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55화 (55/193)

55화 : 야심한 밤에 (1)

“애초에 유리한 건 우리 쪽인데 우리가 왜 미국인들의 말에 따라 움직여 줘야 하는 겁니까?”

빌헬름 2세는 아침 커피를 마시며 억지 미소를 짓고 있던 에드워드 7세를 향해 말했다.

“한스, 안 그러냐?”

“폐하의 말이 옳습니다.”

“그렇지? 그나저나 너 커피 진짜 못 타는구나. 한스. 대체 커피에 왜 이렇게 물을 많이 탄 거야?”

“폐하. 아메리카노는 원래 그렇게 마시는 겁니다.”

“아메리카노? 하긴, 딱 양키 놈들이 마실 만한 구정물이군.”

그렇게 중얼거린 빌헬름 2세는 커피잔을 옆으로 치웠다.

‘칫, 맛있기만 하구만.’

아메리카노의 맛이 받아들여지기엔 아무래도 아직 너무 이른가 보다.

하지만 나와 달리 에드워드 7세는 지금 커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는지 초조한 표정으로 카이저를 다시 한번 설득하려 했다.

언제나 여유만만했던 에드워드 7세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놀랄 만한 일이다.

“우리가 유리하니까 지금 베네수엘라 문제를 끝내야 한다는 거다. 마침 딱 좋은 타이밍 아니냐.”

“에이, 외숙부, 녀석들의 애간장이 타면 탈수록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도 더 많아질 것 아닙니까.”

“아니, 그건…….”

에드워드 7세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빌헬름 2세가 대체 왜 이러는지 묻고 싶단 표정이다.

사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빌헬름 2세에게 중재에 응하지 말고 시간을 끄는 게 우리 독일 제국에 더 이득일 거라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우리의 빌리는 흔쾌히 내 말에 따랐다.

물론 외삼촌 에드워드 7세의 쩔쩔매는 표정을 보고 싶다는 이유가 더 큰 것 같지만 말이다.

보라. 외삼촌의 일그러진 표정에 흡족해하며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나오는 카이저의 저 얄밉고 깐죽거리는 표정을.

저 얼굴이 연기면 빌헬름 2세는 농담이 아니라 당장 황제 때려치우고 배우를 해야 한다.

저건 100% 진심이었다.

“으그그그극……!”

덕분에 에드워드 7세는 꿀밤이 마려워서 그야말로 죽을 맛인 모양이었지만.

하지만 이 자리의 갑은 영국이 아니라 독일이었다.

지금 영국은 갑자기 신경도 쓰지 않던 드레드노트가 떡상해 버리자 초조하다 못해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유쾌했던 에드워드 7세가 이리 안절부절못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독일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활약에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인데 말이지.’

당장 베네수엘라에서 있었던 일이 전해지자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카리브해로 파견된 것에 불안함을 토로하던 티르피츠 제독은 말 그대로 흥분해서 나에게 엄청난 양의 편지를 보냈고, 빌헬름 2세는 차오르는 국뽕과 흥에 모두의 앞에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내 주가가 오른 것은 당연지사였고 말이다.

물론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뜬금없이 베네수엘라 순양함을 날려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좀 식겁하긴 했다.

실수였다고 하긴 하는데, 잘못됐으면 진짜 1902년 말에 세계대전이 터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나마 듀이 제독과 미국 함대가 빠르게 물러나서 다행이야.’

그래도 이번 일은 결과적으론 나와 독일 제국에 있어 대박 중의 대박이었다.

덕분에 판이 우리 독일에 굉장히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

‘일단 영국으로선 베네수엘라 문제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겠지.’

독일은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드레드노트를 만들고 있었고, 베네수엘라에서 있었던 일로 다른 열강들까지 드레드노트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은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서둘러 드레드노트를 도입해도 모자랄 판에 정작 베네수엘라에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러니 독일이 이렇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영국은 답답해서 미칠 수밖에 없다.

독일과 영국이 베네수엘라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했을 때 서로 베네수엘라랑 단독으로 협상하지 말자고 약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노린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렇게 되면 영국으로선 어떻게든 우리 독일을 달래고 설득해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영국이 먼저 약조를 어길 수도 없어.’

약조를 어기면 가뜩이나 보어전쟁으로 외교적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진 영국만 국가 간의 합의를 어긴 나쁜 놈이 되는 것도 모자라, 유일한 드레드노트 보유국인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한다.

그렇기에 영국이 이리 에드워드 7세까지 직접 나서면서 어떻게든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이자고 절박하게 나오는 것이다.

물론 나야 아직은 그렇게 해 줄 생각이 없었다.

“머리 아픈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같이 사냥이나 가시죠. 폐하. 마침 여우 사냥 시즌이라던데 전 한 번도 안 해 봤거든요.”

“오. 여우 사냥, 그거 좋지. 조지도 불러서 같이 가자꾸나.”

“으, 으음…….”

에드워드 7세가 나와 빌헬름 2세가 대놓고 유유자적 사냥이나 가겠다고 말하자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곤 나를 향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스. 우리 사이에 이러기냐?”

“폐하. 자고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아니겠습니까?”

“……원하는 게 뭐냐?”

“그거야 서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봐야 알겠지요.”

에드워드 7세는 내 말에 눈을 찌푸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중에 부르도록 하마.”

에드워드 7세는 그리 말한 채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국왕의 부름은 내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작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날 밤, 자정.

에드워드 7세의 시종이 내 방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냥 내일 부르면 안 됐나?’

무슨 흡혈귀도 아니고 왜 굳이 이 늦은 밤에 사람을 부르는 걸까.

어린아이는 잠이 많은 법이거늘.

“따라오시지요.”

그러나 국왕의 부름을 내 잠투정 때문에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시종의 뒤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걷고 또 걸었다.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당도한 곳은 어느 문 앞이었다.

나는 시종에게 감사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아, 소문의 한스 폰 초이 남작께서 드디어 납시셨군.”

그러나 방 안에는 에드워드 7세만 있는 게 아니었다.

* * *

“폐하. 누가 보면 이 밤에 파티라도 열리는 줄 알겠습니다.”

“파티라. 그렇기엔 늦은 시각이지. 어린아이가 돌아다니기에도 말이다.”

“그걸 알면서 이 밤에 절 부르셨습니까?”

내 말에 에드워드 7세가 큭큭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웃을 분위기가 아닌지 그저 헛기침만 터트릴 뿐이었다.

“어디 보자. 밸푸어 총리와 랜즈다운 후작은 알고 있지?“

“예. 얼마 전 샌드링엄에 찾아오셨죠. 이리 직접 얼굴을 맞댄 것은 처음이지만요.”

나는 그리 말하며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 상당히 초조해 보이는 얼굴의 아서 밸푸어와 뒷짐을 지고 있는 외무장관인 랜즈다운 후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쪽은 식민지 장관 조셉 체임벌린일세.”

조셉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성씨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시대의 평화’로 유명한 훗날의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아버지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영독동맹을 추진한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망했지만.

“그리고 이쪽은 제1해군경인 존 피셔 제독.”

“예?”

‘왜 피셔 제독이 벌써 제1해군경이야?’

존 피셔 제독.

드레드노트의 탄생부터 최초의 항공모함이 등장하는 것까지 전부 지켜본 영국 해군의 전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지금 피셔 제독은 제1해군경이 아니라 그 아래인 제2해군경이어야 한다.

피셔가 제1해군경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1904년이었으니까.

“제1해군경은 커 제독 아니었습니까?”

“커 제독은 사임했네.”

“아…….”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때문이구나.

이제야 이해가 간다.

하긴. 영국 해군은 쓰시마 해전의 전훈이 없었기 때문인지 몇 년 빨리 등장한 드레드노트를 크기만 크고 성능은 별 볼 일 없다고 평가절하해 버렸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네?’

사임도 사실은 말이 사임이지, 해임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피셔 제독이 그 후임으로 제1해군경이 된 것일 테고 말이다.

“어쨌든 만나서 반갑습니다. 피셔 제독님.”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남작?”

“묻고 싶은 거요……?”

피셔가 대뜸 그리 말하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뭐가 궁금한 거지?

“드레드노트는 남작의 머릿속에서 나온 게 맞습니까?”

“!”

피셔 제독의 질문에 내 얼굴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당황하지 말자.

이 자리가 만만찮은 자리가 될 거란 건 각오하지 않았는가.

다시 마음을 다진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깐 채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전함을 한스 네가 만든 거였다고?!”

“엄밀히 따지면 독일 해군과 조선공들이 만들었죠. 전 아이디어와 개념만 제공했을 뿐입니다.”

“그게 그 소리잖나. 하! 이거 눈 뜨고 당했군.”

에드워드 7세는 정말 몰랐다는 듯, 어이없단 얼굴로 날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다만 피셔 제독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 7세도 모르던 사실을 피셔 제독이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 의문은 이어진 피셔의 말에 의해 풀렸다.

“역시 리 제독의 전술에 영감을 받은 게 맞았군요.”

“……예?”

왜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걸까.

“남작은 ‘불멸의 리 제독’의 작가. 리 제독의 전술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죠. 특히 최근 연재된 ‘바다가 우는 길목’에서의 전투에서 보여 준 리 제독의 전술은…….”

“아, 네네. 그렇습니다. 피셔 제독님의 말대로입니다.”

“역시!”

머리가 어지러워진 내가 급히 피셔 제독의 말을 끊자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는 피셔 제독.

“그런가. 리 제독, 그걸 놓치고 있었군.”

“돌아가서 자세히 읽어 봐야겠군요.”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옳다구나 하고 피셔 제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다.

영국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어쩐지 내가 몹쓸 짓을 한 기분이다. 하긴 했지만.

“자자, 인사도 다 나눴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크흠. 그러도록 하마. 우선 베네수엘라 문제 말인데…….”

에드워드 7세와 4명의 영국인의 시선이 날 향했다.

“어떻게 하면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일 것이냐?”

“그건 제가 아니라 베를린에 있는 뷜로 총리에게 문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 남작. 당신이 카이저를 꼬드겨서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은 이미 폐하께 들어서 알고 있소!”

“급한 건 저와 독일 제국이 아니니까요.”

밸푸어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치자 나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맞받아쳤다.

지금 급한 건 괜히 함대 출동시켰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물러난 바람에 미국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어지간히도 급한지 내 앞에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아서 밸푸어였다.

“최근 신문을 보아하니 꽤 곤란하신 상황이시더군요. 총리님.”

“크흠! 그, 그건…….”

사실 꽤 곤란한 정도가 아니었다.

밸푸어의 정치생명은 지금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베네수엘라 함대를 박살 내고 미국 함대가 꼬리를 말고 도망치게 만든 독일 제국의 신형 전함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전 세계 해군력을 제로로 만들다.]

[독일에서 탄생한 궁극의 전함. 대영제국의 해양 패권 이대로 무너지나?]

[독일 제국의 신형 전함은 영국의 해양 패권에 위협이 전혀 안 된다? 해군성의 과거 발언 논란. 정부와 해군의 무능함에 분노한 시민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활약이 언론을 타고 영국 전역을 흔들고 있다.

영국인들은 해양 패권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인해 말 그대로 패닉에 빠졌고, 드레드노트를 무시했던 밸푸어 내각과 왕립 해군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영국은 공교롭게도 베네수엘라에 발목이 잡힌 상태죠.”

독일은 영국이 이리 허송세월하는 와중에도 드레드노트를 계속 뽑아내고 있는데 말이다.

“큭!”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던 피셔 제독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독일은 계속 드레드노트 경쟁에서 앞서나간다면 영국은 정말 바다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잃은 대영제국은 더 이상 대영제국이 아니다.

거기다 이참에 자신들도 영국을 한번 앞질러 보려는 후발주자들까지 포함하면…….

음…… 부디 피셔 제독의 위장이 무사하길 기도하도록 하자.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죠. 전 영국과 적이 되기보단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요.”

“허, 친구라. 뷜로 총리도 그렇고 다른 독일인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모양이던데 말이오.”

“여기 계신 모든 분의 생각이 다 같진 않은 것과 마찬가지죠. 그리고 그런 많고 많은 생각 중에서 최선을 도출해 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체임벌린의 말에 그리 답한 나는 손에 깍지를 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넓게 넓게 생각합시다. 여러분. 굳이 독일과 영국이 각을 세우고 대립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양국엔 공동의 적이 있으니까요.”

“공동의 적?”

“러시아 제국 말입니다.”

그리 말한 나는 씩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계획의 3단계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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