신 장군의 묘에 바쳤다.
아산 주민들은 그걸 보고 서양 코쟁이들도 예법은 안다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공식 일정을 나름 성공적으로 마쳤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가 돼서야 한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예? 손님이요?”
그러나 잘데른 공사의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내가 들은 것은 뜬금없이 손님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어째 고종의 밀사가 생각났기에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네. 그런데 한 분이 아닙니다.”
“?”
“손님은 총 4명입니다. 4명의 조선인이 남작님을 만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