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57화 (57/193)

57화 : 헬로우 미스터 프레지던트

“미국에 간다고?”

샌드링엄 하우스의 정원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던 조지 왕세자의 차남, 앨버트는 6촌 누나 빅토리아 루이제의 놀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독일어엔 익숙지 않아 루이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는 몰랐지만, 적어도 ‘아메리카’란 단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미국과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한국 나이로 세도 아직 8살밖에 안 된 앨버트였지만 요즘 영국이 베네수엘라 문제로 미국과 곤란한 상황에 부닥쳐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곤란한 상황이 무엇인지는 자세하게 몰랐지만 말이다.

“곧 새해인데 한스 너도 참 부지런하네. 저번엔 러시아더니 이번엔 미국이라니.”

“놀러 가는 거 아니에요. 다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거지.”

빅토리아 루이제와 마찬가지로 앨버트에겐 6촌 형에 해당하는 요아힘 왕자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비꼬듯이 말하자 한스 폰 초이 남작이 멋쩍게 웃으며 그리 대답했다.

“뭐야. 이번 새해도 같이 보낼 줄 알았는데.”

다만 루이제 누나는 남작의 미국에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볼을 부풀렸다.

“그것보다 나도 미국에 가고 싶어!”

아니, 남작 혼자만 미국에 간다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루이제 누나는 소심한 자신과 달리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했고, 고집도 셌다.

아버지는 6촌 누나의 그런 성격이 빌리 아저씨를 똑 닮았다고 자주 말했다.

“나중에 공주님이 더 크면 같이 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정말? 한스, 너 약속한 거다!”

그러나 이어진 남작의 말에 루이제 누나는 언제 찡그렸냐는 듯 다시 얼굴을 펴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화를 내다가 갑자기 또 기분이 좋아지다니.

여자 형제라곤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 여동생 하나밖에 없었던 앨버트는 6촌 누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에 형 데이비드가 남작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면서 루이제 누나를 놀렸다가 화가 난 건지 얼굴이 새빨간 토마토처럼 붉어진 누나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인 일도 그렇고, 여자애들의 감정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만 남작이란 사람은 어린아이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6촌 누나의 감정보다도 더 불가사의한 존재였지만 말이다.

‘일단 착한 사람인 것은 맞는 거 같아.’

남작은 자신이 말을 더듬는 것을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바보 취급하지 않고 항상 친절하게 대해 주는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다.

형 데이비드는 저번에 아버지한테 크게 혼난 것 때문에 남작이 무척이나 싫어졌는지, 노랭이가 꼴값을 떤다고 몰래 중얼거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앨버트는 남작을 좋아했다.

남작은 자신과 요아힘 형, 루이제 누나에게 항상 새롭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문에 따르면 남작은 어른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똑똑하다는데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계속 샌드링엄에 있으면 좋을 텐데.’

앨버트는 내심 그리 아쉬운 소리를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소리였다.

남작은 아버지의 사촌인 빌리 아저씨네에서 살았기에 얼마 후면 자신의 6촌 남매들과 같이 독일로 돌아갈 테니까.

“그, 그, 그래도 언젠, 젠가 기회가 되, 되, 되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앨버트 왕자, 먼 훗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훌륭하게 이끌었던 명군 조지 6세가 되는 어린 소년이 작게 미소 지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 * *

“독일에서 특사를 파견한다고?”

“그렇습니다. 대통령 각하.”

“거 행동 한번 참 빠르구만.”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보좌관에 보고에 목이 답답했는지 넥타이를 풀며 그리 비꼬았다.

그 또한 영국만큼이나 일부러 시간을 끄는 독일 제국의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던 차였다.

“머저리 같은 바닷가재 놈들 때문에 이 무슨 고생인지.”

물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영국의 오판을 그대로 수용한 미합중국 해군부도 문제가 있었지만.

원래 똑같이 나쁜 짓을 저질러도 내 자식보단 남의 자식이 더 못돼 보이는 법 아니겠는가?

“하긴, 드레드노트가 그 정도로 위험한 장난감인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것을 만든 독일인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루스벨트는 생각만 해도 목이 타는지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할 행동이라기엔 품위가 없었지만, 아메리칸이라는 종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이 카우보이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덕분에 늙은 듀이에게 욕만 잔뜩 들어먹었군.”

“아, 그땐 정말 무시무시했죠.”

루스벨트의 보좌관이 그때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베네수엘라에서 돌아온 듀이 제독은 백악관에 들어서자마자 루스벨트의 멱살을 잡고 속사포처럼 온갖 욕과 분노를 쏟아 냈다.

‘독일 놈들이 그런 괴물을 가지고 있었다면 미리 말해야지. 테디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나름 한 성깔 하는 루스벨트로서도 뭐라 변명할 거리가 없었던 타당한 말이었다.

유럽 함대와 싸우지 않고 곧바로 물러서길 결정한 듀이 제독의 판단이 아니었다면 미국 함대는 그야말로 큰 낭패를 봤을 테니까.

‘그리고 난 쓸데없는 짓을 해서 함대를 날려 먹은 죽일 놈이 되어 지금쯤 백악관에서 짐을 싸고 있었겠지.’

지금 영국 총리는 드레드노트를 무시한 것 때문에 여론이 그 지경까지 갔다던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루스벨트에게 향한 비난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루스벨트가 듀이 제독의 무례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끼던 위스키를 그에게 선물한 이유였다.

물론 비난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대포 한 번 안 쏴 보고 물러난 미국 함대의 행동에 이럴 거면 대체 베네수엘라에 함대는 왜 보냈냐는 야당과 여론의 질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미국인들은 자존심과 자부심 하나만큼은 유럽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곧 독일 제국의 신형 전함에 대한 가치가 밝혀지자 적어도 야당의 정치적 공세는 조금이나마 수그러들었다.

갑자기 저런 게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느냐는 루스벨트의 주장은 부정 못 할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듀이 제독의 빠른 판단 덕분에 미국이 이번 사태 때문에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것도 없었다.

물론 허스트를 비롯한 지긋지긋한 언론 놈들은 아직도 시끄러웠지만.

이대로 대통령 한 번만 하고 말 것도 아니었던 만큼, 지금 루스벨트에겐 언론을 입 다물게 하고 여론의 분노를 잠재울 만한 변화가 필요했다.

베네수엘라와 유럽 열강들의 평화협상은 그 변화로 딱 안성맞춤이었다.

미국이 중재를 주도하면 적어도 체면은 차릴 수 있을 테니까.

“카스트로 그놈이 말을 들어 먹어서 그나마 다행이군.”

베네수엘라에 대한 영국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해양 봉쇄와 항구 포격에 보복한단 이유로 유럽인들을 체포하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카스트로는 결국 미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먼 곳에 사는 깡패보다 이웃집에 사는 양아치가 더 무서운 법이었으니까.

그렇게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루스벨트는 카스트로를 믿을 수 없었기에 보웬 대사가 베네수엘라 정부를 대신하여 협상할 것이라고 통보 아닌 통보를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드레드노트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도 미국에 중재에 매우 긍정적이었다.

허나 독일은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 듯 시간을 끌었다.

루스벨트가 알고 있는 독일 제국 특유의 오만한 외교 방식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 동안 루스벨트가 독일의 행동에 애가 타던 중, 드디어 독일이 주미 독일 대사를 통해 미국의 요청에 대한 답변을 전달했다.

베네수엘라 위기를 종결짓기 위한 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특사를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분명 이참에 베네수엘라에서 받아 낼 수 있는 건 전부 받아 내려 하겠지.”

이를테면 최혜국 조항이라든가.

물론 시어도어 루스벨트로선 이를 용납할 생각은 절대로 없었지만 말이다.

그건 먼로 독트린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였으니까.

다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독일이 원하는 모든 것을 내줄 수도 없었다.

무너진 미국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선 적어도 독일의 요구를 줄일 수 있는 데까지는 줄여 봐야 했다.

“그나저나 독일의 특사는 대체 누가 온다던가?”

“그 무슨 남작이라고 했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작?”

융커로군.

보좌관이 자료를 뒤적거리는 사이, 루스벨트가 얼굴을 찌푸렸다.

자유를 사랑하는 트루 아메리칸이었던 데다가 이 시대 기준으로 나름 진보적인 편에 속했던 루스벨트는 융커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야 융커란 것들은 거만하고 융통성 없고 머릿속이 전쟁으로 가득 찬 꼰대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아, 한스 폰 초이 남작이라는군요.”

“한스 폰 초이?”

그러나 마침내 자료 사이에서 특사의 이름을 찾아낸 보좌관의 말에 루스벨트는 다른 방향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스 폰 초이.

카이저를 구한 소년이자 최근 즐겁게 읽고 있는 ‘불멸의 리 제독’의 작가.

“근데 그 친구는 아직 어린애잖나. 어린애를 특사로 보내겠다니 독일 정부가 제정신인지 의심이 가는구만.”

“하지만 의외로 남작은 외교가에선 소문이 자자합니다. 듣기론 재작년 칭(Ching)의 황족을 카이저 앞에 절하게 만든 것도 그 소년의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그래?”

루스벨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곤 곧 보좌관을 향해 물었다.

“언제쯤 도착한다던가?”

“아무래도 시간상 올해는 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보좌관의 말에 루스벨트가 창밖을 바라봤다.

어쩐지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보좌관이 말했던 것처럼 다사다난했던 1902년이 끝나고 1903년이 찾아왔을 때.

한스 폰 초이가 드디어 미국에 발을 디뎠다.

* * *

1903년 1월, 볼티모어항.

나는 난간을 붙잡고 후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유지했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서양은 발트해보다 더 큰 바다였고, 나는 뱃멀미가 아주 심하다는 것을.

“괜찮으십니까? 남작님?”

“아, 괜찮아요. 숨 좀 돌리면 멀쩡해질 거예요.”

나는 걱정하는 경호원의 말에 그리 대답하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차례대로 여객선에서 내렸다.

“남작님. 밑에서 미국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정신을 차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자 경호원이 그리 속닥였다.

과연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진과 모 박물관 영화로만 봤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내가 배에서 내리질 않자 추위 속에서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답답한 얼굴로 토끼처럼 발을 가만히 두질 않았다.

‘그나저나 대통령이 직접 항구에 마중까지 나오다니.’

어지간히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성질이 급한 것일 수도 있고.

하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일화와 성격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후. 조금만 더 쉬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죠.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를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난 그리 말하며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잡고 여객선에서 내렸다.

루스벨트는 한눈에 날 알아보며 그제야 얼굴을 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날 못 알아보는 쪽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피부색도 그렇고 나이도 그렇고, 20세기 서양에서 나만큼 눈에 띄는 사람도 드물 테니까.

“한스 폰 초이 남작.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미국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저 또한 유럽에 소문이 자자한 루스벨트 대통령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 둘은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참 사이가 좋구나’라고 무심코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소 뒷면에는 상대방에 대한 흥미와 경계심.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지독한 외교가의 얼굴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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