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45화 (45/193)

45화 : 첫 번째 드레드노트 (1)

1902년 5월 영국 버킹엄 궁전.

“후, 남아프리카에서의 지긋지긋한 전쟁이 이제야 끝이 났군.”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는 억지로 들고 있던 큰 짐을 내려놓은 듯,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어전쟁(Boer Wars).

두 차례에 걸쳐 대영제국을 진흙탕 속에서 빠트렸던 남아프리카에서의 기나긴 전쟁이 드디어 대단원을 맞이했으니까.

영국과의 기나긴 전쟁 끝에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진 보어인들은 대영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자치를 허락해주는 조건으로 영국에 항복했다.

그렇게 게릴라전으로 영국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보어인들의 나라,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은 역사의 뒷 페이지로 사라졌다.

물론 그 과정이 심히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에드워드 7세가 전쟁의 승리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보어 게릴라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몇 번이고 겪고 난 나머지 눈이 돌아버린 영국은 게릴라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보어인들을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초토화작전으로 그들의 마을이란 마을은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영국을 향한 국제사회의 엄청난 비난으로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보어인들은 아프리카에 널리고 널린 흑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럽에서 온 개척자들의 후손, 즉 엄연한 백인이었다.

식민지 원주민들이 상대라도 충분히 비난받을 짓을 같은 백인 상대로 했으니 욕을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보어전쟁은 결국 영국의 국가역량과 국제사회에서의 평판만 깎아 먹은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참혹한 결과를 안겨준 전쟁이 되었다.

비록 전쟁의 승리로 인해 남아프리카 식민지가 온전히 영국의 품으로 들어왔다지만, 외교를 중시하는 에드워드 7세로서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뼈아팠다.

“평화 조약은 언제 체결될 예정이라 했지?”

“쿨럭쿨럭! 5월 31일에 프리토리아에서 보어 지도자들과 협정(베르니이헝 평화 조약, Treaty of Vereeniging)을 맺을 예정입니다. 폐하. 쿨럭, 쿨럭쿨럭!”

솔즈베리 후작이 연신 기침을 내뱉으면서 그리 힘겹게 대답했다.

그의 안색은 1년 전, 에드워드 7세와 함께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보다 더욱 나빠져 있었다.

결국 솔즈베리 후작은 총리직을 사임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에드워드 7세는 글래드스턴, 디즈레일리와 함께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어왔던 위대한 총리의사임을 받아들였다.

‘로버트도 이렇게 가는가.’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솔즈베리 후작이 그동안 대영제국에 공헌해온 바를 생각하면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개스코인-세실은 에드워드 7세가 보기에도 대영제국의 총리라는 막중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드워드 7세는 이제 솔즈베리 후작의 물러난 뒤의 일을 생각해야만 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영국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로버트가 물러나면 다음 총리는 역시 저 친구가 되겠지.’

에드워드 7세는 솔즈베리 후작의 옆에 서 있던 젊은 정치인(어디까지나 에드워드 7세와 솔즈베리 후작에 비해)을 바라봤다.

아서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

솔즈베리 후작의 외조카이자 제1 재무경 겸 하원의장.

그리고 저 거창한 타이틀을 괜히 폼으로 주렁주렁 달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듯,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솔즈베리 후작의 뒤를 이어 총리직에 오를 인물이었다.

그는 지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무를 보기 힘든 솔즈베리 후작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내각을 이끌어왔고 또 보수당 내에서의 지지율도 높았으니까.

게다가 이번에 보어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대관식도 그의 임기 때 치러질 예정이니 밸푸어를 향한 국민들의 지지도 매우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감이라고 해야 할까.

에드워드 7세는 어째선지 밸푸어가 그리 오래 총리직을 지키지 못할 거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선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재미있는 말이 들려오더군. 아서, 자네 알고 있나?”

“재미있는 말 말입니까?”

“그래. 내 친애하는 처조카 니키가 최근 극동에 위험한 물건들을 들이고 있다는 모양이야.”

에드워드 7세의 말에 일순,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영국 국왕의 처조카 니키란 다름아닌 러시아의 황제인 니콜라이 2세.

그리고 러시아가 무언가를 벌인다는 것은 영국에게 좋을 게 하나 없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예. 저도 들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이번에 독일제 무기를 대량으로 수입한 모양이더군요.”

“그들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 같나?”

“그야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러시아인들도 생각이 있다면 극동에서의 긴장도가 위험 수준에 달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밸푸어는 차기 총리란 명함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니라는 듯,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그리 대답했다.

에드워드 7세도 밸푸어의 대답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밸푸어의 대답은 정론 그 자체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번 러시아의 행동은 일본과의 마찰 때문으로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겠단 태도를 숨기지도 않았다.

러시아가 대비를 안 하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7세는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특히 하필이면 러시아 제국이 ‘독일제’ 무기를 수입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혹시 독일 제국이 러시아 제국의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나?”

“쿨럭, 독일 제국이 말입니까?”

“폐하.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그건 너무 억측에 가까운 의견이 아닌가 싶습니다.”

밸푸어가 국왕을 향해 그리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빌헬름 2세가 즉위한 이래, 계속해서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그런데 인제 와서 독일이 왜 사실상 적국이나 마찬가지인 러시아에 무기를 퍼주는 행위를 한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크흠. 물론 폐하의 조카이신 카이저가 일본에 크나큰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말로만 그쳐왔던 일. 게다가 카이저가 정말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를 돕고자 하더라도 독일의 융커들이 과연 이를 용납하겠습니까.”

게다가 러시아의 무기 부족은 전통적인 고질병이었고, 독일 제국이 여기저기에 자기 나라 무기를 팔아치우는 것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무기가 부족한 러시아가 독일 무기를 수입하는 것또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말이었다.

“으음···. 아서, 자네의 말이 옳네. 옳은데 말이지······.”

“쿨럭쿨럭! 폐하, 그 아이가 마음에 걸리시는지요?”

그 아이?

그 아이가 누굴 말하는지 모르는 아서 밸푸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밸푸어의 의문은 이어진 에드워드 7세의 말에 의해 풀렸다.

“그래. 친애하는 한스 폰 초이 남작. 어째선지 이번 일에 그 녀석의 냄새가 진하게 난단 말이지.”

“한스 폰 초이라면 카이저를 구한 그 동양인 소년 말입니까?”

“으음. 자네는 잘 모르겠군. 나와 로버트는 작년에 내 누이의 장례식에서 그녀석을 만난 적이 있다네.”

“폐하께서 쿨럭! 그때 그 아이에게 큰 인상을 받으셨죠.”

게다가 주러시아 영국 대사관이 본국에 전한 소식에 따르면 한스 폰 초이는 공교롭게도 몇 달 전, 에드워드 7세의 또 다른 조카인 하인리히를 따라 러시아에 방문했다.

‘물론 보고에 따르면 허구한 날 니키랑 같이 사냥과 파티나 잔뜩 즐겼다지만···.’

한스 녀석 사실 자신과 동류였던 것일까?

어쨌든 에드워드 7세는 어딘가 석연찮은 기분이 계속해서 들었다.

“하지만 폐하. 그 소년이 폐하께서 놀라실 정도로 영리하다 하더라도 고작 어린아이 아닙니까. 독일인들이 맛이 간 게 아니고서야 어린아이가 정치에 간섭하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흐음.”

아서 밸푸어는 이번에도 정론을 이야기했다.

애초에 밸푸어는 대체 국왕이 그 한스 초이인지 추이인지 모를 소년에게 왜이리 집착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봤자 고작 칭키 꼬맹이잖아.’

그것이 밸푸어가 한스를 보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인이 한스를 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독일을 예의주시해주게. 내가 오래 살아봐서 아는데 이 세상이란 게 꼭 상식대로 돌아가진 않아.”

결국 에드워드 7세는 차기 총리에게 이리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에드워드 7세 또한 영국의 군주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지켜야만 했으니까.

“예. 폐하.”

밸푸어의 반응은 여전히 시원찮았지만 말이다.

“로버트, 벌써 자네가 그리워지는군.”

“허허허, 폐하. 전 더는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이만 놔주십시오. 쿨럭! 쿨럭쿨럭!”

똑똑똑─

에드워드 7세와 솔즈베리 후작이 그리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사이, 누군가가 국왕의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인가?”

“폐하. 총리 각하. 라셀레스 대사가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라셀레스? 주독 대사 말입니까?”

밸푸어의 물음에 솔즈베리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이면 또 독일이라니.

밸푸어가 ‘오늘 무슨 날인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사이, 시종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에드워드 7세에게 전보를 건넸다.

그리곤 곧 이마를 찌푸렸다.

“독일이 다음 달에 신형 전함을 진수한다는군.”

“신형 전함 말입니까?”

밸푸어도 언젠가 들은 적 있었다.

독일 제국이 신기술들을 도입한 신형 전함을 건조하고 있다고.

라셀레스 대사는 꽤 심각하게 여긴 모양이었지만, 정작 영국 해군은 이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독일 제국이 만들려는 신형 전함의 개념과 이론은 이미 영국 해군에서도 주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 왕립 해군은 이를 쓸모없는 무의미한 짓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영국인들은 독일의 건조하고 있는 신형 전함도 그저 해군에 대한 카이저의 집착이 만들어낸 실험적인 성격의 함선이라 생각했다.

그 의견을 들은 밸푸어도 더는 이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고 말이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으니까.

“아직 함명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모양이군.”

“예. 보통은 진수식 때 발표하니 말입니다. 다만 독일 해군 내부에선 임시명칭으로 ‘푸어히틀로스(f?rchtlos)’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푸어히틀로스?

두려움이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 영국 해군에도 비슷한 함명을 가진 함선이 있지 않았나?”

“쿨럭쿨럭! 크흠···. HMS 드레드노트 말씀이시군요.”

외숙부의 말에 밸푸어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독일인들은 아무래도 대영제국의 기술을 베낀 것도 모자라 대영제국의 전통있는 함선 명까지 베낀 모양이다.

“흠. 하지만 라셀레스 대사의 말론 독일 해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던데.”

듣기론 굉장히 들뜬 상태라고 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그저 기우에 불과한 것이겠죠.”

“으음. 하지만······.”

에드워드 7세가 아는 라셀레스 대사는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면 괜히 이런 전보를 보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솔즈베리 후작 또한 국왕의 의견에 동의했다.

“쿨럭쿨럭! 난 프랭크 그 친구를 오랫동안 알아 왔네. 그가 허튼 말은 안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말이야.”

“숙부님. 그래도···.”

“쿨럭쿨럭, 아직 총리는 나다. 아서. 해군청에 해군 무관들을 독일로 파견하라 전해. 가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살피고 오라고.”

“네. 그러겠습니다.”

밸푸어는 속으로 노인들이 참 겁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리 순순히 대답했다.

솔즈베리 후작의 말대로 자신은 아직 총리가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내가 총리가 되면 다를 거야.’

“그럼 오늘은 이만 다들 돌아가도록 하게. 아서, 자네도 내 말 잊지 말고.”

“예. 폐하.”

아서 밸푸어와 솔즈베리 후작은 국왕을 향해 허리를 숙인 뒤, 에드워드 7세의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밸푸어는 에드워드 7세와 솔즈베리 후작의 계속된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독일 해군이 심상치 않기는 무슨. 괜히 설레발을 치는 것뿐이겠지.’

왕립 해군에서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공언하지 않았나.

설마하니 천하의 대영제국 로얄 네이비의 명망 높은 제독들이 틀렸겠는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