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고종 (2)
중화전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마주한 것은 우리 일행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대한제국 고관대작들의 시선이었다.
다만 이 자리에 있는 고관들의 수는 두 손으로 셀 수 있었을 정도로 그렇게 많진 않았는데 아마 고종이 신뢰할 수 있는 인척이나 측근들만을 불러 모은 듯했다.
그리고 내 시선이 향한 끝엔 고종이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포를 입은 채 옥좌에 앉아 있었다.
고종은 조선 사람들이 사진이란 서양 문물을 꺼렸던 시절에도 거리낌 없이 사진을 찍고 다녔다는 일화처럼 수많은 사진을 남겼기에 그의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달베르트 왕자가 서양식 예법에 따라 고종을 향해 인사를 하자 나와 잘데른 공사를 비롯한 나머지 독일인들도 그대로 따라 인사했다.
옛날이면 모를까 조선인들도 서양식 예법에 익숙해진 시대였기에 고종은 별말 없이 우리의 인사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소. 왕자.”
통역관으로 보이는 자가 어눌한 독일어로 고종의 말을 번역했다.
하지만 통역의 독일어는 나조차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발음이 이상했기에 정작 아달베르트 왕자와 독일인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고 합니다. 왕자님.”
“아, 그래?”
그 모습에 보다 못한 내가 작은 목소리로 아달베르트 왕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제야 고종의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은 아달베르트는 고종의 환대에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이 자그마한 해프닝을 지켜본 고종은 통역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있는 통역에게 물러가라 손짓한 뒤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최한수 남작이로군.”
“예. 폐하.”
내가 고종의 말에 한국어로 대답하자 대한제국 관료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 것을 보니 적어도 내가 나쁜 인상을 주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대의 이야기는 짐 또한 많이 들었다. 나중에 그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구나.”
고종은 은근한 호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나에게 그리 말했다.
그러곤 다시 아달베르트 왕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 경회루에 정찬을 준비하였소. 더 많은 이야기는 그때 나누도록 합시다.”
나는 고종의 말을 그대로 번역해 아달베르트 왕자에게 전달했다.
아달베르트 왕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종에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걸로 알현은 끝이었다.
물론 진정한 시작은 지금부터였지만 말이다.
* * *
“한스. 저 건물은 뭘 하는 곳이지?”
“사정전입니다. 왕자님.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라는 동양 철학의 한 구절에서 이름을 따온 곳으로 조선의 왕이 신하들과 함께 국가 정책에 대해 논의를 하던 곳입니다.”
“그래? 조선인들은 우리와 다르게 건물 이름에 참 많은 의미를 담는단 말이지.”
아달베르트 왕자가 참 재미있다는 얼굴로 사정전을 감상했다.
경회루에서 정찬이 열리기까진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기에 나와 아달베르트 왕자는 남는 시간 동안 경복궁 구경에 나섰다.
사실 내 쪽은 구경보단, 어쩌다 보니 아달베르트 왕자의 경복궁 가이드 노릇을 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덕분에 정작 안내를 맡은 조선 관료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채 그냥 우리를 따라다니기에 바빴다.
“그리고 저쪽으로 가면 정찬이 열리는 경회루가 있습니다.”
“나도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있어. 하인리히 삼촌도 코레아에 오셨을 때 가장 인상적인 곳이었다고 말씀을 해주셨지.”
“저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하더군요.”
물론 실제론 학교 견학 때 수도 없이 봤다.
경회루라 하면 경복궁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였으니까.
“정찬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나?”
“아직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만.”
“그럼 슬슬 그 경회루 쪽으로 가보자. 조금 일찍 간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슬슬 궁궐 구경도 질리는지 아달베르트 왕자가 그리 말했다.
나도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기에 고래를 끄덕이며 멍하니 서 있던 관료들에게 경회루로 가자고 말했다.
관료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나 문제 될 건 없다고 판단을 했는지 바로 고개를 조아리며 우리 일행을 경회루 쪽으로 안내했다.
“와~”
“멋진 곳이군요.”
“흠. 전 많이 와 봤지요. 이곳이 어떤 곳이냐면…….”
경회루에 도착한 아달베르트 왕자와 독일인들이 연못 위에 떠 있는 멋들어진 누각의 모습에 탄성을 내뱉었다.
잘데른 공사는 이미 경회루를 많이 봤는지, 서울 사람들이 서울에 막 올라오는 시골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잘난 체를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봐도 경회루는 멋진 곳이었다.
특히 지금은 계절이 여름이었기에 푸르른 초목과 환한 햇빛이 경회루를 더 빛내 주고 있었다.
“이런. 왕자 전하. 그리고 남작님.“
모두가 우두커니 서서 경회루를 감상하던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무래도 일찍 온 것은 우리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정찬 준비를 감독하기 위해서인지 경회루에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외부대신 박제순이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뒤로 처음 보는 고관대작 두 명이 박제순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한 명은 노인이었고, 한 명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젊어 보였다.
내가 누구인지 질문하자 박제순이 말했다.
“아, 저쪽은 의정(議政)이신 이근명(李根命) 대감이고, 그 옆은 민영환(閔泳煥) 대감입니다.”
의정이라면 옛날로 치면 영의정, 그러니까 대한제국의 총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근명과 민영환이라.
전자는 을사조약엔 반대했지만, 그 이후엔 친일파로 전향해 자작의 작위까지 받아먹은 매국노였고. 후자는 고종의 외사촌이자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로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기 위해 자결로 생을 마감한, 여흥 민씨 중에선 그나마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대한제국에 와서 만나 본 고위 관료가 어떻게 민영환 빼고 죄다 매국노밖에 없을까.
나도 모르게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러니 나라가 망했지.’
원 역사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딱 이 꼴이었다.
폴란드의 귀족 의회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세임은 어떻게든 망해 가는 나라를 살려 보려는 국왕의 개혁으로부터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에 빌붙었고, 끝내 삼국 분할에 동의하면서 폴란드를 팔아먹었다.
포니아토프스키와 코시치우슈코를 비롯한 일부 귀족들과 폴란드인들은 이에 분노했고, 반란을 일으키며 러시아를 비롯한 침략자들에게 저항했지만, 결국 망국의 운명을 바꾸진 못했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삼분할 되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대한제국처럼 말이다.
우울한 일이지만 역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다시 반복되는 법이다.
“왜 그러십니까. 남작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됐으니 경회루로 가도록 하죠.”
내 말에 박제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도 경회루에 도착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정찬이 시작되었다.
“왕자의 숙부는 잘 지내고 계시오?”
“네. 오히려 너무 건강하셔서 탈입니다.”
고종이 아달베르트 왕자에게 4년 전 대한제국을 방문한 하인리히 왕자에 대한 안부를 묻자, 아달베르트 왕자가 미소 지으며 그리 대답했다.
고종은 그 밖에도 빌헬름 2세는 어떻게 지내는지, 대한제국에 대한 첫인상은 어떤지 등 내 생각보다 시시콜콜한 것만 물어봤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 대한 고종의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남작은 본관이 어디인가?”
“경주라고만 들었습니다. 폐하.”
“허허, 경주 최씨라. 이 조선 땅에 친척은 있는가?”
“워낙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온 지라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집안에 관한 이야기나,
“남작은 덕국 황제 말고도 영길리 국왕과 노서아의 황제, 그리고 미리견의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다고 들었네. 그게 정말인가?”
“그저 어린아이인 저를 어여쁘게 봐 주신 것들 뿐입니다.”
교우관계라든가,
“남작은 문(文) 쪽에 관심이 있는가, 무(武) 쪽에 관심이 있는가.”
“양쪽에 다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몸이기에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을지는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덕국은 무를 숭상하는 나라라고 알고 있네. 하지만 역시 사대부라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미래의 진로 같은 명절날 오지랖 넓은 친척 아저씨들이랑 나눌 법한 이야기만 잔뜩 했다.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상하네.’
고종이 아무런 꿍꿍이도 없이 이럴 리가 없다.
물론 이번 대한제국 방문은 아달베르트 왕자의 개인적인 소망이 큰 지분을 차지하는 만큼 딱히 큰 정치적인 목적은 없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이건 너무 태평하고 느긋한 분위기였다.
전혀 평화롭지 않은 현 대한제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장 자기 안위를 지키는 것 하나는 필사적인 고종이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그리고 고조되는 양국 간의 전쟁 분위기를 모를 리가 없다.
아니, 고종은 몰라도 다른 고관들 쪽에서 독일 제국이 대한제국을 지원해 줄 순 없냐고 은근한 한마디라도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하지만 지금 이 자리를 보라.
정치나 정세 관련 이야기는 하나 없고 그냥 ‘평소에 밥은 잘 먹고 다니니?’ 같은 실없는 이야기나 하고 있지 않은가.
“한스? 왜 그래. 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 내 생각보단 훨씬 먹을 만한데.”
“아뇨. 아닙니다. 왕자님. 그냥 오랜만의 고향 음식을 맛보는 것이라서 그런지 익숙하지가 않네요.”
나는 해맑은 얼굴로 너비아니를 포크로 찍어 먹고 있는 아달베르트 왕자에게 그리 웃음을 지으며 변명한 뒤, 오랜만에 젓가락을 놀렸다.
어쩌면 내가 너무 편집증처럼 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종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걸지도 모르지.’
망해 가는 나라의 지도자로선 상당히 문제가 많은 행동이었지만, 왠지 고종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냥 즐기자.’
나는 긴장을 풀며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었다.
오랜만에 먹는 김치는 참으로 맛있었다.
* * *
고종과의 정찬이 끝난 뒤.
아달베르트 왕자와 나는 아무 일도 없이 잘데른 공사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참 평화로운 하루였네.”
이렇게 평화로워도 될까 싶지만.
나는 방에서 어제 미쳐 못 본 서신을 확인하거나, 책을 읽으며 빈둥거리는 등 여유로운 저녁을 보냈다.
그때였다.
똑똑똑.
“무슨 일입니까?”
“남작님. 남작님에게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이요?”
나는 탁상 옆에 있는 작은 시계를 바라봤다.
지금 시각은 거의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에요?”
손님이 오기엔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다.
무언가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겨 온다.
“후, 일단 내려가 보죠.”
나는 문밖에서 서 있는 사용인에게 그리 말한 뒤, 가운을 걸친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손님은 저택의 정문에 있지 않았다.
날 찾아온 손님은 참으로 놀랍게도 저택의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나 수상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최한수 남작님이십니까?”
뒷문으로 나가자 검은색 모자와 외투로 전신을 꽁꽁 감춘 채 기다리고 있던 수상한 남자가 나를 향해 그리 말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언어는 다름 아닌 한국어.
그리고 날 찾아온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이 공사관에서 조선인이 나 말고 누가 있을까요.”
내가 심드렁하게 그리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오늘 밤 은밀히 남작님을 만나고자 하십니다.”
남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서신이었다.
‘그래. 웬일로 조용하다 했다.’
나는 그리 한숨을 내쉬며 남자에게 받은 서신을 뜯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신을 보낸 사람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군밤이가 그러면 그렇지.’
고종의 밀서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