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고종 (1)
“휴, 어째 굉장히 지치네.”
나는 대한제국에 체류할 동안, 나와 아달베르트 왕자가 머물기로 한 잘데른 공사의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못 한 채,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잘데른 공사의 말도 있었기에 설마설마했는데 이렇게나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
한성 사람들은 물론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죄다 몰려온 것 같은 기분이다.
덕분에 사람들에게 손 흔들어 주느라 팔이 아파서 나가떨어질 것만 같다.
똑똑.
“남작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나에게 쉴 시간은 불필요하다는 듯, 침대에 몸을 뉘자마자 얼마나 지났다고 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솔직히 이대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끄응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공사관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양팔에 무언가를 잔뜩 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직원이 어째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남작님 앞으로 편지와 선물들이 잔뜩 도착했습니다.”
“……뭐라고요?”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자 직원이 커다란 바구니를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것은 편지.
지금껏 받은 불멸의 리 제독 팬레터보다도 엄청난 양의 편지였다.
이것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직원이 손짓하자 하인들이 비단 같은 고급 천으로 포장된 상자와 물건들을 내 방 안으로 옮겼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같은 도자기는 기본에 나도 모르게 ‘이건 박물관으로 가야 해!’라고 외칠 것만 같은 동양화들과 서예 작품들, 난초와 화려하게 장식된 전통 공예품, 심지어 금두꺼비와 금거북까지 있었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죄다 비싸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으응? 한스, 이게 다 뭐야?”
왠지 탐관오리가 된 듯한 꿀꿀한 느낌에 내가 곤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사이, 어느새 제복을 벗고 편한 차림새로 갈아입은 아달베르트 왕자가 순식간에 보물창고가 된 내 방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저에게 온 선물들이라는데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겠네요.”
“여기 명단이 있는데 살펴보시겠습니까?”
공사관 직원이 선물을 보낸 사람들을 미리 적어놨는지 명단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명단의 가장 위에 적힌 이름부터 살펴봤다.
[이완용(李完用)]
“씨발.”
나는 보기만 해도 눈앞이 어질어질 해지는 이름 석 자에 그만 정신을 놓을 뻔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무척이나 와닿을 정도다.
나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다른 이름들도 살펴봤다.
을사오적 이근택(李根澤)에 권율과 이순신의 후손이면서 조상들과 달리 일본에 부역한 매국노였던 권준형(權重顯), 그리고 아까 봤던 민병석(閔丙奭) 등등.
명단 곳곳에 적혀있는 머지않은 미래에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 매국노들의 이름이 내 순수한 눈을 더럽혔다.
물론 모르는 이름들도 많았지만 내가 보기엔 다 그놈이 그놈이었다.
심지어 이 명단엔 제1차 한일협약과 을사조약을 주도했던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설마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다 같은 사람들인가?’
그것은 확인을 해 봐야 알 것 같았지만, 아마도 내 예상이 맞을 것 같다.
보나 마나 이 선물들은 나한테 자그마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수작이겠지.
“하. 이것들을 갖다 버릴 수도 없고.”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우리 매국노 친구들의 헛짓거리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을 쓰레기장에 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결국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일단은 이 ‘선물’들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중에 반환하든 아니면 박물관에 기증하든지 하면 될 것이다.
“일단 이것들은 제 방에서 치워 주시겠어요? 이대로라면 누울 자리도 없겠네요.”
“네. 일단 창고에 넣어 놨다가 돌아가실 때 배에 실어 놓겠습니다.”
곧 공사관 직원이 다시 하인들을 부려 물건들을 다시 가져갔다.
이제 내 시선은 커다란 바구니를 꽉 채운 편지들이었다.
마음 같아선 불태워 버리고 싶지만,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보낸 편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은 해 봐야겠다.
나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편지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매국노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이완용은 뭘 잘못 먹었는지 혼자서 편지를 세 통이나 보냈다.
누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모두 이름이 들어가 있는 매국노 3관왕 아니랄까 봐 참 기분 나쁠 정도로 열성적이다.
역시 이 편지들을 모조리 벽난로 안에 던져 버릴까 생각하던 찰나, 다른 편지들과 다르게 고풍스러운 필체로 적힌 서신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 다른 편지들과는 어떤 의미로 불길한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겉면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최익현……?”
최익현이라 하면 위정척사파의 거두.
이 시대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구한말의 대표적인 항일 인사 중 하나로 이완용 같은 친일 매국노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사람이지만 최익현은 전형적인 유학자 마인드를 버리지 못한 보수적인 것을 넘어 수구적인 인물.
쉽게 말해 조선의 라스트 선비였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그런 사람이 왜 나에게 편지를 보낸 걸까?
최익현과 나는 일종의 상극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꼬장꼬장한 영감님이 날 좋아할 건덕지가 없어 보인다.
설마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삼전도의 굴욕을 갚았다 착각해서 그런 것일까?
“일단 이건 보류.”
최익현의 편지는 나중에 찬찬히 읽어 봐야겠다.
대한제국에 오자마자 마주한 부담스러운 환영 인파나 매국노들의 정신 공격 때문에 이젠 한계다.
게다가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고종을 알현하러 가야 한다.
체력과 정신을 온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적혀 있을지 모를 최익현의 편지로 인해 괜한 충격을 받고 싶진 않았다.
고종은 어떤 의미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
* * *
다음 날 아침.
나와 아달베르트 왕자는 각자 화려한 정복으로 갈아입고 고종의 알현을 준비했다.
다만 고종을 알현하는 것은 나와 아달베르트 왕자뿐만이 아니었다.
잘데른 공사와 잉게놀 함장, 그리고 SMS 헤르타의 장교 몇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왕자님. 대한제국 측에서 마중이 나왔습니다.”
“알겠소. 공사. 준비도 얼추 끝났으니 곧 내려가겠소.”
아달베르트 왕자는 거울을 보며 차림새를 확인한 뒤, 나에게 따라오라 눈짓했다.
그러고 보니 타국의 군주를 알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알현 말이다.
에드워드 7세야 언제나 왕실 간의 가족 모임 비스무리한 분위기에서 만났기에, 이리 깐깐하게 예의범절을 차려 가며 만난 적은 없었으니까.
어쨌든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는 잘데른 공사와 잉게놀 함장, 그리고 어제도 보았던 민병석과 박제순이 기다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둘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왕자 전하, 남작님.”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외무대신 박제순이 우리 둘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밖에는 어제처럼 호위를 위해 나온 대한제국군 병사들과 함께 무려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설마하니 저걸 우리보고 타고 가란 건가?
진짜로?
“공사님. 설마 오늘도 어제처럼 구경꾼들이 몰려들까요?”
“어제 수준은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잘데른 공사가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많긴 많을 거란 소리였다.
하긴, 이젠 하다 하다 가마까지 타고 가는데 사람들의 이목을 안 끄는 게 이상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한제국의 황궁인 경운궁과 주한 독일 공사관 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 저걸 타고 가는 건가?”
“예. 왕자님. 가마라고 하는 겁니다. 마차와 달리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탈 것이죠.”
내 말에 아달베르트 왕자가 재미있겠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보통 마차나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서양인들의 눈에 가마는 신기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만났던 루스벨트의 대통령의 장녀인 앨리스 루스벨트도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가마를 탔다고 들었다.
난 개인적으로 그냥 어제 탔던 자동차를 타고 싶었지만 말이다.
“오오~ 움직인다. 움직여!”
우리 둘이 각자 가마 위에 올라타자 가마꾼들이 가마를 들어 올렸다.
그것이 신기한 느낌이었는지 아달베르트 왕자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난 배에 탔을 때가 생각나서 어쩐지 속이 안 좋아졌지만 말이다.
차라리 말을 타고 있는 잘데른 공사와 자리를 바꾸고 싶은 심경이었다.
척척척척~
“오, 저기 꼬마 남작이다.”
“어딜 가는 걸까?”
“높으신 양반들이 떡하니 붙어 있잖어. 주상을 알현하러 가는 거겠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와 아달베르트 왕자가 탄 천천히 가마가 지나가자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사람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어제에 비해선 선녀였다.
나는 흔들리는 가마를 붙잡고 남은 손으로 구경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때, 민병석이 나에게 다가왔다.
“허허, 남작님은 아랫것들에게도 친절하시군요.”
“선의에 선의로 돌려주는 것뿐입니다.”
“그러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보낸 선물을 잘 받으셨습니까?”
이 양반 그게 목적이었구만.
“죄송합니다만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는 안 하는 주의라.”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럼 나중에 좀 더 편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내 행동을 제멋대로 오해했는지 민병석이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했다.
물론 나로선 나중에 이 인간을 개인적으로 만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기에 그냥 어이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난 후.
이윽고 저 멀리 광화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스. 저 커다란 성문이 코레아의 황궁으로 들어가는 입구냐?”
“옛날에는 그랬죠.”
어제 미처 보지 못했던 한성 거리를 구경하던 아달베르트 왕자가 광화문을 보며 나에게 말하자 나는 그리 대답했다.
물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시절 이미 우리가 아는 경복궁이 재건되었지만, 이 시기 대한제국의 황궁은 다른 곳이었다.
“지금 황궁으로 쓰이는 곳은 근처에 있는 경운궁(慶運宮)입니다.”
그 유명한 덕수궁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외국 공사관 밀집 구역과 가깝다는 이유로 당시 사람들에게 그 이름조차 잊힌 작은 별궁에 불과했던 경운궁으로 이어했다.
고종에겐 을미사변이 상당한 트라우마가 되었을 테니까.
참고로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한 이후다.
어쨌든 정문인 인화문(仁化門)을 통해 경운궁으로 들어선 나는 돌아갈 땐 그냥 걸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신 가마를 안 타겠다고 맹세한 뒤 비틀거리며 가마에서 내렸다.
“저희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박제순과 민병석의 말에 우리 일행은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학생 시절 견학을 위해 몇 번 온 적이 있던 덕수궁, 아니 경운궁은 내 기억 속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하긴 21세기의 덕수궁은 내년에 일어날 대규모 화재와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화전은 21세기의 모습과는 달리 2층 전각 구조였는데, 이는 중화전이 내년에 발생하는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될 때 우리가 아는 1층 전각의 모습으로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폐하. 독일 제국의 아달베르트 왕자 전하와 독일 사절단 입시옵니다.”
“들라하라.”
내관이 그리 고하자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