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베네수엘라 위기 (1)
1902년 6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지금 즉시 더 퀸 호를 영국에 반환하고 선원들을 석방하시오.”
“그것은 불가하오. 그들이 반군에 협력한 혐의가 있는 이상,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더 퀸 호를 돌려줄 수도, 선원들을 석방할 수도 없소.”
“카스트로 대통령!”
“이쯤 말했으면 알아들을 때도 되지 않았소? 우리 베네수엘라 정부는 영국의 압력에 굴할 생각은 없소.”
“대영제국은 베네수엘라 정부의 행동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아, 그렇소?”
베네수엘라 대통령, 시프리아노 카스트로(Cipriano Castro)는 영국 대사의 항의에 시큰둥한 목소리로 그리 대답했다.
상대방을 전혀 존중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하게 풍겨 오는 불성실한 태도.
이 베네수엘라의 카우디요는 애초부터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국 대사는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카스트로를 향해 최후의 경고를 남겼다.
“좋소. 당신이 그렇게 나오겠다면 이만 나가 보지. 다만, 똑똑히 기억하는 게 좋을 거요. 대영제국은 이런 모욕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는다는 걸!”
“…….”
쾅!
어지간히 분이 안 풀렸는지 집무실 문을 부술 기세로 거칠게 닫고 나가는 영국 대사.
그 모습을 바라본 카스트로 대통령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시가를 입에 물었다.
“빌어먹을 제국주의자 놈들.”
카스트로는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영국인들도 그렇고 독일인들도 그렇고, 유럽 제국주의자 놈들은 정말이지 불쾌한 놈들뿐이다.
베네수엘라가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지도 어언 칠십여 년.
그러나 유럽인들은 돈의 힘을 내보이며 여전히 베네수엘라를 자기 멋대로 좌지우지했다.
‘이 나라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인데!’
이러한 유럽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카스트로의 분노는 베네수엘라의 저명한 은행가인 마누엘 안토니오 마토스(Manuel Antonio Matos)가 자신을 무너트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이후 극에 달했다.
물론 반란군과의 내전에서 카스트로가 불리했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반란군은 카스트로의 정부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카스트로는 반란군을 오히려 역으로 밀어붙였다.
왜냐하면 카스트로의 군대는 빈약한 무장의 반란군과 달리 독일제 마우저 소총과 크루프 대포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재수 없는 놈들이지만 독일 놈들이 확실히 무기는 잘 만들어.’
하지만 그것은 결국 빚, 독일인들에게 진 빚으로 얻어 낸 무기였다.
그리고 이 빚이 문제였다.
베네수엘라는 카스트로 이전부터 독일인, 그리고 영국인들과 부채 상환 문제로 계속 갈등을 빚고 있었다.
지난 10년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내전으로 인해 베네수엘라가 외국에 진 채무를 제대로 갚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대체 내가 왜 갚아야 하냐고!’
다만 유럽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카스트로가 이렇게 막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탐욕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베네수엘라 정부 및 카스트로를 향해, 베네수엘라 내전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자국인들에 대해 보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카스트로와 반군의 싸움 때문에 선량한 유럽인들이 피해를 보았으니, 당연히 베네수엘라가 내전으로 인한 유럽인들의 손해를 책임지고 보상해 줘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왜 그치들에게 돈을 줘야 한단 말인가!’
카스트로는 반란군 놈들과의 전투 때문에 피해를 입은 유럽인들에게 보상금을 줄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외채 상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돈을 내놓으라며 베네수엘라를 끊임없이 압박했고, 베네수엘라의 위대한 영도자 시프리아노 카스트로는 결국 구국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현 시간부로 나 시프리아노 카스트로와 베네수엘라 정부는 유럽에 진 모든 채무의 상환을 거부한다!’
카스트로는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을 향해 외채 상환 중단을 선언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인해 손해를 본 유럽인들의 보상금 요구 또한 절대로 못 들어준다며 단칼에 거절한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이는 베네수엘라에 철도 등 많은 투자를 한 독일은 물론, 베네수엘라에 많은 돈을 빌려준 영국의 분노를 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베네수엘라 따위가 자신들의 돈을 떼먹겠다는데 우리의 제국주의 친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눈 뜨고 돈을 잃게 생긴 독일인들과 영국인 기업가들은 각각 베를린과 런던으로 달려가 베네수엘라의 채무 상환 거부에 대한 자국 정부의 대책을 요구했다.
베네수엘라 위기의 시작이었다.
다만 독일과 영국이 시작부터 강경하게 나온 것은 아니었다.
독일 정부와 영국 정부는 처음엔 헤이그 상설중재법원에 베네수엘라 문제에 대한 중재를 요청하면서 이를 최대한 온건하게 풀어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대영제국과 그 독일 제국을 향해 동시에 싸움을 건 미친놈답게, 카스트로는 이를 모조리 무시하며 유럽 제국주의자들을 향해 가운데 중지를 세웠다.
독일과 영국은 결국 참다 참다 폭발했고, 이 와중에 마찬가지로 카스트로에게 돈을 떼먹힌 이탈리아 왕국까지 끼어들면서 베네수엘라는 독일과 영국, 이탈리아 삼국의 군사적 압박이라는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여전히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그런 카스트로의 자신감을 뒷받침하듯이 유럽인들은 베네수엘라 해안에 군함 몇 척을 파견했을 뿐,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각하. 허버트 보웬(Herbert Wolcott Bowen) 전권대사께서 오셨습니다.”
카스트로는 집무실 밖에서 들려온 비서의 말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조금 전까지 분노한 영국 대사를 대할 때와는 극명하게 다른 태도.
하지만 카스트로가 아까와 달리 이리 정중하게 행동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허버트 보웬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베네수엘라에 파견한 특사이자 미국의 전권대사.
그리고 카스트로가 독일과 영국을 적으로 돌리고도 자신만만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아, 오셨습니까. 보웬 대사님.”
“카스트로 대통령.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무슨 짓이냐뇨?”
“영국 선박을 나포한 건 말입니다! 정녕 영국이랑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십니까?!”
보웬 대사가 핏발 선 눈으로 그리 외쳤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그게 대체 무슨 문제가 되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 배는 반군을 지원한 혐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나포를 한 것뿐이고요. 이는 우리 베네수엘라의 정당한 권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가당찮은 개소리였다. 저 대영제국에 그딴 궤변이 먹혔으면 아편전쟁도 안 일어났다.
그러나 보웬 대사는 카스트로를 향해 이를 박박 갈면서도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영국은 결코 베네수엘라에 전면전을 선포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사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먼로 독트린이 존재하는 이상, 베네수엘라를 공격하면 미합중국의 개입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카스트로 대통령! 먼로 독트린은 당신의 미친 짓을 눈감아 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요!”
“하지만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요. 우리 베네수엘라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이상 말입니다. 하하하!”
“이런 씨……!”
먼로 독트린.
21세기에도 유지 중인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정책.
쉽게 말해, 아메리카는 내 나와바리니까 유럽 열강은 저리 꺼지라는 미국의 엄포였다.
물론 먼로 독트린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미국은 영국한테 백악관이 불탔을 정도로 이제 막 독립한 약소국에 불과했기에 그 어떤 열강도 먼로 독트린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먼로 독트린이 선포된 이후로도 영국은 대놓고 북미 식민지를 늘렸고, 러시아 또한 베링 해협을 건너와 알래스카를 식민화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지금의 미국은 유럽 열강보다 아직 한발 부족하지만 엄연한 아메리카 대륙의 맹주로 성장했고, 초강대국이 되라고 대놓고 떠밀어 주는 축복받은 땅에 세워진 나라답게 경제력과 공업력만은 이미 대영제국을 뛰어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기에 베네수엘라 하나 때문에 먼로 독트린을 무시하며 미국과 전면적인 갈등을 빚는 것은 독일과 영국으로서도 부담되는 일이었고, 이는 곧 카스트로가 이리 안하무인으로 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미국도 이런 카스트로의 막 나가는 행동을 좋게 본 건 아니었다.
영국과 독일도 미국이 부담되지만, 반대로 미국 또한 각각 세계 최강의 해군과 세계 최강의 육군을 가진 영국과 독일이 부담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기에 미국은 원 역사에서 영국, 독일, 이탈리아가 함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의 해상을 봉쇄하자 카스트로의 절박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열강들이 베네수엘라 영토를 직접 점령하는 게 아닌 이상 먼로 독트린의 침해로 볼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미국은 그저 독일과 영국이 이를 빌미로 베네수엘라의 영토를 뜯거나 특혜를 탐하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아메리카의 맹주로서 목소리를 높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의 행동은 어째서인지 원 역사와는 약간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루스벨트 대통령 각하께서 제게 준다는 선물은 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조금만 기다리시오. 닦달한다고 빨리 오는 것도 아니지 않소.”
“흠. 뭐, 괜찮겠지. 유럽 제국주의자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면 최소 몇 달은 걸릴 테니 말입니다.”
한숨을 내쉰 보웬 대사의 피곤한 얼굴을 바라보며 카스트로는 시가의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의 얼굴엔 보는 보웬 대사가 학을 뗄 정도로 능구렁이 같은 능글맞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 * *
[베네수엘라 영국 선박 더 퀸 호 나포! 영국은 결국 베네수엘라를 향해 칼을 뽑아 들 것인가?]
“미친놈들.”
나는 아침 신문을 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시프리아노 카스트로가 거하게 일을 터트렸다.
영국에게 베네수엘라의 배가 나포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건 평소 영국이 하는 짓이었으니까.
그런데 베네수엘라가 영국의 배를 나포하다니.
영국이 얼마나 내로남불이 심한 나라인지 아는 나로선 아무리 생각해도 카스트로 이 작자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베네수엘라와 갈등을 빚고 있던 게 어디 영국 하나뿐이던가?
지금 베네수엘라는 영국뿐만이 아니라 독일, 거기다 중간에 끼어든 이탈리아와도 심각한 마찰을 빚고 있었다.
독일 제국, 대영제국, 이탈리아 왕국.
내가 베네수엘라의 지도자였다면 하나만 적으로 돌려도 심각하게 자살을 고민해야 할 상황인데 카스트로는 이 셋을 한꺼번에 적으로 돌렸다.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는 걸까?
‘아, 원래 역사에서도 감당 못 했구나.’
시프리아노 카스트로가 베네수엘라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 중 하나로 뽑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굳이 베네수엘라 위기가 아니더라도 전형적인 남미 군사 독재자라 좋은 평은 절대 받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똑똑─
“남작님. 뷜로 총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총리께서요?”
난 뷜로가 왔단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뷜로가 날 찾아올 일이 있나?
전혀 짚이는 곳이 없다.
러시아에 다녀온 이후, 난 정말 조용히 지냈으니까.
어쨌든 이대로 총리를 바람맞힐 순 없는 노릇.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뷜로 총리를 맞이했다.
그러나 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 귀에 들려온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폐하를 좀 설득해 주게.”
“예?”
갑자기 빌헬름 2세를 설득해 달라니,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나는 뷜로 총리를 향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득이라니. 무슨 설득 말입니까?”
“베네수엘라 문제 말일세. 베네수엘라 문제.”
“베네수엘라요?”
뷜로는 진지한 얼굴로 그리 끄덕였다.
물론 베네수엘라 위기에 독일 제국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진 않았다.
원 역사에서도 베네수엘라 위기의 엔딩은 영국과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의 해상봉쇄를 이기지 못한 베네수엘라가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고 영·독·이 삼국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잘 끝난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나한테 베네수엘라 문제로 카이저를 설득해 달라니.
평소 나를 쓸모 있는 골칫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뷜로 총리의 태도를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인 일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뷜로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