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59화 (59/193)

59화 : JP모건

나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간의 대화가 마무리된 후.

베네수엘라 문제에 대한 미국과 베네수엘라, 독일과 영국의 협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물론 여기에 베네수엘라의 의지는 거의 관여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전권대사인 허버트 보웬이 아예 베네수엘라 정부를 대리해서 협정에 나섰기 때문이다.

말로는 베네수엘라 정부의 뜻을 최대한 대변하겠다는데, 당연하게도 그것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나는 4국 간의 공식 외교회담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나는 정식 외교관이 아닌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파견된 밀사 같은 것이었으니까.

빌헬름 2세를 대신해 비공식적으로 루스벨트와 비밀 합의를 할 순 있어도 외교관이 아닌 내가 공식 회담에 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다 끝났기에 낄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거기 끼어 봤자, 베네수엘라에 얼마나 돈을 뜯어 낼 것인가 하는 친애하는 제국주의 친구들의 지루한 이야기만 며칠 내내 나눠야 할 뿐이다.

시간은 금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격언에 따라 나는 협정은 주미 독일 대사에게 맡기고 독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게 주어진 이틀이란 짧은 시간을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미국에 온 김에 우선 디포리스트랑 접촉해 보자.”

개인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디포리스트는 아브라함 화이트라는 기업가의 후원을 받아 ‘아메리칸 디포리스트 무선 전신 회사(American DeForest Wireless Telegraph Company)’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무선 통신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머물 곳이 있는 사람이니 테슬라처럼 파트너로서 직접 고용은 어려워 보였지만, 3극 진공관 개발에 대한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만약 페슨든 때처럼 거절당하면 가뜩이나 라디오 연구로 바쁜 테슬라에게 3극 진공관이라는 과제를 하나 더 던져 줘야 했으니까.

나는 착한 주인님이기에 내 노예 1호를 가혹하게 굴리고 싶진 않았다.

아직은 말이다.

똑똑.

“남작님. 남작님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객실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서신이 올 일이 있던가?’

독일에서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편지가 아니라 훨씬 빠른 전보로 왔을 테니까.

‘그러면 미국 정부에서 보낸 걸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사람을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몸을 기대고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객실 문을 열고 사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편지지는 딱 보기에도 최상급의 품질을 자랑하는 고급스러운 종이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상당한 부자인 모양이다.

“응?”

그러나 편지지 앞에 쓰여 있는 서명을 보자마자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것이 이 서신을 내게 보낸 사람은 나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J.P.모건이 한스 폰 초이 남작님께.]

존 피어넌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흔히 JP모건이라 알려진 악명 높은 강도 귀족이자 JP모건 은행의 총수께서 나에게 서신을 보내셨다.

‘JP모건이 여기서 왜 나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사업이나 금융 쪽에 손을 담근 것도 아닌데 JP모건이 대체 나에게 서신을 보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설마 테슬라 일 때문인가?”

JP모건이 나에게 관심을 가질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테슬라를 포섭하기 위해 추악한 기억들과 함께 터트려버린 워든클리프 타워.

그리고 워든클리프 타워는 니콜라 테슬라가 JP모건의 후원을 받아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설마하니 워든클리프 타워를 날려 버린 장본인이 나라는 걸 JP모건이 안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JP모건이 굳이 1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이 이야기를 꺼낼 이유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증거도 없었다.

설마 JP모건이 날 의심한다고 해도 내 쪽에선 증거 있냐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아무리 날고 긴다는 JP모건이라도 독일 황실을 뒷배로 두고 있는 나를 증거도 없이 억지로 추궁할 순 없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 내 신분은 빌헬름 2세가 미국에 파견한 특사.

잘못하면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원 역사에서 반독점법을 휘두르며 강도 귀족들의 배를 쨌을 정도로 트러스트 혐오자인 루스벨트 대통령도 옳다구나 하고 JP모건을 때려잡을 테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JP모건이란 금융계의 거인은 그 정도로 지능이 낮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우선 내용 확인부터 해 보자.’

나는 편지 칼로 천천히 JP모건의 서신을 뜯어 보았다.

서신엔 JP모건의 친필인지, 아니면 비서가 대신 쓴 것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깔끔한 글씨체로 상당히 긴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장식용 미사여구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서신의 내용을 간단하게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랬다.

[친애하는 한스 폰 초이 남작님께.

평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내 의심과 의문이 더 커졌다.

그 JP모건이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 아픈 일이 잔뜩일 것 같은 예감이다.

“……그냥 만나는 거 거절할까?”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떤 의도가 있든 JP모건쯤 되는 거물과 만나는 건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건과의 만남이 나에게 좋게 작용할지, 나쁘게 작용할진 아직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지만 그래도 그의 초대를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책상으로 가서 JP모건에게 보낼 답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JP모건이 내가 머물고 있는 워싱턴 D.C의 윌라드 호텔(Willard Hotel)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내가 자신을 만날 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한 듯.

* * *

“이리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작님. 존 피어넌트 모건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모건 씨. 한스 폰 초이 남작입니다. 모건 씨에 대한 이야기는 독일 제국에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JP모건에 대한 내 첫인상은 ‘코가 진짜 크네’였다.

그냥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금융왕의 코는 솔직히 지금까지 긴장한 것도 다 잊을 정도로 인상적인 크기를 자랑했다.

“자. 앉으시죠.”

코 큰 아저씨, 아니 JP모건의 말에 나는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살짝 바라보자 호텔의 고용인들이 헐레벌떡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긴, 호텔 측에선 갑자기 JP모건쯤 되는 거물이 예고도 없이 나타났으니, 지금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본래 윌라드에 오면 샴페인을 주문하는데 오늘은 사양해야겠군요.”

“아하하,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필요할 때 빼곤 술을 즐기진 않을 것 같다.

전생에서도 술은 약해서. 솔직히 현생이라도 다를 게 있을까 싶다.

“그럼 오늘은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는 것에 만족해야겠군요. 지배인!”

“예. 미스터 모건.”

“최상급으로. 알겠나?”

“물론입니다.”

호텔 지배인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일단은 나름 귀족이기에 나도 이 호텔에선 황인종치곤 꽤 이례적으로 대우받고 있다곤 생각했는데, JP모건은 그냥 차원이 달랐다.

역시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 미국에선 그냥 돈이 많은 사람이 갑이다.

물론 21세기라도 그다지 다를 건 없었지만.

잠시 후, 급사들이 쟁반에 갖가지 디저트들을 담아 나와 JP모건이 앉은 테이블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꽤 장관이었던지라 나도 모르게 눈이 즐거워질 정도다.

지나치게 화려한 것이 좀 천박해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괜히 유럽의 귀족들이 미국 자본가들을 졸부로 여기는 게 아닌 듯싶다.

‘나도 귀족이 다 됐네.’

사람은 자리가 만드는 법이라니 나도 모르게 물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와 JP모건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잊고 꽤 오랫동안 디저트를 탐닉했다.

특히 모건은 상당히 비대한 체구를 가진 것답게 꽤 식탐이 많아 보였다.

그냥 윌라드 호텔의 디저트를 먹고 싶어서 날 만나러 온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모건 씨께선 왜 저와 만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까?”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슬슬 단 것이 물리기 시작한 나였다.

JP모건은 나를 힐끔 바라보더니 포크를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외교회담이라면 루스벨트 대통령과 질리도록 하고 왔으니까요. 무엇보다 비효율적이기도 하고요.”

“비효율적이라 마음에 드는 단어로 군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JP모건이 말했다.

“남작의 저택에서 니콜라 테슬라가 만들고 있는 라디오.”

“!”

“저 또한 투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테슬라가 라디오를 만들고 있는 것은 나와 어쩌다 보니 테슬라를 떠맡게 된 마르가레테 공주의 가족뿐이었으니까.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이군요.”

“꽁꽁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한때 테슬라의 후원자였던 사람으로서 조언을 하나 하자면, 테슬라는 그리 조심성 많은 친구가 아닙니다.”

쯧. 독일 제국으로 돌아가면 한번 쓴소리를 해야겠다.

내가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하필이면 JP모건에게 들켜?

‘아니, 애초에 JP모건이 왜 바다 건너 독일로 떠난 테슬라를 신경 쓴 거지?’

테슬라가 성과를 못 내니까 냉정하게 바로 후원을 끊으려고 했던 인간이 인제 와서 테슬라에 미련을 가질 리도 없을 것이다.

역시 워든클리프 타워 사건 때문일까?

내가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 JP모건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죠. 비밀은 지킬 테니. 전 남작님과 친구가 되고 싶거든요.”

“친구라. 보통 모건 씨 같은 분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의미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하하. 그런 적도 있지만, 이번만큼은 아닙니다. 전 그저 돈을 많이 벌고 싶을 뿐입니다.”

“이미 미국 내에서도 한 손에 꼽힐 부자이시면요?”

“돈을 만지는 일을 하는 자들이 걸리는 저주 같은 것이거든요. 그리고…….”

남작과 테슬라의 ‘라디오’란 물건에서 진한 돈 냄새가 풍겨 오거든요.

JP모건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큰 코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아까도 했던 말이지만 참으로 커다랗고 튼실한 코다.

“대가로 무엇을 원하십니까?”

“미국 내에서 라디오 사업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가지고 싶습니다. 그 대가로, 저는 라디오 연구와 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지원을 원하시는 대로 투자하겠습니다.”

미국 내에서의 독점권이라.

이는 라디오의 가치를 모르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순순히 JP모건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 못 한다.

“라디오의 미국 내 독점권이라. 모건 씨께서 언론 쪽에도 관심이 많으신 줄은 몰랐군요.”

“이제 슬슬 신문이 언론을 독점하는 시대를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퓰리처와 허스트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퓰리처상으로 유명한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현 미국 언론계를 양분하는 신문왕들은 JP모건이 라디오로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라디오는 그냥 먼 곳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기한 기계가 아닌 신문이 독점하고 있는 언론계를 뒤흔들 새로운 언론매체였으니까.

“무선 통신 쪽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마르코니도 신경 써야 할 테고요.”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나서는 쪽이 남작에게 이득이겠죠. 아닌가요?”

그건 그랬다.

어차피 나와 테슬라가 라디오를 세상에 발표하면 마르코니와는 부딪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땐 독일 제국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JP모건이 나 대신 마르코니와 싸워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퓰리처와 허스트는 모건의 말처럼 내가 신경 쓸 사람들은 아니고.’

“하지만 테슬라 씨가 과연 모건 씨를 반길까요? 제가 알기론 워든클리프 타워 건으로 모건 씨에게 꽤 이를 갈고 있던데요.”

“후원 문제로요? 하! 그 철탑이 얼마나 쓸모없었는지는 남작도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다.

“차라리 어떤 의미론 ‘불행’한 사고를 당한 게 나았을 정도죠.”

“아. 그 ‘불행’한 사고 말이군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나와 JP모건.

잊지 말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행한 사고에 불과하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우리는 더 앞을 내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딱!

모건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검은색 가방을 내 앞에 올려놨다.

“물론 맨입으로 제가 남작께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닙니다.”

“예? 이게 무슨…… 어?”

딸깍!

모건의 비서가 가방을 열자 나는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가방의 안은 영롱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주아주 영롱한 황금빛 말이다.

‘Hello!’

헉! 순간 귀에 들려선 안 되는 환청이……!

정신 차려야 한다. 이리 쉽게 넘어가면 테슬라를 볼 명목이 없다.

“모건 씨! 지금 절 돈으로 사려는 것입니…….”

탁!

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금괴가 당긴 가방과 똑같이 생긴 가방 2개가 더 올라왔다.

“아직 더 많이 있습니다.”

나는 JP모건을 향해 말했다.

“계약서는 가지고 오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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