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루스벨트와의 대담
1903년 1월, 워싱턴 D.C. 백악관.
“전생 시절엔 내가 이곳에 발을 디딜 거라곤 꿈에도 몰랐는데.”
나는 감상에 젖은 얼굴로 백악관의 복도를 둘러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아직 트루먼이 대대적으로 손보기 이전이라 내가 아는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지만, 그래도 백악관은 백안관이었다.
게다가 천하의 미국 대통령, 그것도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원조 호카게 바위 러시모어산에 얼굴이 박제된 인물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정찬을 함께하게 되었으니.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떤 얼굴을 지을지 참 궁금하다.
“자, 이리로 오게나.”
내가 백악관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루스벨트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대통령의 호의에 미소로 답하며 그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처음엔 내 가족들도 부를까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간 식탁이 너무 시끄러워질 것 같더군.”
“하하, 그렇습니까?”
루스벨트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닮아 혈기 왕성한 사고뭉치였으니, 이런 자리에 부르긴 좀 그랬을 거다.
특히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장녀인 앨리스 루스벨트는 괴팍한 것도 모자라 망나니 그 자체였고 말이다.
‘1905년에 대한제국에 방문했을 때 명성황후의 능에서 승마복 차림으로 석마를 타고 인증 사진 찍은 것만 해도 그 인성을 알 수 있지.’
21세기 한국인의 눈으로 봐도 쌍욕이 나올 짓인데 당시 조선 사람들 눈엔 그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뻔할 뻔 자다.
심지어 앨리스 루스벨트의 도를 넘는 무례에 대한제국에 있던 서양인들은 물론 미국에서도 경악하며 그녀를 비난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비웃음을 터트렸다던가.’
어떤 의미로 참 대단한 여자다.
루스벨트가 왜 이 자리에 그녀를 데려오지 않았는지 알 것만 같다.
자식은 부모가 잘 아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그 ‘카이저를 구한 소년’을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대서양 너머에서도 제 이름이 꽤 알려진 모양이네요.”
“자네도 꽤 유명하지만, 자네의 소설이 더 유명하지. ‘불멸의 리 제독’은 나 또한 자주 즐겨 읽는다네.”
루스벨트는 그리 말하며 나에게 커피를 들 것을 제안했다.
‘윽!’
커피를 입에 대자마자 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쓴맛에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하필이면 에스프레소였다.
“이런. 입에 안 맞는가?”
“아직 제 입맛이 어린애 입맛이라서요.”
나는 어린애의 재롱잔치를 보는 것처럼 할아버지 미소를 짓고 있는 루스벨트를 향해 아직도 혀 위에 감돌고 있는 쓴맛을 억지로 참아 가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옆에 있던 급사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여기에 물을 좀 타서 주시겠습니까? 가능하면 얼음도.”
“예?”
급사는 차마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그리 되물었다.
아무래도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결말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말을 바꾸지 않고 계속 지긋이 쳐다보자 급사는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내가 주문한 대로 커피를 다시 타 왔다.
한겨울에 먹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얼마나 맛있는데.
민트 초코도 그렇고 하와이안 피자도 그렇고, 세상에는 맛알못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 이제야 좀 먹을 만하네요.”
“……그게 정말 맛있나?”
“마셔 보시면 압니다. 이게 또 묘하게 중독되는 맛이거든요.”
“으음. 나도 같은 거로 하나 주게.”
호기심이 생겼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도전해 보려는 루스벨트.
덕분에 급사는 피눈물을 흘리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가져왔다.
아아를 조심스럽게 음미한 루스벨트는 묘한 얼굴로 자신의 커피잔을 들여다보았다.
“재밌는 맛이로군.”
그리 중얼거린 루스벨트는 아메리카노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는지 커피를 계속 홀짝였다.
역시 미국인답게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아볼 줄 알았다.
“그나저나 독일의 신형 전함의 성능엔 깜짝 놀랐네.”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말씀이시군요.”
“우리 듀이 제독이 큰 인상을 받은 모양이더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사탕을 달라고 떼쓰는 남자애처럼 우리도 프레드릭(Frederick)급을 도입해야 한다며 종일 노래를 부르고 다니지 뭔가.”
듀이 제독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미국에서 가장 유능하고 노련한 제독이 드레드노트의 가치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몰라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프레드릭급이라.
아무래도 이 세계에선 드레드노트 대신 프레드릭 또는 프리드리히급 전함이란 이름으로 알려지는 모양이다.
“덕분에 의회에선 해군이 너무 예산을 많이 요구한다고 곡소리를 내고 있어서 양쪽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네.”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도 영국에 비하면 낫다.
영국은 밸푸어 총리와 피셔 제독의 주도로 기존 전함들 처분하고 그 돈으로 드레드노트를 도입하려고 했는데, 가뜩이나 해상 패권이 위태로운 상황에 드레드노트가 건조되는 동안 해군 공백이 생길 수도 있다며 야당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개판이 났더라.
“그래. 그래서 나와 우리 정부를 고생하게 만든 독일 제국은 이번 베네수엘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길 원하시나?”
“!”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본론으로 들어가며 루스벨트가 본색을 드러냈다.
이것 참 훌륭한 태세 전환이다.
나는 침착하게 언제라도 날 잡아먹을 기색인 눈앞의 회색곰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에 깍지를 끼었다.
“베네수엘라가 독일에 진 외채 상환의 재이행.”
“그리고?”
“그리고 베네수엘라 내전은 물론 이번 사태로 인해 카스트로에 의해 피해를 독일인들이 받은 피해에 대한 보상금과 사태 해결을 위해 소요된 금액의 전부. 그리고 무역에 대한 관세 혜택 또한 요구하는 바입니다.“
“하하하하! 이 친구야.”
루스벨트가 안경을 슬쩍 들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날 향해 딱 잘라 말했다.
“양심은 어디에 버리고 왔나?”
“이번 사태는 베네수엘라 정부에 모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독일 제국으로선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베네수엘라가 그 조건에 동의할 것이라곤 도저히 내 입으로 말할 수 없군.”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어차피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대리할 것이면서.”
내 말에 루스벨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부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독일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어 보이지만.
”외채 상환의 재이행이야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니 넘어가지. 내전으로 인해 독일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금 또한 독일 측이 요구하는 금액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정해 준다면 동의하고. 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네.”
루스벨트가 딱 잘라 말했다.
미국은 독일이 빚을 무기로 베네수엘라를 제 입맛대로 휘두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만약 베네수엘라가 그 금액을 못 내겠다면, 독일로서는 다른 것으로 받아 낼 수밖에 없군요. 이를테면 베네수엘라가 독일에 특혜를 준다거나…….”
쿵!
특혜란 단어에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스벨트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사실상 독일이 베네수엘라에 간섭할 권리를 달라는 소리니까.
또한 독일에 특혜를 약속하면 다른 유럽 열강들도 연달아 베네수엘라에 자신들도 독일처럼 대우해 달라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것은 먼로 독트린의 침해였고, 루스벨트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남작. 독일이 베네수엘라에 특혜를 빌미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우리 미국이 받아들일 것 같나?”
그럴 줄 알았다.
나도 특혜 쪽에는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탐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러면 자원 채굴권은 어떻겠습니까?”
“자원 채굴권?”
“예전에 베네수엘라에 자원환경에 관한 논문을 본 적이 있는데, 베네수엘라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석유라는 말에 루스벨트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우리 독일이 혼자 베네수엘라 석유를 독차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흐음?”
“좋은 건 친구랑 같이 나눠 먹는 법 아니겠습니까? 같이 나눠 드시죠.”
베네수엘라엔 막대한 양의 석유가 잠들어 있다.
매장량만 따지면 사우디 이상이라고 했던가.
물론 베네수엘라 석유는 미국 석유는 물론 중동 석유보다 질이 떨어지는 데다가 대부분의 남미 석유가 그렇듯 중질유라는 크나큰 단점 때문에 원 역사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이 다 끝나갈 때쯤에야 채굴이 시작되었다.
21세기에도 미국이 가까운 베네수엘라를 내버려 두고 중동 석유에 집착한 이유이기도 했고.
‘그래도 석유잖아.’
돈과 석유는 언제나 옳았다.
정 못 쓸 것 같으면 나중에 영국한테 지분을 양보하고 중동 석유 쪽 지분을 얻어 오면 된다.
일단 석유에 대한 지분을 확보해서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어쨌든 같이 베네수엘라 석유를 뜯어먹자는 말에 루스벨트는 조금 전 태도와 달리 크나큰 고민에 빠졌다.
석유가 탐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게다가 생각해 보십시오. 록펠러와 스탠더드 오일의 손이 닿지 않은 유전입니다. 트러스트 싫어하기로 유명하시던데 나중에 대통령님께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참…… 흥미로운 제안이군.”
루스벨트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원 역사에서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카네키의 US 스틸 등 강도 귀족들의 독점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반독점법이란 칼을 휘둘렀던 루스벨트다.
관심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기 시작한 루스벨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석유보다고 이것이 내게 가장 중요했다.
“만약 제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신다면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선물?”
“대통령 각하, 혹시 노벨평화상에 관심 있으십니까?”
어느새 몸에 익숙해진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 * *
“허! 노벨평화상이라고?”
루스벨트는 눈앞의 어린 동양인 남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흥미로운 소년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만나보니 훨씬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또 영악한 데다가 뻔뻔하기 그지없었고 말이다.
설마하니 베네수엘라 석유를 이참에 미국이랑 독일이 나눠 먹자고 제안해 올 줄이야.
루스벨트로서도 절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안건이었다.
게다가 베네수엘라 유전은 세계 석유 시장을 사실상 독점한 존 데이비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의 스탠더드 오일을 견제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 또한 베네수엘라에 잠들어 있을 거라는 보고서를 읽어 본 적 있었다.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질은 몰라도 양만큼은 대단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베네수엘라의 고질병인 내전 문제 때문에 제대로 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루스벨트가 독일에 한 발짝 양보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갑자기 노벨평화상이라니.’
관심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이 자리에서 나오기엔 뜬금없는 단어였다.
“베네수엘라 문제를 중재했다고 스웨덴에서 노벨평화상을 줄 것 같진 않다만.”
“베네수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러시아, 그리고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죠.”
“호오, 러시아와 일본이라.”
미국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두 나라의 이름에 루스벨트는 그제야 남작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파악했다.
작년 이맘때쯤 체결되었던 영일동맹으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긴장도는 미국 또한 예의주시할 정도로 날이 가면 갈수록 높아져만 가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태평양에서의 이권 때문이라도 극동의 정세를 민감한 눈으로 바라보던 미국과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곧 두 나라 간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설마하니 나보고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이면 둘 사이를 중재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해가 빠르시군요.”
“러일전쟁 문제로 노벨평화상을 받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왜 독일 제국이 이 건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지? 독일이 중국에 조차지를 가지고는 있다지만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낄 이유는 없지 않나.”
루스벨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궁금증은 남작의 이어진 말에 의해 경악과 함께 해소되었다.
“우리 독일 제국은 극동에서의 균형을 바랄 뿐입니다.”
“이런 우라질. 영국과 손을 잡았군.”
자신이 아는 독일 제국은 외교적 균형 따위에 관심이 없는 족속들이었다.
애초에 균형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며 남의 전쟁에 끼어들려는 것은 오로지 영국밖에 없었다.
남작도 뻘쭘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크흠. 미국과 대통령님께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요. 러시아가 이겨서 태평양으로 나오는 것도, 일본이 이겨서 그들이 태평양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미국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기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원 역사에서 루스벨트는 미국의 태평양 이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측근인 전쟁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를 파견해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밀약을 맺는다.
미국은 일본이 한반도를 먹는 것에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일본도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 지배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진주만을 기습해 버릴 때까지 계속 유지된다.
“러일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이 양국 간의 평화를 중재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독일은 미국의 제안에 따라 베네수엘라에 요구한 조건을 어느 정도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정하겠습니다.”
“거기에 석유 건도 포함되어 있겠지?”
“물론입니다.”
“중재 내용은?”
“러시아가 북만주를 차지하는 대신 한반도와 뤼순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흠. 괜찮군.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이 이를 받아들이겠는가?”
“일본이야 어차피 영국의 사냥개고, 러시아도 반대하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이를 받아들인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대통령 각하께 이런 제의도 하지 않았겠죠.”
루스벨트는 한스 폰 초이 남작의 말에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미국에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괜찮은 제안이었다.
일이 계획대로 돌아간다면 미국과 자신의 위상은 확실히 올라갈 테니까.
게다가 남작의 말대로 노벨평화상도 좀 탐나긴 했다.
그렇기에 루스벨트의 고민이 끝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은 독일 제국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네.”
“훌륭하신 판단이십니다.”
루스벨트는 한스 폰 초이가 내민 작은 손을 붙잡고 악수를 하였다.
만족스러운 합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