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44화 (44/193)

44화 : 폭풍 전의 고요 속에서 (2)

빌헬름 2세의 셋째 아들, 아달베르트 왕자는 어렸을 때부터 해군을 좋아했다.

이는 해군에 깊은 애정을 품은 아버지 빌헬름 2세가 자신의 세례명을 증조할 아버지 빌헬름 1세의 조카이자 프로이센 해군의 성장에 막대한 공헌을 한 하인리히 빌헬름 ‘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Prinz Heinrich Wilhelm Adalbertvon Preußen)에게서 따왔을 때부터 시작된 이른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이기도 아달베르트가 다섯 명이나 되는 형제들 사이에서 남모르게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신과 달리 큰형인 빌헬름 황태자를 비롯한 다른 왕자들은 해군에 관심이 전혀 없었으니까.

아달베르트의 형들과 남동생들은 오히려 프로이센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듯 하나같이 육군에 더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가장 어린 남동생인 요아힘마저 바다 사나이의 길 보단 흙이나 파먹는 땅개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아달베르트 왕자로선 아쉬우면서도 내심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달베르트는 자연스럽게 형제들과 어울리는 것보단 책을 읽거나 아버지의 권유로 배운 바다 풍경화를 그리는데 더 시간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달베르트는 한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 소설의 제목은 ‘불멸의 리 제독’.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 궁에 들어오게 된 동양인 소년, 한스 초이가 용돈벌이 삼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는 소설이었다.

처음엔 해군을 소재로 했다기에 흥미로 보기 시작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달베르트 왕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불멸의 리 제독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16세기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는 이색적인 배경, 왕이 수도를 버리고 피신해야 할 정도로 불리한 전황, 그리고 그 불리한 전황이 다름 아닌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점차 바뀌어나간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아트미랄(Admiral) 순신 리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리 제독은 아달베르트가 목표로 삼고 있는 이상적인 해군 제독 그 자체였다.

그의 업적과 능력은 영국의 전설적인 제독이자 모든 유럽 해군 장교들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이 위대한 제독을 인제야 알게 되었다는 점이 정말이지 애석할 따름이다.

그러나 리 제독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아달베르트 왕자에게 ‘불멸의 리 제독’최근 연재분은 끔찍한 것을 넘어 고문 그 자체였다.

허울뿐인 휴전 조약이 결국 휴짓조각으로 변한 뒤, 일본이 코레아를 재침공했을 때만 해도 아달베르트 왕자는 리 제독이 또다시 이를 멋지게 막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은 간교했다!

일본군은 리 제독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이중 스파이를 이용해 코레아 정부가 리 제독을 해군 총사령관직에서 쫓아내게 했다.

그것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인데 코레아의 왕은 리 제독이 망할 뻔한 나라를 구한 것도 잊었는지 추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를 죄인으로 체포한 것도 모자라 고문까지 가했다.

마치 네덜란드의 명제독, 미힐 더 라위터르(Michiel de Ruyter)를 시기해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던 빌럼 3세처럼 말이다!

게다가 새로운 해군 총사령관으로 이 소설의 유일한 흠결이라 할 수 있는 ‘원’을 임명하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니, 아달베르트 왕자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차라리 리 제독의 믿음직한 동료였던 ‘억기 리’ 제독을 임명하던가!’

원이라니. 하필이면 원이라니!

제독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댈 자격도 없는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그 가증스러운 작자를 치켜세우는 것도 모자라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코레아의 왕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달베르트 왕자에겐 불행하게도 리 제독의 고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제발 리 제독의 무고가 밝혀지길 기도하며 펼쳐 든 다음 호에서 리 제독은 모든 업적을 부정당하고 직위를 박탈당해 일반 병사로 강등되는 치욕스러운 처벌까지 받았다.

거기다 리 제독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아픈 몸을 이끌고 수도로 올라오던 리제독의 어머니가 객사하는 참혹한 일까지 벌어졌다.

‘한스 이 사탄보다 더 사악한 자식!’

어머니의 죽음에 절규하는 리 제독의 모습에 지나칠 정도로 과몰입한 아달베르트는 눈물을 쏟으면서 작가인 한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놈은 영국의 유명한 탐정 소설 작가인 아서 도일보다 더 나쁜 놈이었다.

아서 도일은 고작 셜록 홈즈를 죽였을 뿐이지만, 한스 이 자식은 차라리 죽음이 더 자비로워 보이는 것만 같은 고통을 리 제독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후, 괜찮아. 다음 호엔 분명 리 제독의 무고가 밝혀질 거야.’

아달베르트는 흥분한 가슴을 진정시키며 계속해서 그리 중얼거렸다.

안 그러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분명 다음 호엔 상황이 역전될 거다.

리 제독은 본래의 자리를 되찾고 리 제독을 무고한 원은 내쫓길 거다.

[인기 신문연재소설 ‘불멸의 리 제독’의 충격적인 전개. 독자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분노!]

그러나 한스는 아달베르트를 배신했다.

모든 ‘불멸의 리 제독’ 애독자들을 배신했다.

“코레아 해군이 전멸했어···?”

아달베르트 왕자는 자신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신문의 활자들이 혹시 잘못 찍힌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한스으으으으으으!!!!”

원이 기어코 코레아 해군을 전멸시켰다.

그것도 리 제독이라면 절대 걸리지 않을 일본 해군의 기습 작전에 당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가치 없는 목숨과 함께 리 제독이 고생고생해서 일궈놓은 코레아 해군을 깡그리 날려버렸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아달베르트? 얘 갑자기 왜 이래?”

“야, 야. 좀 진정해봐!”

지옥의 밑바닥을 뚫고 나갈 것만 같은 고구마의 연속에 이성을 잃어버린 아달베르트는 당황한 형제들을 뒤로하고 공부를 위해 머물고 있던 왕자의 집을 뛰쳐나가 기차를 타고 곧장 포츠담으로 향했다.

물론 갑자기 아달베르트 왕자의 분노에 직면하게 된 한스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러시아 제국에서 돌아온 뒤, 나는 푹 쉬며 러시아 여행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비밀회담이 끝나고도 한동안은 독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니콜라이 2세, 그리고 러시아 귀족들과 함께 또 사냥이다, 파티다 뭐다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몸이 감당하기엔 무리였어.’

그런데 이번엔 갑자기 내 앞에 그리 친하지도 않은 아달베르트 왕자가 나타났다.

이유야 뭐 짐작 간다.

아달베르트 왕자가 ‘불멸의 리 제독’의 애독자란 건 예전에 요아힘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까.

거기다 이미 내 서재엔 전개에 불만을 가진 독자들이 보낸 팬레터, 아니 분노의 항의서가 잔뜩 쌓여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리 제독에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한스, 네가 사람이냐? 사람이야?!”

물론 아달베르트 왕자가 이 정도로 ‘불멸의 리 제독’에 집착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왕자가 나를 이렇게 갈군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왕자님. 이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역사가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그랬다. 불멸의 리 제독은 일단은 실화에 기반한 역사소설이었다.

내가 딱히 이순신 장군을 괴롭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보는 맛을 늘리기 위해 살짝~ 양념과 조미료를 뿌리긴 했지만, 그거야 작품의 재미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물론 나도 눈치는 있었기에 그걸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랬다간 눈이 돌아간 아달베르트 왕자에게 한 대 맞을 것 같았으니까.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건 분노한 왕자를 달래야만 했다.

“왕자님. 다음 연재분 원고를 읽어보시겠습니까?”

“···원고?”

다음 연재분 원고란 말에 아달베르트 왕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래. 이 충무공 광신도가 관심이 없을 리가 없지.

물론 원래라면 보여줘선 안 되는 것이겠지만, 지금은 내 목숨이 더 중요했다.

나는 자물쇠가 달린 서랍 안에 넣어둔 불멸의 리 제독 최신화 원고를 아달베르트 왕자에게 건넸다.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젠장! 리 제독, 믿고 있었다고!”

아달베르트 왕자가 사람이 저런 얼굴을 지을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환희와 기쁨에 겨운 채 소리쳤다.

아. 명량해전은 못 참지.

“보다시피 불멸의 리 제독은 안전합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돌아가 주세요.”

아달베르트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표정으로 신궁전을 떠났다.

이러다가 마지막 화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면 그땐 진짜 나에게 결투라도 신청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보는 내가 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불멸의 리 제독에 단단히 빠진 아달베르트왕자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나는 그제야 테슬라가 나에게 보낸 편지를 뜯어볼 수 있었다.

편지에 따르면 다행히도 라디오 연구는 착실하게 성과가 나오는 모양이다.

다만 테슬라의 말에 따르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몇 가지 있다는데 특히 전기 신호를 증폭시키는데 상당한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라디오 개발에 있어 심각한 걸림돌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먼 거리에서의 원활한 음성 송출이 불가능했고, 이는 라디오를 실용화시키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할 테니까.

‘전생에 우연히 라디오에 관련된 다큐멘터리에서 이를 해결할 방법이 나왔던 것 같은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한 단어를 떠올렸다.

진폭 변조(Amplitude Modulation).

흔히 AM이라 알려진 기술.

이 기술을 사용하면 테슬라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진폭 변조 기술엔 최소 라디오 밸브(Radio valve)라고도 불렸던 진공관, 그중에서도 ‘3극 진공관(Triode)’이 필요했다.

그러나 3극 진공관은 이 시대에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3극 진공관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후인 1906년이었다.

“3극 진공관을 발명한 사람은 분명 미국의 리 디포리스트(Lee de Forest) 였지?”

3극 진공관 ‘오디온(Audion)’의 발명으로 전자기기 산업의 부흥을 이루어낸 일명 ‘라디오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

라디오 기술의 선구자는 페슨든이지만 디포리스트의 오디온과 이를 이용한 진폭 변조 기술이 없었더라면 라디오의 실용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3극 진공관의 발명가가 디포리스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로베르트 폰 리벤(Robert von Lieben)은 디포리스트보다 몇 달 먼저 3극 진공관을 발명하고 특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폰 리벤은 진공관 발명으로부터 고작 7년 만에 사망했기에 그의 진공 관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원 역사에서 실질적으로 상용화된 것은 디포리스트의 오디온 뿐이었다.

‘물론 디포리스트나 폰 리벤 말고도 플레밍도 있긴 한데 그 양반은 애초에 논외지.’

플레밍의 법칙으로 유명한 존 앰브로즈 플레밍(John Ambrose Fleming)은 지금으로부터 2년 후인 1904년에 3극 진공관의 전신이 된 2극 진공관을 발명한다.

하지만 플레밍은 하필이면 그 마르코니 사의 협력자.

그리고 마르코니는 나와 테슬라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던 만큼 플레밍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디포리스트 쪽에 천천히 접근해보자. 디포리스트가 안되면 폰 리벤에게도 접촉해보고.”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

괜히 빨리 가려고 했다가 모든 것을 망치는 것보단 착실하게 나아가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라디오보다 더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독일 제국의 신형 전함.

첫 번째 드레드노트의 진수식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