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첫 번째 드레드노트 (2)
1902년 6월, 독일 동프로이센 엘빙(Elbing, 현 폴란드령 엘블롱크).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군!”
빌헬름 2세는 마차 안에서 황실 가족을 환영하는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그리 말했다.
오늘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독일 제국의 신형 전함의 진수식이 열리는날.
그리고 세계 최초의 드레드노트가 탄생하는 날이었다.
그렇기에 황실 가족를 비롯한 독일 제국의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진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 엘빙을 방문했다.
엘빙에는 드레드노트의 건조를 맡은 시하우-베르케(Schichau-Werke)사의 조선 소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오늘 엘빙의 거리란 거리는 황실 가족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꽉 들어찬 상태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처음 독일에 온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이렇게 사람들이 잔뜩 모인 날이었지.’
물론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다.
숨돌릴 새도 없이 바로 암살범의 총알에 맞아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스. 아까부터 조용하네. 넌 기대되지도 않냐?”
“글쎄요. 기대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동시에 머리가 복잡해지네요.”
나는 내 옆에 앉아있는 요아힘 왕자를 향해 그리 대답했다.
어쩌면 드레드노트의 탄생이 가져올 세상의 변화로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요아힘 왕자님. 오늘 샴페인은 누가 깨트리나요?”
“샴페인? 글쎄 역시 어머니가 깨트리려나?”
내 질문에 요아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샴페인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스 폰 초이가 설명하자면 이는 서양의 유서 깊은 관습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등장하지 않는가.
진수식 때 병을 배에 부딪혀 깨트리는 모습이.
본래 이는 18세기에 사제가 진수식 때 항해의 안전을 바라는 의미로 포도주를 바치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것이 현대에 와선 포도주 또는 샴페인을 배에 부딪혀 깨트리는 의식으로 바뀌었다.
이때 샴페인을 깨트리는 역할은 어지간하면 여성이 맡았는데 이를 선박의 대모, 또는 스폰서라 부르며 보통은 진수식에 참여한 가장 높은 사람의 부인이나 딸이 병을 깨트렸다.
그렇기에 요아힘은 진수식에 참여하는 사람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인 어머니 아우구스테 황후가 샴페인을 깨트릴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힝. 내가 깨트리고 싶었는데.”
“하! 루이제 니가? 아서라. 아서···악!”
요아힘이 빈정거리는 말에 화가 났는지 빅토리아 루이제가 오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루에 몇 번이고 보는 일상.
하긴 서로 물고 뜯고 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남매인가?
원래 남매끼리는 서로 티격태격 서로 싸우면서 크는 거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에 따라서 말이다.
다만 다른 왕자들은 아무래도 나이 차가 커서 그런지 루이제를 그저 귀여운 여동생으로 여길 뿐.
루이제랑 투닥거리며 서로 놀려 먹는 건 어디까지나 요아힘이랑 나뿐이었다.
“뭐래. 나도 이제 9살이거든?”
루이제가 고통스러워하는 오빠를 바라보며 흥하고 콧바람을 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공주님. 9살이면 어린애예요.”
한국으로 쳐도 11살, 초등학생 4학년이다.
요아힘이랑 나랑 비교해도 충분히 꼬맹이다.
“한스, 넌 나랑 동년배잖아!”
“하지만 생일이 빠르죠.”
루이제 빅토리아는 1892년 9월생이고 난 1892년(추정) 1월생이다.
즉 난 루이제보다 나이가 많은 만 10살이란 거다.
게다가 정신 연령까지 따지면 훨씬 높다.
‘가끔 나도 모르게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단 거에 절로 손이 갈 때가 있긴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더라.
어린애의 본능은 무섭다. 정말로.
“얘들아. 슬슬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렴.”
빅토리아 루이제가 내 말에 볼을 부풀리고 있을 때, 아우구스트 황후가 말했다.
창밖을 슬쩍 내다보니 저 멀리 거대한 강철의 성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
“어서 오시지요! 폐하!”
진수식 현장에 도착하자 빅토리아 황태후의 장례식 이후, 오랜만에 보는 티르피츠 제독이 우리를 환영하며 팔을 넓게 벌렸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것이 신형 전함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티르피츠 제독님.”
“아, 한스! 아니, 이젠 남작이라고 불러야 했던가. 어쨌든 반갑구나. 자, 봐라! 우리 독일 카이저마리네의 미래를!”
티르피츠 제독이 거대한 회색빛 전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웅장하고 위엄찬 모습에 황실 가족은 물론이고 나 또한 무심코 탄성을 내뱉었다.
크고 웅장한 것을 싫어하는 남자는 없는 법이니까.
‘일단 내가 말한 개념들은 다 들어가 있네.’
대응 방어를 위한 딱 보기에도 두터워 보이는 장갑.
12인치 2연장 주포 4기.
배수량을 줄이고 효율적인 포탑 배치를 위한 적층식 포탑까지.
굳이 말하자면 본래 독일 최초의 드레드노트 전함이었어야 했던 나사우급 전함을 베이스로 미국 최초의 드레드노트인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의 포탑이 올라간 형태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함선의 디자인은 그 두 전함과 상당히 달랐지만 말이다.
“멋지군. 정말이지 멋진 전함이야.”
내가 전함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누가 배박이 아니랄까 봐빌헬름 2세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카이저가 조금만 더 감수성이 풍부했다면 아예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수고했소. 티르피츠 제독.”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지 않으셨더라면 어찌 저 전함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티르피츠 제독이 입에 발린 말로 빌헬름 2세를 그리 치켜세우자 카이저가 흡족한 얼굴로 티르피츠의 어깨를 두들겼다.
“황제 폐하.”
그때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일련의 제복 입은 무리와 함께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티르피츠는 그들을 보자마자 눈을 찌푸렸지만, 빌헬름 2세는 미소 지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이요. 라셀레스 대사. 그동안 잘 지냈소?”
“예. 폐하의 호의 덕에 불편함 없이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 그것참 다행이군!”
라셀레스라는 이름에 나는 그제야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프랭크 라셀레스.
주독 영국 대사로 빌헬름 2세와도 상당히 친분이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정작 그가 주독 대사로 있던 시기에 영국과 독일의 관계는 독일의 해군 증강과 확장정책으로 인해 악화일로를 걸었지만 말이다.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은 영국 왕립 해군 소속 무관들이겠지.’
나는 전형적인 해군 장교 복장 차림의 남자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독일의 신형 전함에 대해 파악해오라며 영국 정부에서 해군 무관들을 잔뜩 파견한 모양이다.
하긴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경계하고 있는 영국이 독일이 신형 전함을 건조한다는 것에 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으니까.
“어떻소. 대사. 우리 독일 해군의 미래를 책임질 신형 전함의 모습이.”
“참 크고 아름답군요. 멋진 전함입니다. 폐하.”
빌헬름 2세의 자랑에 대사는 그리 짤막하게 감상을 남겼다.
하긴 지금 라셀레스 대사가 관심이 있는 건 전함의 겉모습이 아니라 실제 성능일 것이다.
온갖 신기술과 새로운 개념을 있는 대로 때려 박은 독일의 신형 전함이 영국에 위협이 되는지 안 되는지 무척이나 알고 싶을 테니까.
쑥덕쑥덕
미소를 지으면서도 경계심을 품은 라셀레스 대사와 다르게 정작 영국 해군 무관들은 우리 전함을 그리 높게 평가하진 않는 모양인지 얼굴에 비웃음이 살짝 드러나고 있었지만 말이다.
‘무리는 아니지. 아직 쓰시마 해전의 전훈이 있기도 전이니.’
벌써 저들의 미래가 보인다.
진실을 알게 되면 깜짝 놀라는 것을 넘어 사표 쓸 준비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전함의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물론이네. 많은 고민 끝에 저 고고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에 어울리는 최고의 이름을 골라놨지. 진수식 때 발표할 예정이니 기대하게나.”
“예. 폐하.”
라셀레스 대사는 빌헬름 2세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는 해군 무관들과 함께 지정된 자리로 향했다.
빌헬름 2세와 나를 비롯한 황실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객석 정중앙에 마련된 귀빈석으로 움직였다.
빰바밤~빠바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수식이 시작됨과 동시에 군악대가 독일 제국의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독일인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국가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Heil dir im Siegerkranz, Herrscher des Vaterlands! Heil, Kaiser, dir!”
그대에게 승리를 왕관을(Heil dir im Siegerkranz).
프로이센 시절부터 독일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독일의 국가로 사용된 유서 깊은 곡.
하지만 간지나는 제목과 달리 멜로디는 영국 국가 ‘갓 세이브 더 킹’의 그것이다.
그저 가사만 다를 뿐이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
마침내 국가 연주가 끝나자 뜨거운 함성과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는 빌헬름 2세가 연단에 설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자랑스러운 독일 제국의 시민 여러분. 그리고 전 세계에서 오신 독일의 친구 여러분.”
빌헬름 2세는 그리 인사를 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카이저의 연설 실력은 살짝 경박하고 억지로 위엄을 짜내는 듯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훗날 등장할지 안 할지 아직 모르는 콧수염 총통의 광기 어린 연설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말이다.
“먼저 독일 제국의 바다를 지킬 최신예 전함의 진수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오늘 우리 독일은 우리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리 말한 빌헬름 2세의 시선이 신형 전함을 향했다.
그 두 눈동자에는 사랑스러운 여인을 보는 것처럼 깊은 애정이 담겨있었다.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네.’
나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다시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이 위대한 전함을 위해 밤낮없이 일해온 독일 황립 해군의 아들들과 시하우-베르케의 조선공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바다는 독일 제국의 미래이자 최전선이며······.”
카이저의 연설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연설 내용 대부분이 이 전함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긴 했지만 말이다.
“끝으로 신형 전함의 함명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드디어 전함의 이름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순간이 다가왔다.
물론 나는 이미 사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빌헬름 2세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잠시 숨을 고른 후,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SMS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Friedrich der Große)!”
독일인들이 탄성을 터트림과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프로이센과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주.
그것이 독일 제국의 손에서 탄생한 첫 번째 드레드노트의 이름이었다.
“도이칠란트 만세! 카이저 빌헬름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짝짝짝짝짝!
관객석에 있던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마침내 또 한 번의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카이저의 연설이 끝났다.
이윽고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자 귀빈석에서 빌헬름 2세가 아우구스테 황후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우구스테 황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샴페인 병을 보란 듯이 들어 보인 뒤, 힘차게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선수에 샴페인 병을 휘둘렀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는 샴페인 병.
그 모습은 여름 더위마저 잠시 가시게 할 정도로 시원했다.
‘다행히 샴페인 병이 안 깨지는 불상사는 안 일어났네.’
샴페인 병을 배 선수에 부딪혀 깨트리는 것은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는 축복의 의식.
반대로 병이 안 깨지는 건 불길한 징조였다.
뱃사람들의 미신에 불과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법이다.
“그럼 지금부터 진수를 시작하겠습니다.”
샴페인 의식이 끝나고 이어진 사회자의 말에 모두가 멀찌감치 전함에서 멀어졌다.
진수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물보라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전함을 지탱하던 거치목을 치운 조선공들이 전함 밑에 깔리기 전에 헐레벌떡 진로에서 벗어나자 곧 거대한 회색 강철의 성이 바다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
그리고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가 무사히 바다 위로 떠 올랐다.
그 모습이 꽤 장관이었는지라 라셀레스 대사는 물론 잘난척하던 영국 해군 무관들조차 무심코 감탄사를 내지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몰랐다.
드레드노트.
진정한 거함거포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작가의말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셨을 최초의 드레드노트의 이름은 감자대왕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참고로 내일은 유료 연재 전환을 기념해 연참이 있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