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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61화 (61/193)

61화 : 그립고도 낯선 고향이여 (2)

“호외요. 호외!”

1903년 6월.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 거리는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신문팔이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덕국(德國) 왕자가 조선에 온다고 합니다!”

“덕국 왕자? 4년 전에 한 번 오지 않았어?”

“아, 그건 황제의 동생이고! 이번에 오는 건 황제의 셋째 아들이랍니다! 셋째 아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갑작스러운 서양 왕족의 방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삼남인 아달베르트 왕자의 방한 때문이었다.

물론 독일 제국의 왕족이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불과 4년 전에 하인리히 왕자가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하인리히 왕자가 독일 황제의 남동생이었다면, 이번에 대한제국에 오는 것은 자그마치 황제의 셋째 아들이었다.

황제의 남동생이랑 황제의 아들을 비교한다면, 아무리 그래도 전자보단 후자가 더 인상 깊게 보이는 법이었다.

다만 지금 한성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아달베르트 왕자가 아니었다.

아달베르트 왕자와 함께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또 다른 인물이었다.

“덕국 왕자뿐만이 아닙니다. 덕국 황제의 목숨을 구한 조선인 남작도 함께 온답니다!”

“오오~!”

신문팔이의 말에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한스 폰 초이.

조선식 이름은 최한수.

조선 사람들은 꼬마 남작이란 별명으로 부르는 그가 대한제국에 온다.

이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조선인은 그 누구도 없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신문팔이에게 몰려든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참말인가? 꼬마 남작이 조선에 온다고?”

“참말이고 말고요. 나으리. 쇤네가 설마 거짓을 말하겠습니까요?”

신문팔이는 개화기답게 단발 차림에 깔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는 신문을 가리켰다.

“다 여기 이 신문에 적혀 있습니다. 어서들 사서 확인해 보세요.”

“허허, 이거 귀빈이 오는구먼. 거 신문 하나 줘 보게.”

“나도 한 부 주게나.”

“나도 나도!”

“거기 어디서 새치기여?!”

“빨리 사는 사람이 임자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완이 좋은 신문팔이의 말에 사람들이 너도나도 신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제국신문(帝國新聞)이나 황성신문(皇城新聞) 등 아달베르트 왕자와 한스의 방한 기사가 쓰인 한성의 신문이란 신문은 순식간에 동이 나기 시작했다.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신문과 잔뜩 쌓인 동전에 신문팔이가 함박웃음을 지은 것은 덤이었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화문에서 육조거리까지 한성의 거리란 거리는 신문을 읽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신문을 사지 못한 사람들 또한 양해를 구하고 신문을 가진 사람 주변으로 몰려가 기사를 확인했다.

그만큼 한스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매우 뜨거웠다.

“와, 정말 꼬마 남작이 오네.”

“분명 제물포로 오겠지?”

“고렇겠지. 그 4년 전에 왔던 덕국 황제의 남동생이란 양반도 제물포로 왔잖여.”

“우리 남작님이 고향에 왔는데 이거 환영회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한 남자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인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나라,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가냘픈 등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런데 그때 덕국이라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서양의 강대국에서 조선인이 귀족이 되었단다.

그리고 그도 모자라 청나라 황족을 무릎 꿇리며 조선 역사상 최악의 치욕이었던 삼전도의 굴욕에 대해 복수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의 그 어떤 선비도 지난 200년간 해내지 못한 일을 덕국의 꼬마 남작이 해냈다.

조선에서 태어난 자라면 이 어찌 통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어찌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기 장수 우투리 설화처럼 암울하고 어려운 시대엔 누구나 영웅을 바라는 법이었고, 꼬마 남작은 그 영웅이 되기에 제격이었다.

게다가 한스의 이야기가 입과 입을 통해 여기저기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졌다는 것도 한몫했다.

꼬마 남작은 어느새 조선인들에게 있어 어둠 속에 비친 한 줄기 빛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한성은 한스가 대한제국에 온다는 소식 이후로 누가 보면 구국의 영웅이 금의환향이라도 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정작 본인이 봤으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어이없는 것을 넘어 경악했을 테지만 말이다.

“꼬마 남작이 조선에 온다라.”

“어떻게든 그에게 연을 댈 수 없을까?”

물론 매국노와 예비 매국노가 넘쳐나던 구한말 아니랄까 봐, 한스를 통해 한몫 잡으려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야 독일 제국은 영국, 프랑스에 비견되는 강대국이었고 남작과 친분을 쌓는다면 독일 제국을 뒷배로 두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꿈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한스는 이런 쓰레기들을 상대해 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덕국 왕자가 또 온다고?”

그러나 대한제국 조정의 반응은 밖과는 사뭇 달랐다.

오히려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하인리히 왕자가 방한했을 때 대한제국 조정은 상당한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물론 하인리히 왕자 자체는 나름 호탕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같이 온 독일인 사절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오만하고 무례하게 굴었다.

양인들이 원래 그런 족속들이긴 했지만, 하인리히 왕자를 따라온 독일인들은 갑질은 기본에 대한제국 정부에 대놓고 독일 제국에 이권을 달라며 땡깡을 부리는 등 그 정도가 상당히 심했다.

그렇기에 그때를 기억하는 조정의 관료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소문의 꼬마 남작이 같이 온다지 않습니까. 저번처럼 저들도 무례하게 굴진 못하겠지요.”

“아. 최 남작 말이군요.”

하지만 역시 한스의 이름이 나오자 조정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황제인 고종도 꼬마 남작의 이야기에 상당한 흥미를 보였을 정도로 조정에서도 한스에 대한 관심이 컸다.

어쩌면 남작을 통해 독일 제국으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아무리 독일 황제의 신하라지만 어쨌든 조선인 아닌가?

피는 물보다 진한 법.

물론 조선에서의 삶보다 독일에서의 삶이 더 길었다지만,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듯 남작 또한 고향을 잊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대한제국은 어린아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상황이었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알력 다툼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대한제국 또한 그 존속을 위협받고 있었으니까.

“그건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것 아니요?”

다만 한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존재했다.

“애초에 남작이 과연 우리 조선을 도와줄 생각이 있겠소?”

“오히려 정명수처럼 덕국 황제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으로 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으음……. 하긴, 아니라곤 할 순 없지.”

타의로 고향을 떠나 강대국에서 성공한 자들이 고향에 돌아와 그 울분을 풀려는 듯, 온갖 행패를 부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원나라 때 기황후가 그랬고, 명나라 때 조선 출신 환관들이 그랬고, 청나라 때 정명수가 그랬다.

남작 또한 아주 어렸을 때 조선을 떠났다는 소문이 있던 만큼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그리고 조선은 고종이 보위에 오른 후, 그런 사정 있는 사람들을 만들 만한 일을 꽤 많이 저질렀다.

또한 정치 파벌에 따라서도 또 의견이 갈렸다.

우선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를 뒷배로 친일파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친러파들은 한스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일단은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는 친러파가 정말 러시아 제국의 힘으로 권력을 누리려는 사람들보단 수장 격인 이용익과 민영환처럼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달베르트 왕자와 한스의 방문이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인들은 이에 대해 별말이 없었고, 듣기론 소문의 꼬마 남작 또한 의외로 차르와 친분이 있다 하니 친러파들은 어디 한번 지켜보자는 반응이었다.

반면 친러파에 의해 권력의 중심에선 밀려났지만, 여전히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친일파들의 시선은 또 달랐다.

이들은 친러파와 달리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진짜배기 매국노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 남작은 어찌 다뤄야 할지 모르는 일종의 폭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덕국 황제가 일본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이미 한성에도 파다했으니 그들로선 더더욱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남작이 덕국 황제처럼 일본에 반감을 품고 있으면 어쩌지?’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지 않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리고 그것은 친일파들의 뒤에 있는 일본 제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이(崔, 최) 남작이 일본인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아달베르트 왕자와 한스 폰 초이 남작의 방한 소식이 적힌 신문을 내려놓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참 아쉽고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론 동양인이 유럽 귀족들 한복판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야시 공사는 다른 일본인들처럼 내심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길 바랐다.

만약 그랬다면 그가 이리 고민에 빠질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무척이나 마음이 든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꼬마 남작이 일본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아직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사의 비서가 그리 말했지만, 하야시 공사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렇다기엔 남작이 썼다는 소설이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불멸의 리 제독’

서양인의 입맛에 맞춰 과장된 오리엔탈리즘을 가미하긴 했지만, 일본에도 그럭저럭 알려진 소설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소설을 꽤 불편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조선과 이순신이었고, 주인공에게 당하는 악당은 다름 아닌 자신들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악역이 되는 것을 반기는 사람은 없다.

물론 이 소설만으로 남작이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다곤 판단할 수 없었다.

일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작은 워낙 어린 시절에 조선을 떠나서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하니까.

그냥 어렸을 때 들었던 이순신 이야기를 아무 생각 없이 책으로 낸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하야시 곤스케의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남작이 제 고향을 돕겠다고 나선다면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 처지에선 여간 곤란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은 조선, 그리고 그 너머의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과의 일전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만에 하나라도 독일 제국이 이 싸움에 끼어든다면?

‘그랬다간 일본은 말 그대로 끝이다!’

가뜩이나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도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세계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것은 물론 일본에선 대왕(大王)급 전함이라 부르는 고성능의 신형 전함까지 보유한 독일 제국과 싸우는 것은 패가망신으로 가는 길이었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한스는 러일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보단 일종의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를 몰랐다.

한스가 러시아, 그리고 영국과 밀약을 맺은 것은 관계자들만 아는 비밀 중의 비밀이었으니까.

“일단은 남작을 예의주시하도록 하지.”

“예. 공사님.”

하지만 이것은 이 모든 상상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다.

그리고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 가능성이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았고 말이다.

그렇기에 하야시 곤스케 공사와 친일파들은 친러파와 마찬가지로 일단 한스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흘러 6월 중순이 되었고…….

부우웅~

아달베르트 왕자와 한스가 탄 독일 제국의 군함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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