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폭풍 전의 고요 속에서 (1)
“어어, 거기. 조심해서 안 내려?”
“여기 들은 것들이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그 즉시 영창이야. 그러니 정신 퍼뜩 차려!”
중국 요동 반도, 뤼순.
이 시대엔 ‘포르트 아르투르(Порт-Артур)’란 이름으로 불리던 러시아 제국의 조차지는 아침부터 배에서 무언가를 하역하는 수병들과 선원들로 인해 북적였다.
“아침부터 이게 대체 무슨 소란입니까?”
항구 거리를 지나가던 한 남자가 수병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주하게 배에서 무언가를 하역하는 것을 보고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그리 물었다.
그러자 병사는 의심스럽단 목소리로 남자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당신은 누군데 그런 걸 묻는 거요?”
“저 말입니까? 그냥 사업가입니다. 사업가.”
“사업가?”
“목재 사업을 하죠. 제가 아침엔 부둣가를 산책하는데 이 근처를 지나가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해서요.”
“하. 부자 나리들은 참 태평하게 사는구만.”
남자의 넉살 좋은 태도에 그리 작게 중얼거린 병사는 퉁명스러운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요. 선원들이 떠드는 말에 따르면 저기 키아우초우에서 가져온 맥주라는데.”
“키아우초우? 독일 조차지 말입니까?”
“높으신 분들이 마시려고 들여온 거겠지. 거 독일 맥주가 맛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끝내주잖소.”
물론 자신 같은 말단 졸병들은 손도 못 댈 게 분명했지만 말이다.
덕분에 괜히 새벽부터 고생이라며 병사는 남자에게 그리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위에 쌓인 게 꽤 있는 모양.
하지만 지금 남자에게 그런 건 어찌 되든 좋았다.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저 상자들의 진짜 정체였다.
남자는 의심이 잔뜩 서린 눈동자로 병사들이 항구 바닥에 내려놓은 상자 더미를 자세히 관찰했다.
‘맥주 상자라고 치기엔 너무 크군. 또 경비도 지나치게 많고.’
아무래도 확인을 해보는 게 좋겠다 마음먹은 남자는 병사에게 알려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뒤 한 뒤, ‘맥주 상자’들이 옮겨지고 있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앞엔 경비병 둘이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모락모락~
“뭐야, 저건?”
“이런 씨. 불난 거 아니야?!”
저들을 치우는 것 정도는 남자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담배 하나만 있으면 간단한 일이었다.
경비병들이 연기를 조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순식간에 자물쇠를 따고는 곧장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는 아까 러시아 수병들이 배에서 내리던 상자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끼릭─!
괜히 시간을 끌 이유는 없다.
남자는 곧바로 숨겨놓은 칼을 꺼내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상자가 열리는 순간, 남자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으며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하. 맥주. 맥주라고?”
망할 러시아 놈들.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독일제 맥주 따위가 아니었다.
기관총.
남자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분명 기관총이었다.
보리로 만든 술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데 특화된 살상 무기였다.
‘맥심 기관총인가? 아냐, 이건···.’
MG99.
분명 독일 제국이 사용하고 있는 기관총이었다.
러시아 제국이 대체 왜 독일제 기관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남자는 또다른 미스터리가 생기자 담배가 마려운 것을 느끼며 서둘러 다른 상자들도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돌겠군. 이반 놈들. 대체 이것들을 뭔 수로 구한 거야?”
독일제 기관총, 독일제 소총, 독일제 총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파이프 총까지.
이곳에 있는 것은 죄다 독일 제국에서 만들어진 전쟁 병기였다.
상자들을 대충 확인한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이건 국제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 이 일이 러시아 제국의 단독 행동이 아닌 독일 제국과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서둘러 보고해야 한다.’
아까와 달리 여유가 사라진 남자는 경비병들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창고를 빠져나갔다.
물론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흔적을 깔끔히 지운 뒤에 말이다.
“오셨나요. 사장님.”
“마리야. 잠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사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아요.”
“아, 알겠습니다.”
위장 신분을 위해 일부러 설립한 자신의 회사로 돌아온 남자는 비서에게 그리 말한 뒤, 곧바로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청은···없군.’
자신이 사무실을 비운 사이 혹여 수상한 흔적이 생기진 않았는지 확인한 남자는 사무실 한쪽에 있는 전신기로 다가갔다.
“운이 좋았군. 정보원을 만나고 오는 길에 이런 대어를 물다니.”
남자는 그리 중얼거리며 전신을 보낼 준비를 마쳤다.
전신을 보내는 상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본국과의 연락책이자 자신의 아내, 마거릿이었다.
띱─띠이이───띱띱띱──띠이이───
[러시아 제국이 포트 아서(Port Arthur)에 대량의 독일제 무기 반입.]
[이것이 일본과의 마찰에 대비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이 독일제 무기를 구매한 것인지, 아니면 독일 제국이 직접 개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하지 못함.]
[또한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 본국의 지시가 따로 있기 전까지 아카시모토지로 대령을 비롯한 일본 첩보원들에게 정보 전달을 금지할 것을 요청.]
[사랑하는 마거릿에게 시드니 라일리가.]
***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한편 겨울 추위가 가고 슬슬 봄기운이 물씬 풍겨오고 있는 프리드리히쇼프 성에선 마르가레테 공주가 저택의 정원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맏아들 프리드리히와 둘째 아들 막시밀리안을 찾아다녔다.
“어휴, 얘들이 대체 어딜 간 거야?”
공부를 해야 할 시간인데 가정교사를 바람맞히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슬슬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될 찰나, 마르가리테 공주의 눈에 불쾌한 작은 생명체들이 들어왔다.
“구. 구구.”
그것은 다름 아닌 비둘기.
비둘기 떼였다.
“테슬라 씨!”
마르가리테 공주가 저주하듯이 진심으로 분노를 담아 그 이름을 외쳤다.
니콜라 테슬라.
어느 날 한스를 만나러 프리드리히쇼프에 찾아왔다가 그대로 이곳에 눌러앉아버린 괴짜 과학자.
마르가리테 공주는 한스의 부탁도 있었기에 테슬라가 온종일 난생처음 보는 기계들을 만지작거리며 소음을 유발하는 것을 참았다.
어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의 저택 한쪽에 미관을 해치는 정체불명의 철탑을 세우는 것도 넓은 인내심으로 참아주었다.
그러나 정원에서 모이를 뿌리며 비둘기들을 정원이란 정원에 들끓게 하는 것 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더는 못 참아!”
지금까지는 한스의 얼굴을 보아 주의로 끝내지만, 이젠 못 참는다.
오늘 테슬라랑 저 지긋지긋한 비둘기 문제에 대해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은 마르가레테 공주는 성큼성큼 걸으며 테슬라의 연구실이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
그러나 연구실 틀어박힌 채 작업에나 열중하던 평소와 달리 테슬라는 별관 앞 마당에 나와 있었다.
방금까지 그토록 찾아다니던 두 아들과 함께 말이다.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헉!”
“얘들이 어딜 갔나 했더니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아~그게 말이죠···.”
프리드리히와 막시밀리안은 그리 말을 흐리며 화가 잔뜩 난 어머니의 눈초리를 이리저리 피했다.
자신들이 잘못했단 건 알고 있는 모양이다.
변명조차 하지 않는 아들들의 모습에 화가 난 마르가레테 공주가 잔소리 한 바가지를 쏟아부으려는 찰나, 테슬라가 이를 말리려는 듯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끼어들었다.
“아, 그리 화내지 마세요. 공주님. 프리드리히 군과 막시밀리안 군은 잠깐 제 실험을 도와주고 있었을 뿐입니다.”
“뭐라고요?”
물론 마르가레테 공주는 더 기가 막혔다.
마르가레테 공주는 테슬라가 한스의 투자를 받아 개발하고 있는 라디오란 것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것이 전기를 이용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기란 것은 잘못 다루면 사망에 이룰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단 점도 말이다.
“제 아이들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키셨다고요?!”
“위, 위, 위험한 일이라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아이들에게 함부로 위험한 기계들을 만지게 할 만큼 사려분별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르가레테 공주가 당장이라도 테슬라를 잡아먹을 듯이 굴자, 겁에 질린 테슬라가 말을 버벅대면서도 그리 단언했다.
평소 과학과 연구를 위해서라면 자기 몸도 아끼지 않는 테슬라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리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럼 대체 프리드리히와 막시밀리안이 무엇을 도와주었다는 거죠?”
“아, 그건 직접 보셔야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프리드리히 군. 막시밀리안 군.”
“네. 선생님!”
테슬라의 말에 기운차게 대답하곤 어디론가로 달려가는 프리드리히와 막시밀리안.
공부에 저 정도의 열정을 쏟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마르가레테 공주에겐 애석하게도 장남과 차남은 공부보다는 이 괴짜 과학자와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어디로 간 거죠?”
“저택 반대편입니다.”
“반대편이요?”
“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마르가레테 공주의 물음에 테슬라가 상당히 들뜬 모습으로 말했다.
평소엔 무기력한 모습으로 벤치에 비둘기 떼에게 모이나 주면서 실험을 할 땐 이리 활기가 넘치다니.
정말이지 괴짜는 괴짜였다. 과학자란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런 걸까?
삐───!
마르가르테 공주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때 테슬라의 바로 옆에 있던 커다란 기계에서 이상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기계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잘 들리나요?]
[엄마! 테슬라 선생님!]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마르가르테 공주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프리드리히와 막시밀리안.
이것은 분명 아들들의 목소리였다.
“이건 대체···.”
처음 마르가르테 공주가 떠올린 것은 전화기나 축음기였다.
애당초 이 시대에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는 기계라곤 그 둘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기계는 아무리 살펴봐도 전화기처럼 전화선이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헴. 지금 프리드리히 군과 막시밀리안 군은 저택 반대편에서 마이크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두 어린 친구의 목소리는 저 송신탑을 통해 전파에 실려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로 전달되고 있는 거죠! 아, 과학의 경이로움이란!”
테슬라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외치자 마르가레테 공주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솔직히 테슬라가 말한 것의 절반은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마르가레테 공주도 저택의 끝에서 끝으로 가는 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라디오’입니다! 얼마나 먼 곳이든 전파만 닿는다면 목소리든, 노래든 실어 보낼 수 있죠. 아, 물론 지금보다 더 먼 곳으로 목소리를 안정적으로 실어 보내려면 아직 개선이 더 필요합니다만···.”
자신만의 세상에 테슬라가 라디오의 과학적 원리와 개선하는 데 필요한 점들을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물론 과학적 지식이 빈곤했던 전형적인 19세기 귀족 여성인 마르가레테 공주의 귀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한스가 테슬라 씨를 불러오면서까지 저 라디오란 것을 만들려는 이유는 있었던 모양이네.’
아직까진 어디까지나 신기한 기계란 감상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런 신기한 기계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바로 지금의 시대 아니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남작께선 러시아에서 돌아오셨습니까?”
“네. 돌아온 지 꽤 되었을걸요?”
“그렇군요. 아무래도 연구실에 오래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이 애매해져서. 그럼 오랜만에 남작께 보고 겸해서 편지를 좀 써야겠군요. 라디오를 실용화하려면 필요한 게 있거든요.”
그러나 테슬라의 편지가 도달했을 때,
“똑바로 서라. 한스.”
“아, 아달베르트 왕자님?”
“이 악마 같은 자식. 어째서 아트미랄 리에게 그런 짓을 한 거냐!”
“?!”
한스 폰 초이는 광팬의 분노라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있었다.
작가의말
작중 나오는 시드니 라일리는 ‘에이스 오브 스파이’란 별명으로 유명한?전설적인 영국 스파이로 실제로 이 시기에 일본과 협력해 목재 회사 사장으로 위장, 극동 러시아에서 러시아 군의 기밀 정보를 빼내는 등의 첩보 활동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