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그립고도 낯선 고향이여 (1)
“생각보다 이야기가 수월하게 끝났군요.”
“당연하지.”
비서의 말에 JP모건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담배 연기를 뿜었다.
“서로에게 손해 볼 것 없는, 이득이 되는 거래였으니까.”
“하지만 그 라디오란 것에 이만한 투자를 할 가치가 과연 있을까요? 미스터 모건께서는 테슬라로 인해 이미 한번 손해를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테슬라는 JP모건의 후원을 받아 워든클리프 타워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정작 성과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JP모건은 테슬라의 추가 투자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했고, 테슬라에 대한 후원을 끊으려고 했다.
이 이상 테슬라에게 투자하는 것은 그냥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테슬라로선 돈 하나 때문에 야박하게 굴면서 자신의 꿈을 수포로 만든 JP모건을 내심 원망했지만 말이다.
다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렇기에 JP모건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니콜라 테슬라는 천재야. 하지만 동시에 허황된 꿈속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몽상가지. 하지만 지금 그의 옆엔 친애하는 한스 폰 초이 남작이 붙어 있네.”
“한스 폰 초이 남작…….”
“그래.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지금의 테슬라는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고 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어. 마치 명확한 길과 비전을 본 사람처럼.”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아는 천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실제로 독일에 파견한 정보원이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어떤 성과도 없었던 워든클리프 타워 때와 달리 라디오 개발은 JP모건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분명 한스 폰 초이와 테슬라란 조합이 만들어낸 시너지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한스에겐 미래에서 보았던 라디오의 개념이, 테슬라에겐 그것을 구현할 기술력이 있었으니까.
물론 JP모건이라도 그 사실까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JP모건은 그 둘의 조합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워든클리프 타워의 실패를 만회할 정도로 큰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을.
그가 테슬라와의 악연과 워든클리프 타워의 미심쩍은 진실을 뒤로 하고 과감하게 라디오에 큰돈을 투자하기로 결정을 내린 이유였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어. 천재들이 만들어내는 발명품들이 나날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고 있지.”
“새로운 시장…….”
“생각해 보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멀리 있는 사람과 소식을 주고받으려면 편지를 보내야 했어. 그리고 편지가 상대방에게 도달하려면 며칠도 아니고 몇 주가 걸렸지. 하지만 지금은?”
전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미국의 전화 사업을 독점하고 있는 AT&T는 말 그대로 떼돈을 벌고 있었다.
트러스트 혐오자인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그 누구도 AT&T가 구축한 철옹성을 건드리지 못했고 말이다.
JP모건은 그것이 너무 부러우면서도 배가 아플 정도로 질투가 났다.
“라디오도 마찬가지란 것입니까?”
“지금까지 언론이라 하면 곧 종이 신문을 말한 것이었지. 하지만 라디오가 등장한다면 그 판도가 완전히 바뀌네. 이것을 미국 내에서 독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마어마한 이익으로 돌아올 거야.”
그리고 그 이익은 어마어마한 양의 달러가 되어 자신의 금고를 새롭게 채워 줄 것이다.
“워든클리프 사건을 그대로 묻어 버린 것도 그 때문이시군요.”
“말조심하게. 그것은 아까도 말했듯이 그저 ‘불행’한 사고였을 뿐이야.”
“네. ‘불행’한 사고였죠.”
어차피 독일 제국과 한스 폰 초이가 워든클리프 타워의 ‘불행’한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괜히 벌집을 들쑤시긴 보단 그냥 이 건을 영원한 비밀로 묻음으로써 남작의 신뢰를 사는 쪽이 더 나았다.
어린아이임에도 국제외교란 거대한 체스판에서 제멋대로 활개를 치는 녀석이다.
친분을 유지하면 분명 JP모건 자신에게도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남작이 아까 라디오 개발에 그 무슨 진공관이 필요하다고 했지?”
“3극 진공관입니다. 제가 공학 쪽엔 무지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것을 손에 넣게 해 줘야겠지.”
남작의 말에 따르면 본래 디포리스트란 과학자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던가?
“디포리스트. 이름은 들어 봤습니다. 아브라함 화이트라는 사업가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더군요.”
“그를 우리 쪽으로 영입해 올 수 있겠나?”
“예.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화이트는 상당히 뒤가 구린 사람이더군요. 그것을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좋군. 그리고 페슨든이란 캐나다인도 라디오 연구를 하고 있다던데.”
한스 폰 초이도 원래는 테슬라와 함께 그를 영입하려고 했다가 거절당했다던가.
당시 페슨든에겐 별생각 없이 내린 선택이었겠지만, JP모건이 개입한 이상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방해되는 장애물은 치워야지. 짓밟아 버려.”
“예. 미스터 모건.”
남들은 냉혹하다 하겠지만 이 시대에선 일상적인 일이었다.
당장 그 마르코니도 테슬라가 먼저 무선 전신 특허를 냈음에도 재판을 통해 그것을 무효로 만들었고, 테슬라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에디슨 같은 경우에는 사례가 너무 많아서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시대에 특허를 먼저 취득하기 위한 경쟁은 곧 전쟁이었고, 전쟁에서 비겁하단 말은 곧 칭찬이었다.
JP모건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시 제일 귀찮은 것은 초이 남작의 말대로 굴리엘모 마르코니겠지.”
마르코니는 순수한 과학자인 테슬라와 달리 사업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가 설립한 마르코니 무선 회사는 이미 세계의 무선 통신 시장을 선점한 상황.
분명 이쪽이 라디오를 발표하면 자신들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고소를 비롯한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이쪽을 짓밟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리 마르코니와 싸울 준비를 해야겠군.”
마르코니는 아직 테슬라가 라디오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알았으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고로 싸움이란 먼저 준비하는 자가 유리한 법이었다.
* * *
JP모건과 만나고 며칠 후.
워싱턴 D.C에서 베네수엘라 위기를 마무리 짓는 워싱턴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베네수엘라 정부를 대표한 보웬 전권대사는 독일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요구한 모든 청구에 정당성이 있음을 인정했고, 일부 항목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을 약속했다.
또한 베네수엘라는 푸에르토 카베요와 베네수엘라의 관문이라 불리는 라과이라를 통한 무역 관세 수입의 30%를 베네수엘라가 진 부채를 갚는 데 보태기로 합의했다.
때문에 독일 제국은 베네수엘라의 자원을 미국과 공동으로 개발할 것을 약속받은 대신,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청구액을 조정해 주었다.
제 코가 석 자였던 영국과 받을 건 다 받은 이탈리아는 큰 불만 없이 이에 동의했고 말이다.
다만 그 자원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모든 합의를 마친 열강들은 다음 달 초에 베네수엘라에 대한 해상 봉쇄를 해제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베네수엘라 위기는 모두가 그럭저럭 만족하며 끝이 났다.
베네수엘라 정부와 시프리아노 카스트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미국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진 나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미국을 떠날 준비를 했다.
개인적으론 포드를 비롯한 미국의 자동차 산업 관계자들과 만나거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한창 비행기 연구에 매진 중인 라이트 형제와도 접촉해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괜찮아. 포드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것은 포드 모델 T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1908년이고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또한 꽤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으니까.’
내 몸이 여러 개가 아닌 이상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차근차근 나아가자. 차근차근.
“남작과 만나서 즐거웠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님.”
“자네가 다음에 미국에 올 기회가 있다면 그땐 내 가족들도 소개해 주지. 물론 그때 내가 대통령 자리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
루스벨트 대통령이 내 손을 붙잡곤 호탕한 목소리로 웃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백악관의 주인으로 있는 것이 아마 1909년 초까지였던가?
그 안에 내가 미국에 다시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올해는 몰라도 내년부터는 여러모로 바빠질 테니까.
그렇게 루스벨트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또 한 번의 고통스럽고 긴 항해 끝에 독일로 돌아온 나는 포츠담에서 나름 평화롭고 조용한 봄을 보내며 이젠 어떤 의미로 지긋지긋해진 ‘불멸의 리 제독’을 끝내는 데 집중했다.
[불멸의 리 제독, 드디어 최종화!]
그리고 여름이 다가오기 시작한 5월 말.
‘불멸의 리 제독’의 최종화가 베를린 모르겐포스트에 연재되었다.
“좋은 마지막이었다…….”
“리 제독, 그는 전설이야.”
이순신의 죽음이라는 결말에 내심 지난번처럼 격앙된 반응이 나올까 걱정했지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독자들은 영웅과도 같은 리 제독의 최후에 여운을 느끼며 나름대로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적어도 셜록 홈즈처럼 리 제독을 살려 내라는 사람들이 있진 않았으니까.
셜록 홈즈는 가상의 인물이기라도 했지, 이쪽은 어디까지나 실존 인물.
아무리 그래도 이순신 장군님을 번개 숨결을 내뿜는 좀비로 만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스, 나와 같이 코레아로 가자!”
“예?!”
그러나 지난번처럼 예고도 없이 등장한 아달베르트 왕자의 말에 나는 또다시 평정을 잃고 말았다.
왕자에 대한 예의도 함께 말이다.
“코레아로 가자니 그건 또 뭔 개소리입니까?”
“개소리가 아니야. 진짜로 코레아로 갈 거야. 네 고향 말이야!”
“아, 제발. 아달베르트 왕자님, 설마 리 제독을 추모하겠다고 머나먼 극동까지 가시겠단 소리는 아니겠죠.”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달베르트 왕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그의 목소리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만약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명탐정이었다면 그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범인은 바로 너!’라고 외쳤을 거다.
“게다가 내 멋대로 결정한 일도 아니야. 이번에 극동 항해에 참여하게 됐는데 코레아, 그러니까 대한제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거든.”
“아, 그러고 보니 왕자님께선 해군이었죠.”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달베르트 왕자가 대한제국에 가게 된 것은 공적인 임무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코레아를 방문하는 김에 겸사겸사 리 제독의 고향에 가서 그분을 모신 사당에 인사를 드릴 수도 있지만!”
“…….”
역시나 사적인 감정도 과도할 정도로 충분히 들어가 있었지만.
“그나저나 가시려면 혼자 가시지, 왜 저까지 데려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야 한스 넌 한국인이잖아.”
“그건 그렇죠……?”
“한국말도 할 수 있고.”
“그것도 그렇죠……?”
“그러니 통역 겸 가이드로 너만 한 사람이 이 독일 제국에 또 있겠어?”
“허…….”
그러니까 날 번역기 겸 관광 가이드로 써먹으시겠다?
“물론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건 아니야. 너도 오랜만에 고향에 갈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전 고향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는데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아달베르트 왕자가 그리 말하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생떼를 썼다.
내 잘못이다.
아달베르트 왕자가 원래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쓴 소설이 아달베르트 왕자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다음 주말 예배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하자.
‘그래도 대한제국이라.’
내 전생이 전생인지라 호기심이 안 드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년이면 러일전쟁이 터진다.
대한제국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일본에 장악되고 다음 해에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며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되면 내가 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마 해방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기회가 있을 때 대한제국에 한번 방문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한국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싶기도 했으니까.
“후……. 언제쯤 출발하는데요.”
“오! 가기로 했구나. 출발은 2주 뒤야!”
내가 대한제국에 가기로 결정을 내리자 함박웃음을 짓는 아달베르트 왕자.
그렇게 나는 그립고도 정겨운 고향에 가게 되었다.
미국에 갔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긴 항해를 견뎌야 하는 것은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