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첫 번째 드레드노트 (3)
“흠. 이 보고서에 잘못된 부분은 없겠죠?”
“물론입니다. 밸푸어 장관님.”
독일로 파견한 해군 무관들의 보고서를 읽으며 재차 묻는 제1재무경 아서 밸푸어의 말에 제1해군경 월터 커(Walter Talbot Kerr)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긍정했다.
“우리 장교들의 말에 따르면 독일 해군의 신형 전함의 설계 사상이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현 교리와는 너무 뒤떨어진 탓에 성능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는, 독일인들의 주장하는 것과 달리 사실상 겉만 웅장한 전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군요.”
커 제독이 살짝 조소를 띄며 말했다.
영국에선 긴 이름 탓에 그냥 임시 명칭에서 따온 드레드노트라 부르는 독일 제국의 신형 전함,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는 명백히 장거리 포격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전함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장거리 포격 자체가 실전에서 효용성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커 제독은 프랑스의 청년학파와 다를 바 없는 독일의 미련한 짓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주포와 부포를 제외한 중간포들을 모조리 제거했다는 모양입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예. 이러면 오히려 함포의 명중률만 줄어들거든요.”
본래 기존 전함들은 주포의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기 위해 주포보다 작고 부포보단 큰 중간포들을 덕지덕지 달고 다녔다.
하지만 독일의 드레드노트는 무슨 생각인지 중간포를 아예 달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론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포탑 구조는 꽤 획기적이지만 정작 대포가 맞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흠.”
“또한 증기 터빈 추진 방식이 전함 급의 대형 함선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증기 터빈은 영국 해군에서도 이제 막 약간 큰 어뢰정이나 다름없는 구축함에 사용되기 시작한 물건이었다.
커 제독도 증기 터빈 추진 방식이 기존 방식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과연 전함 같은 대형 함선에도 통할까?
‘솔직히 별로 효과 없을 것 같은데.’
설령 증기 터빈으로 전함의 속도가 정말 획기적으로 증가한다 해도 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증기 터빈은 영국인이 만들어 낸 영국의 발명품이었다.
정말 증기 터빈이 전함에도 효과가 있다면 그땐 영국도 전함에 증기 터빈을 달면 그만이다.
“어쨌든 우리 해군이 내린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드레드노트는 겉보기만 좋은 카이저의 장난감 배에 불과하다고 판단됩니다. 더 자세한 판단은 시험 항해가 끝나고 드레드노트가 취역된 이후에야 가능하겠지만요.”
그래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커 제독은 그렇게 생각했다.
“후. 하도 위쪽에서 불안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솔직히 나도 좀 걱정이 되긴 했는데 다행이군요.”
그리고 커 제독의 단언이 있고 나서야 대영제국의 차기 총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역시 해군의 의견을 신뢰한 자신의 판단은 틀림없었다.
‘독일 해군이 그러면 그렇지.’
영국은 수십,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바다를 지배해 왔다.
그런데 제대로 된 해군 전통도 거의 없는 독일 해군이 지금 와서 영국 해군을 따라잡는다는 건 그야말로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
‘역시 영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국가는 독일 제국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다.’
원 역사에서도 독일 제국의 위협을 낮게 보고 영국의 오랜 적인 러시아 제국에 집중했던 밸푸어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커 제독과 악수를 했다.
“그럼 전 이만 해군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회의가 있거든요.”
“아아, 그러시오. 마침 나도 이 보고서를 국왕 폐하께 전달하기 위해 버킹엄에 가 봐야 하니.”
본래라면 총리인 솔즈베리 후작이 해야 할 일이지만, 후작은 거동조차 힘들 정도로 병세가 악화해 끝내 사임을 발표한 상태였다.
그리고 아서 밸푸어는 내각의 만장일치를 받아 공식적으로 솔즈베리 후작의 뒤를 이을 후임 총리로 확정되었기에, 아직 명함만 안 바뀌었을 뿐 사실상 영국의 총리나 다름없었다.
‘보어전쟁도 승리로 끝났고, 폐하의 대관식도 내 임기 때 거행하는 것이 확실하니 지지율은 그야말로 걱정할 필요도 없겠군.’
밸푸어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탄탄대로를 걷게 된 자신의 행운에 웃음꽃을 피웠다.
자신은 위대한 총리가 될 것이다.
외삼촌 솔즈베리 후작과 그 솔즈베리 후작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디즈레일리를 뛰어넘는 위대한 총리 말이다.
최근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독일의 신형 전함 문제도 일단락되었으니 걱정할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영국의 모든 사람이 밸푸어와 커 제독처럼 드레드노트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 * *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우린 다 X 됐어요. X 됐다고요! 왜 그걸 모르는 겁니까!”
“피셔 제독. 제독들이 모인 자리일세. 과격한 표현은 삼가게.”
해군성으로 돌아온 커 제독의 말에 얼마 전 지중해 함대 사령관에서 제2해군경으로 영전한 존 피셔(John Arbuthnot Fisher) 제독이 눈을 부라렸다.
“지금 제가 욕을 안 하게 생겼습니까? 정부는 물론이고 대영제국 왕립 해군의 제독이란 작자들이 독일이 만들어 낸 레비아탄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는데?!”
“어허, 피셔 제독! 드레드노트는 전혀 대영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자네도 보지 않았나.”
“그 보고서는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저 겉핥기로 판단한 것도 모자라 온갖 편견으로 떡칠되어 있는 쓰레기란 말입니다!”
쿵!
피셔 제독은 도저히 화를 못 참겠다는 듯 회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원 역사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탄생시킨 장본인답게, 피셔 제독은 드레드노트의 가치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이대로 독일이 드레드노트를 선점하게 두어선 안 돼!’
이대로라면 영국의 해양 패권이 흔들리는 것을 넘어 끝장난다.
당장 영국도 드레드노트를 도입해야 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과 커 제독은 피셔 제독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드레드노트의 핵심 개념은 올 빅 건(All-big-gun)으로 대표되는 대구경 함포와 사격 통제 장치를 이용한 장거리 포격이었는데, 이는 현재 주류였던 중?근거리 포격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장거리 포격의 효용성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영제국의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인 넬슨과 트라팔가르 해전의 영향으로 육박전을 중시했던 영국 해군으로선 드레드노트의 개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영국이 드레드노트를 도입한 것은 어디까지나 피셔 제독이 제1해군경이 되고 쓰시마 해전의 전훈으로 장거리 포격의 중요성이 대두된 이후였다.
우리가 아는 올바른 역사에선 말이다.
지금은 쓰시마 해전의 전훈이 없어 장거리 포격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이었던 데다가 피셔 제독은 이제 막 제2해군경이 된 상황이라 힘이 없었다.
하지만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피셔 제독은 계속해서 열변을 이어 갔다.
“독일인들은 우리와 달리 드레드노트의 가치에 대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피셔 제독은 그리 말하며 품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흔들었다.
‘불멸의 리 제독’.
최근 영국 해군에도 유행하기 시작한 이 책을 본 피셔 제독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이 책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일본 해군의 특기는 빠른 기동성을 이용한 근접전.
하지만 리 제독은 일본 해군을 전쟁 내내 포격을 이용한 장거리 화력전으로 압도했다.
그리고 이는 피셔 자신이 구상한 개념, 그리고 드레드노트의 설계 사상과 상당히 일치했다.
리 제독과 코리아 해군이 16세기에 이미 이런 전술을 사용했다니 피셔 제독으로는 그야말로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리 제독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인들도 알고 있었다.
이 책은 다름 아닌 독일 제국의 한 귀족에 의해 쓰인 것이었으니까.
“보고에 따르면 독일 황립 해군은 이미 다음 드레드노트의 건조에 들어간 상태라고 하더군요.”
이대로 계속 독일이 영국과 차이를 벌려 간다면 영국의 해상 패권이 무너지는 것은 필연.
그것만은 절대 막아야만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다시 재고를……!”
“그러다가 잘못되면 자네가 책임질 건가? 신형 전함 만드는 게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하게!”
가뜩이나 피셔 제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커 제독이 더는 못 참아 주겠다는 듯 모욕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 내며 피셔 제독의 말을 끊었다.
‘하! 답답한 사람 같으니. 왜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건가!’
피셔 제독은 커 제독의 단호박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끼며 목덜미를 잡았다.
해군의 패러다임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뒤처지는 순간 끝장이란 걸 왜 이 사람은 모르는 것일까?
그러나 피셔 제독의 울분에도 불구하고 커 제독의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우리가 드레드노트를 도입한다고 치세. 그런데 성능도 의심스럽고 검증도 전혀 안 된 전함의 도입을 의회에서 그리 쉽게 동의해 줄까? 절대 안 해 준다는 것에 내 목을 걸겠네.”
이는 독일과 영국의 차이이기도 했다.
겉만 입헌군주국이지 사실상 전제국가에 가까운 독일 제국의 경우엔 의회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카이저가 반강제로 드레드노트 건조를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영국은 달랐다.
영국에서 신형 전함 건조를 하려면 반드시 의회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고, 여기에 독일과 같은 편법은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보고서에 따르면 이 드레드노트는 기존 전함 건조비의 몇 배라고 하지 않았나.”
불과 몇 년 전.
영국 해군이 비커스 사에 당시 영국의 함선보다 우월한 성능을 가진 전함이었던 미카사를 일본에 팔지 말라고 요청했을 때, 꼬우면 니들이 사라는 비커스 사의 건방진 태도에 아무 말도 못 했던 것이 영국 해군이다.
영국 해군은 규모로는 세계 제일이었지만, 정작 그 규모를 유지하느라 신형 함선을 도입할 예산이 부족해서 늘 허덕이는 상태였다.
“드레드노트를 만들 돈이면 전함을 몇 개나 뽑겠군.”
“망할! 왜 대체 이해를 못 하십니까. 이대로라면 늦습니다. 너무 늦는다고요!”
반면 드레드노트의 가치를 잘 아는 피셔 제독은 절박했다.
이대로 독일이 드레드노트를 계속해서 뽑아내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가 없다.
그랬다간 바다의 주인은 영국이 아니게 될 테니까.
그리고 바다를 잃은 대영제국은 대영제국이 아니니까.
벌컥!
“큰일 났습니다!”
피셔 제독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신의 계급장을 걸고서라도 다시 한번 드레드노트 도입을 주장하려는 순간, 한 하급 장교가 노크도 없이 제독들의 회의실에 들이닥쳤다.
이는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이었고, 제독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예의 없는 짓인가! 지금 회의 중인 거 안 보이나?!”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급박한 일인지라.”
“후우, 무슨 급박한 일.”
급박한 소식이라는 말에 커 제독은 얼굴을 찌푸리며 얼른 이야기해 보라는 듯 하급 장교에게 손짓했다.
장교는 잊고 있던 경례를 뒤늦게 헐레벌떡 올린 뒤,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메리카에서 긴급전보입니다. 베네수엘라 해군이 아국 선박인 더 퀸(The Queen)호를 나포했습니다!”
“……뭐?”
누가 누구의 배를 나포했다고?
커 제독은 지금 자신이 뭔 개소리를 들었냐는 듯, 그리 반문했다.
피셔 제독을 비롯한 다른 제독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들은 게 정확한 건가? 베네수엘라 따위가 대영제국의 선박을 무력으로 나포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무슨 이유로?”
드레드노트 문제로 커 제독과 싸움을 벌인 탓에 분노 임계치가 한계에 달해 있었던 피셔 제독이 냉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그의 머리는 지나친 분노로 인해 오히려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물론 장교는 심상치 않은 피셔 제독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벌 떨었지만 말이다.
장교는 긴장을 없애려는 듯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이 전해들은 것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베네수엘라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반군에 협력했다는 혐의라고 합니다. 다만 이에 대한 사실 여부는 아직 파악이 안 되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이 새끼들이 돌았나!”
“감히 남아메리카의 소국 따위가 대영제국을 건드려?!”
분을 참지 못한 제독들이 회의실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노호성을 내뱉었다.
영국 선박이 반군을 도왔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베네수엘라 따위가 천하의 대영제국을 건드렸단 것이다.
가뜩이나 부채 상환을 거부하며 영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던 베네수엘라다.
그런데 이젠 하다 하다 영국 선박을 나포하기까지 했으니, 이건 이미 영국과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태였다.
“커 제독님! 다우닝가에서 긴급 호출입니다.”
그리고 사태의 심각함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다른 장교가 회의실로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아무래도 그 누구도 당분간 드레드노트엔 관심도 없겠군.”
그리 피셔 제독의 귀에 속삭이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커 제독.
하지만 피셔 제독은 침음성만 흘릴 뿐, 뭐라 따지지 못했다.
지금 영국은 드레드노트가 문제가 아니었다.
베네수엘라 위기(Venezuelan crisis).
유럽 열강들을 향해 가운데 중지를 치켜세운 남미의 작은 소국을 중심으로 거대한 허리케인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 제국 또한 이 허리케인의 중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