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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53화 (53/193)

53화 : 두려움 없이 나아가라 (3)

“저게 대체 왜 맞는 거야!”

탄약고에 직격이라도 당했는지 맹렬하게 불타오르며 천천히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베네수엘라 순양함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몽고메리 제독뿐만이 아니었다.

포격 명령을 내린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함장, 오이겐 칼라우 폰 호프와 부함장 막시밀리안 폰 슈페 또한 동공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당황했으니까.

“분명 명령은 위협 사격이었잖나! 적 방호순양함을 날려 버리는 게 아니라!”

“죄, 죄송합니다. 함장님. 아무래도 포격 좌표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게 죄송으로 끝날 문제인가!”

슈페는 휘하 장교들에게 그리 소리치면서도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너무나도 이른 취역을 끝까지 반대하지 않았던 자신을 탓했다.

역시 부하들은 아직 이 거대한 최신예 전함을 다루는 데 미숙했다.

“자자, 지금 후회해 봤자 소용없지 않나.”

경험 많은 베테랑 함장답게 금방 침착해진 호프 함장의 말에, 슈페는 부하들을 갈구는 것을 멈추었다.

함장의 말이 맞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이제 막시밀리안 폰 슈페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승조원들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미래를 어찌할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혼란에 빠진 게 우리만이 아니란 거지.’

베네수엘라 해군도 미국 해군도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다짜고짜 순양함을 격침해 버릴 줄은 몰랐던 건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이런 사태가 벌어질지 그 누가 알았을까 싶지만.

어쨌든 슈페는 유능한 해군 장교이었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결코 놓쳐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함장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동의하네. 우선 거슬리는 베네수엘라 함대는 다른 함선들에 맡기고, 그동안 우리는 미국 함대를 견제토록 하지.”

“옛! 비네타(SMS Vineta), 팔크(SMS Falke), 가젤(SMS Gazelle), 판터(SMS Panther), 스토시(SMS Stosch)에게 공격 신호. 지금 당장 베네수엘라 함대를 공격하라고 해!”

“영국 함대와 이탈리아 함대는 어떻게 합니까?”

“영국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은 지금 신호를 볼 정신도 없을 거다.”

슈페는 그리 중얼거리며 모자의 챙을 매만졌다.

이윽고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에 공격 깃발이 오르고 다른 독일 함선들이 이를 발견했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에서 공격 신호! 지금 당장 베네수엘라 함대를 공격하랍니다!”

“베네수엘라 함대를 공격? 하! 제멋대로 불을 지른 것도 모자라 거기에 부채질까지 할 작정인가?”

“함장님.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하나.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어울려 줘야지. 기관 출력 최대로 올려. 지금부터 본 함은 베네수엘라 함대를 향해 돌격한다.”

이의는 없었다.

곧 독일 해군 소속의 순양함 비네타와 팔크, 가젤, 포함 판터, 그리고 초계함 스토시가 연돌에서 검은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일제히 베네수엘라 해군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 망할 크라우트 자식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물론 상의도 없이 멋대로 뛰쳐나가는 독일 함대의 모습을 본 몽고메리 제독은 핏발 선 눈으로 분노를 토해 냈지만 말이다.

그러나 호프 함장은 몽고메리 제독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 명령을 내렸다.

“미국 함대의 공격에 대비한 유리한 위치를 잡는다. 기관 전속! 우현 반타!”

“기관 최대 출력! 우현 반타!”

끼리릭───덜컹!

조타수가 조타륜을 오른쪽으로 반쯤 돌리는 사이, 항해 장교가 속도계의 레버를 왼쪽 끝까지 당겨 기관실에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곧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천천히 오른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제독님! 독일 전함이 미국 함대를 향해 진로를 변경했습니다!”

“나도 보고 있네. 함장. 젠장, 저 X 같은 전함은 또 왜 저리 빨라!”

지금까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아군 함선과 속도를 맞추느라 일부러 속도를 줄인 상태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숨겨왔던 제 속도를 드러내자 몽고메리 제독은 또 한 번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물론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저리 바다에서 날아다니는(어디까지나 전함 기준에서) 이유야 명백했다.

증기터빈. 어이없게도 대영제국의 최신 추진기관 때문이었다.

‘증기터빈이 대형 함선엔 그리 효과가 없을 거라고?’

몽고메리 제독은 순간 드레드노트가 별 볼 일 없다고 보고한 자칭 해군성의 엘리트들을 모조리 쏴 죽이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피셔 제독이 옳았다.’

몽고메리 제독은 피셔 제독의 말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제독은 곧 정신을 차리며 앞을 응시했다.

영국 해군의 미래를 걱정하기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나도 급박했으니까.

“이탈리아 함대가 독일 함대의 뒤를 따라 베네수엘라 함대를 향해 돌격하고 있습니다!”

“제독님. 명령을!”

“……베네수엘라 함대는 저들에게 맡겨도 충분하겠지. 우리 영국 함대는 지금부터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를 엄호한다.”

몽고메리 제독은 노련한 뱃사람답게 호프 함장의 의도를 금방 파악했다.

그리고 호프의 판단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이란 것도 말이다.

물론 몽고메리 제독으로선 위협 사격만 한다더니 순양함을 날려 버리며 일을 꼬이게 만든 호프 함장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은 전투가 우선이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다.

“으아아, 으아아아아!”

“적 함대가 온다!”

“퇴각! 퇴각! 살고 싶으면 모두 도망쳐!”

한편, 눈앞에서 기함이 단 한 번의 사격으로 터져 나가는 것을 목격한 베네수엘라 해군은 유럽 함대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전의를 상실하곤 도망치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 제독이 멀쩡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기함이었던 순양함이 터져 나감과 동시에 명을 달리했다.

슈우우우웅────콰앙!

그리고 독일인 함장들은 적의 혼란을 그냥 두고 볼 자들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유럽 함대의 선봉이 된 독일 함대는 늑대처럼 베네수엘라 함대를 자비 없이 물어뜯기 시작했고, 귀를 찢는 포성과 함께 사방에서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는 베네수엘라 해군의 멘탈을 실시간으로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물론 드디어 제정신을 차린 미국 함대가 서둘러 이 전투라고도 불릴 수 없는 학살극을 막으려고 했지만.

콰앙! 쾅!

구 USS 필라델피아를 한 번에 격침한 것이 그저 운만은 아니라는 듯, 미국 함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견제 사격을 가하는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에 의해 다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유럽 함대는 도망치는 베네수엘라 함선들을 손쉽게 사냥했다.

결국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베네수엘라 함선들은 대부분 격침되었고, 극소수의 베네수엘라 함선들은 어찌어찌 살아남아 푸에르토 카베요 항을 향해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심각한 손상을 입어 더 이상의 항해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은 미국 함대뿐이었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를 중심으로 진형을 형성해!”

몽고메리 제독은 베네수엘라 함대가 실시간으로 전멸하는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견제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미국 함대를 망원경으로 계속 응시하며 명령을 내렸다.

현재 미국 함대는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를 의식한 듯, 얼마 없는 전함까지 끌고 왔기에 유럽 함대보다 숫적으론 우세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인정하긴 싫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함선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몽고메리 제독으로선 유럽 함대의 조커이자 미국 함대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했다.

곧 몽고메리 제독의 신호에 따라 유럽 함대가 진형을 형성했고, 곧 유럽 함대와 미국 함대가 대치 상태에 돌입하면서 포성 없는 치열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 * *

“……루스벨트 이 개자식. 돌아가면 내가 진짜 가만히 안 둘 거다.”

조지 듀이 제독은 기함인 USS 매사추세츠(USS Massachusetts)의 함교 위에 서서 미국 함대와 대치 중인 유럽 함대를 바라보곤 자신을 베네수엘라로 보낸 대통령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해군 장교 그 누구도 제대로 열 받은 미 해군의 전설을 말릴 수 없었다.

그러기엔 후환이 두려웠고, 또 그들 또한 내심 듀이 제독의 분노에 동감했으니까.

“하지만 제독님.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

“나도 아네. 알아.”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듀이 제독에게 그리 말하자 듀이 제독이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듀이 제독과 미국 함대는 참으로 곤란하면서도 답답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본래 루스벨트가 듀이 제독에게 내린 명령은 유럽 함대를 압박하며 베네수엘라에 대한 해상 봉쇄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베네수엘라 문제를 빨리 처리하고 싶었던 영국과 미국과의 마찰을 꺼려하는 독일을 제풀에 지치게 만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영향력을 늘리지 못하게 견제함과 동시에 미국에 유리한 판을 만들기 위해 말이다.

그리고 방금까지 미국 함대는 베네수엘라 해군을 공격하려는 유럽 함대를 가로막으며 임무를 충실히 실행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포격으로 모든 것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포격이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증여한 구 USS 필라델피아에 정확히 적중하면서 상황은 듀이와 미 함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영국 놈들은 혀뿐만 아니라 눈도 맛이 간 게 분명해.”

영국 해군이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에 내린 평가에 대해 알고 있던 듀이 제독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리 중얼거렸다.

독일인들의 신형 전함이 별 볼 일 없어?

대체 그놈들은 뭘 보고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것일까?

물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영국의 판단에만 의지한 미국 정부의 정보력도 한심했지만.

어쨌든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지금 자신이 타고 있는 USS 매사추세츠는 물론 기존의 그 어떤 전함으로도 전혀 상대가 안 되는 괴물이었다.

지금까지의 전함들은 교전 거리가 아무리 길어 봐야 6마일(약 9km)이 넘을까 말까였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적 함선에 포탄을 명중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포격하기 직전,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와 베네수엘라의 기함 사이의 거리는 대충 어림잡아도 10마일(약 16km)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전함은 그 거리에서 단 한 번의 포격으로 베네수엘라의 기함을 격침했다.

물론 초심자의 행운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겠지만, 애초에 장거리 사격을 시도한 것 자체가 그 거리에서 명중시킬 자신이 있었다는 소리다.

맞출 자신이 없으면 아예 쏘지도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속도까지 빨라.’

미 함대를 향해 변침할 때,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속도는 대충 봐도 20노트(37km) 가까이 되었다.

듀이 제독의 기함인 매사추세츠의 설계상 최고 속도가 15노트(28km)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전함을 기준으론 매우 빠른 것이었다.

‘만약 멈추지 않고 그대로 유럽 함대를 공격했으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했겠지.’

그렇기에 듀이 제독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베네수엘라 함대를 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애초에 미국 함대는 딱히 베네수엘라를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럴 의리도 없고 말이다.

듀이 제독과 미국 함대가 베네수엘라로 온 것은 어디까지나 먼로 독트린을 개똥으로 아는 유럽 열강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도 못 붙이도록 견제함과 동시에 지금의 미국은 옛날의 미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이대로 유럽 함대에 대한 견제를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은 대통령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행동.

“쯧. 어쩔 수 없지. 퇴각 깃발을 올려라.”

하지만 듀이 제독은 어떠한 망설임 없이 미국 함대에 후퇴를 지시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루스벨트 대통령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루스벨트 녀석은 내가 잘 알아. 우리 대통령 각하께서 이곳에 있었다면 나와 같은 판단을 내렸을 거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라는 무지막지한 괴물이 있는 이상, 이대로 싸우면 미국 함대는 최소 전멸을 각오해야만 했다.

최근 즐겨 읽는 소설의 주인공인 ‘리 제독’ 마냥 살려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면 살 것이라는 정신으로 싸운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듀이 제독의 생각에 이는 수지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일이었다.

미국이 침공이라도 당한다면 모를까 베네수엘라 따위를 위해 미 해군의 핵심 전력을 그대로 처넣을 순 없었으니까.

“집에 가자. 제군들. 우리가 할 일은 끝난 것 같으니.”

듀이 제독의 명령에 미국 함대가 일제히 닻을 올리고 함수를 돌렸다.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첫 전투는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동시에 베네수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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