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두려움 없이 나아가라 (2)
1902년 11월 11일.
빌헬름 2세와 에드워드 7세간의 협정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독일과 영국은 베네수엘라 문제는 오로지 양쪽이 만족할 수 있게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쉽게 말해 어느 한쪽이 협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쪽도 협정을 맺지 못한다는 약조.
그리고 이는 전적으로 독일의 요구였다.
솔직히 영국이 과거에 수도 없이 그래 왔던 것처럼 독일의 뒤통수를 치고 베네수엘라와 단독으로 협정을 맺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것도 미국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물론 양심 없는 영국 언론은 영국이 독일에 끌려다니는 모양새라며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 냈지만, 어쨌든 영국은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902년 12월 7일.
영국과 독일은 베네수엘라에 외채 상환 중지를 철회하고 베네수엘라로 인해 양국 시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베네수엘라는 어디까지나 자국법이 최우선이라며 외채 문제는 애초에 논의 거리가 아니라는 대답을 보냈다.
사실상 꺼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베네수엘라가 이리 나올 줄 알았던 영국과 독일은 합의했던 대로 베네수엘라에 대한 본격적인 해상 봉쇄에 돌입하기 위해 함대를 카리브해로 파견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탈리아 왕국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해상 봉쇄를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면서 카리브해엔 베네수엘라에 대한 분노로 똘똘 뭉친 영국, 독일, 이탈리아 삼국 함대가 집결했다.
“저기 이탈리아 함대가 보이는군.”
과거 이 카리브해를 주름잡았던 해적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부함장, 막시밀리안 폰 슈페는 함교 위에서 망원경으로 저 멀리 접근해 오는 함선들을 바라보며 그리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태평한 소리였다.
어쩌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따사롭게 비치는 남국의 햇살에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함장님. 몽고메리 제독을 비롯한 영국 함장들이 본 함에 승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음. 허가한다.”
슈페가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는 이탈리아 함대에 이목을 집중한 사이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기념비적인 첫 함장인 오이겐 칼라우 폰 호프(Eugen Fabian Alexander Kalau vom Hofe)가 승선 보고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트 아치볼트 제임스 몽고메리(Robert Archibald James Montgomerie).
영국 해군 특수전대의 지휘관이자 이 자리에 모인 삼국의 해군 장교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인물이다.
그가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에 탑승하려는 것은 앞으로의 공동작전에 대한 논의와 조율을 하기 위해서였다.
본래라면 호프 함장과 슈페 부함장이 몽고메리 제독의 기함인 HMS 카리브디스(HMS Charybdis)로 가야 했겠지만, 카리브디스가 방호순양함인 데 반해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유럽 함대 중 유일한 전함이었다.
그렇기에 독일 해군의 체면 문제도 있고 또한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순양함인 HMS 카리브디스보단 회의 환경이 더 쾌적할 것이기에, 호프 함장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를 기꺼이 회의 장소로 제공했다.
그리고 몽고메리 제독을 비롯한 영국인들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에 승선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몽고메리 제독.”
“환대에 감사드리오. 호프 함장. 슈페 부함장.”
호프와 슈페의 어설픈 영어에 몽고메리 제독이 내심 웃음을 참으며 둘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굴려 소문이 자자한 독일의 신형 전함 내부를 쓱 하고 둘러보았다.
‘멋지긴 하군.’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확실히 남자의 마음을 울리는 웅장한 전함이다.
물론 본국에서 들은 바로는 성능은 겉모습만큼 뛰어나진 않은 모양이지만 말이다.
물론 몽고메리 제독은 제 생각을, 그리고 영국 해군이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에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을 겉으로 내보이진 않았다.
어찌 되었든 지금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의 아군이었고 여긴 그들의 함선이었다.
독일의 배에서 대놓고 독일 해군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만큼 몽고메리 제독은 후안무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몽고메리 제독과 영국 함장들은 호프 함장과 함께 슈페의 안내에 따라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이후 뒤늦게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에 승선한 이탈리아 함장들이 회의실에 준비된 의자에 앉자 곧 본격적인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우선 우리의 첫 번째 목표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는 ‘푸에르토 카베요’입니다. 여기에 이견을 가지시는 신사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몽고메리 제독이 지도 위에 표시된 도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자 영국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 함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푸에르토 카베요(Puerto Cabello).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의 외항이자 베네수엘라의 가장 중요한 항구.
그렇기에 삼국 연합 함대에 있어 다른 곳은 몰라도 푸에르토 카베요만큼은 반드시 봉쇄해야 할 곳이었다.
필요하다면 포탄도 몇 발 쏴서라도 말이다.
“현재 푸에르토 카베요 앞바다에는 베네수엘라 해군이 집결해 있습니다. 물론 다들 아시다시피 그 대부분이 고속정이고 거기에 소수의 포함, 그리고 양키들이 준 구식 방호순양함 한 척뿐입니다만…….”
대부분의 해군답게 골초였던 몽고메리 제독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문제는 몇 시간 전에 들어온 정찰부대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 함대의 모습이 근처에서 포착되었다는 겁니다.”
웅성웅성.
남아메리카에선 그나마 지역 강국이라 할 수 있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와 비교해도 너무나도 허약한 베네수엘라 해군의 상태에 내심 미소를 지었던 함장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웅성거렸다.
미국 함대라니.
설마하니 정말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위해 여기 모인 삼국 함대와 전면전이라도 할 생각이란 말인가?
“미국 함대를 지휘하고 있는 건 누구입니까?”
“첩보에 따르면 듀이 제독이라더군요.”
듀이란 이름에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한 층 더 커졌다.
조지 듀이(George Dewey).
미 해군에서 가장 뛰어난 제독이자 미서전쟁의 영웅.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다만, 미국 해군은 푸에르토 카베요와 베네수엘라 해군이 있는 장소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제 생각엔 미국인들은 우리와 직접적인 교전은 피할 생각으로 보입니다.”
“하! 이번에도 경고입니까? 양키들이 겁에 질린 개처럼 짖어 대는군요.”
슈페의 비아냥에 몽고메리 제독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함장들을 향해 단호하게 선언하듯 말했다.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예정했던 대로 푸에르토 카베요를 봉쇄할 것입니다. 다만, 저쪽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미국 함대와의 마찰은 최대한 피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모두 동의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우리 레지아 마리네(Regia Marina, 이탈리아 왕립 해군) 또한 동의합니다.”
독일 함장들과 이탈리아 함장들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몽고메리 제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부러 저들에게 시간을 줄 필요는 없겠죠. 자, 신사분들. 베네수엘라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러 갑시다.”
그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이젠 행동에 나설 때였다.
* * *
베네수엘라, 푸에르토 카베요 근해.
“젠장. 대통령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명령에 따라 있는 함선 없는 함선 다 끌어모아 푸에르토 카베요를 지키기 위해 출격한 베네수엘라 해군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불안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로열 네이비, 그 대영제국의 로열 네이비다.
그것도 모자라 독일 해군과 이탈리아 해군까지 온단다.
그에 비해 베네수엘라 해군이라곤 고속정과 포함, 그리고 얼마 전 미국이 선심 쓰듯 던져 준 낡아빠진 순양함이 전부였다.
“개 같은 정부 새끼들. 이건 그냥 우리보고 나가 죽으라는 거잖아.”
베네수엘라인들은 수병이고 장교고 할 것 없이 대통령과 정부를 욕했다.
애초에 그들에게 카스트로에 대한 충성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 또한 무능하고 부패했던 베네수엘라의 예전 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었으니까.
“2시 방향에 함영 다수!”
그리고 그들의 대통령에 대한 분노는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해군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자 더욱 커졌다.
“씨이바……!”
“우린 다 죽었어. 죽었다고!”
대충 봐도 허약한 베네수엘라 함대 따윈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적 함대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베네수엘라인들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신은 잔혹했다. 너무나도 잔혹했다.
“전, 전함이다!”
유럽 함대의 뒤에서 다른 함선들보다 배는 커다랗고 거대한 함선이 흑백적기를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등장하자 베네수엘라 수병들은 아예 무릎을 꿇고 절규했다.
“미친, 독일 놈들이 진짜로 전함을 끌고 왔어!”
“이 잔인한 크라우트 자식들! 우리가 무슨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도 아니고 전함은 무슨 전함이야!”
끝났다.
베네수엘라 해군은 끝났다.
전함, 무려 전함이다.
저 거대한 바다 괴물을 자신들보고 대체 어떻게 잡으라는 것인가.
‘이렇게 개죽음당할 바엔 그냥 백기 올리고 항복하는 게…….’
“유럽 함대에 발광 신호 보내.”
“제, 제독님?”
“여긴 베네수엘라 영해니까 당장 물러나라고.”
하지만 베네수엘라 제독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베네수엘라 수병들이 품은 최후의 희망을 배신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
수병들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경악스러운 눈으로 자신들의 제독을 바라봤지만, 베네수엘라 제독은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건지 발광 신호를 보내라고 다시 한번 부하들을 재촉했다.
“베네수엘라 놈들이 미쳤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발광 신호를 본 호프 함장과 슈페의 반응 또한 베네수엘라 수병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함장님. 답신을 보낼까요?”
“영국 함대는 보냈나?”
“아뇨. 어떠한 반응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도 무시해.”
호프 함장은 슈페에게 그리 명령한 채 망원경으로 베네수엘라 해군을 계속 응시했다.
그때였다.
“10시 방향에서 함영 다수!”
“뭐?”
예상하지 못한 견시의 갑작스러운 보고에 슈페는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러곤 서둘러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성조기! 미국 해군입니다!”
“망할 양키놈들.”
슈페의 보고에 호프 함장이 얼굴이 찌푸렸다.
이윽고 미국 함대가 유럽 함대의 측면에서 성조기를 휘날리며 나타났다.
그 모습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해, 누가 보면 자신들이 악역이고 저들이 영웅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미 해군! 미 해군이다! 우린 이제 살았어!”
“믿고 있었다고!”
물론 죽음의 순간에서 강렬한 희망을 본 베네수엘라 해군에게 있어 미 해군은 정말 영웅이 맞았지만 말이다.
베네수엘라인들의 환호에 미국 함대는 맞은편에서 물살을 가르고 접근해 오다가 유럽 함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유유히 정지했다.
그러곤 유럽인들을 향해 곧바로 발광 신호를 보냈다.
[베네수엘라 함대에 그 이상 접근하지 마라.]
슈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함장님에게 저 건방진 양키들에게 이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힘을 보여 주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미국과의 전면전이다.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참아야만 했는데…….
[유럽 함대는 지금 당장 베네수엘라 영해에서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라도 몰아내겠다.]
“베네수엘라 이 새끼들이!”
그러나 미 해군의 등장으로 기고만장해진 베네수엘라 해군의 도발만은 도저히 참아 줄 수 없었다.
“함장님. 베네수엘라 함대에 위협 사격을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위협 사격? 흠, 괜찮은 생각이군. 카리브디스에 발광 신호 보내게.”
“옛. 함장님!”
[허가.]
몽고메리 제독의 답신은 짧고 빨랐다.
저쪽도 베네수엘라 해군의 건방진 행동에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다.
“총원 일제 사격 준비. 베네수엘라의 순양함의 약간 앞쪽을 노리도록,”
“옛. 총원 일제 사격 준비!”
호프 함장은 기함이라 그런지 베네수엘라 해군의 전열에서 약간 뒤에 정박하고 있던 베네수엘라의 방호순양함, 구 USS 필라델피아의 바로 앞에 일제 사격을 가해 위협할 것을 명령했다.
기존 전함으론 명중은커녕 닿지도 않을 거리였지만, 이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라면 충분히 닿고도 남을 거리였다.
함장의 명령에 따라 장교들이 그동안 받았던 훈련대로 서둘러 사격 통제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듣기론 이 장치를 개발하기 위해 자이로스코프 같은 최신 기술을 있는 대로 사들인 것은 물론 아서 폴렌(Arthur Pollen) 같이 사격 통제 장치를 연구하던 영국인 과학자들을 돈으로 회유한 것도 모자라, 독일 제국의 기술자란 기술자들을 총동원했다던가?
그리고 그 결과는 완벽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제값을 톡톡히 했다.
무수한 돈과 갈려 나간 공돌이들의 희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기이이익───
이윽고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주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며 적 순양함 근처를 조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슈페는 몰랐다.
호프 함장도, 몽고메리 제독도, 베네수엘라 해군도, 심지어 미 해군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연.
마침 베네수엘라 해군 쪽으로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거나, 첫 실전에 긴장한 독일 장교들이 계산을 약간 실수했다거나 하는, 말 그대로 우연에서 비롯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우연들이 모여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법이다.
“발포!”
콰앙───!!!
강렬한 소리와 함께 베네수엘라 순양함을 향해 일제히 불꽃과 포탄을 토해 내는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12인치 주포들.
포탄은 포연을 흩뿌리며 멀리 날아갔고…….
“어?”
“어어? 어어어?!”
투쾅!!!!
그대로 베네수엘라 순양함에 내리꽂혔다.
“…….”
그리고 그 순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열 수 없었다.
아무도 이 상황을 예상하지도, 그리고 이해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블러디 헬…….”
먼저 입을 연 것은 많은 실전을 겪은 덕분인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몽고메리 제독이었다.
몽고메리 제독은 탄약고에 포탄이 직격이라도 했는지 활활 불타오르며 그대로 침몰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순양함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독일인들은 분명 위협 사격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베네수엘라 순양함이 침몰하고 있냐고!”
아니, 그 이전에. 이 거리에서 대체 저걸 어떻게 맞췄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몽고메리 제독.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커 제독을 향해 열변을 토하던 피셔 제독의 모습이 떠올랐다.
“씨발.”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깨달은 몽고메리 제독은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망했다.
자신도, 영국 해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