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폭풍전야의 동아시아
“독일의 제안을 이리 순순히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늦은 밤, 비테의 저택으로 찾아온 러시아 제국 외무장관 람스도르프 백작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비테를 향해 말했다.
러시아 제국은 독일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직 실무단계에서 협상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었지만, 차르가 이미 마음을 굳힌데다가 비테 또한 침묵으로 찬성표를 던지면서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다.
“전 아직도 이것이 러시아를 위해 정말 옳은 결정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는다고 한들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어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회의감 어린 람스도르프의 말에 비테는 잔에 술을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자고로 무기라는 것은 다루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무엇보다 강력한 도구가 될 수도, 아니면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로 전락할 수도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아는 제정 러시아군과 그들을 이끄는 장성들은 그리 유능한 이들이 아니었다.
가끔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블라디미르. 우리의 목표는 일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닐세. 우리는 그저 패배하지만 않으면 돼.”
“예?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
“일본과의 전쟁은 우리 러시아 제국에 있어 하등 이득 될 것이 없는 무의미한 전쟁이야.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선 말이네.”
계속되는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해 러시아 민중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물론 이는 서방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 제국의 산업화를 위해 과도한 식량 수출 정책을 이어가던 비테의 책임도 있었지만, 어쨌든 최악의 경우 일본과의 전쟁이 기폭제가 되어 러시아인들의 분노가 폭발할 수도 있었다.
‘이 나라를 치기 어린 혁명가 나부랭이들 손에 넘길 순 없지.’
물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지만, 상황은 이미 비테의 손을 떠나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베조브라조프와 알렉세예프 같은 자들은 차르의 총애를 뒤에 업은 채 자신들의 사익과 권력을 위해 극동에 쓸데없는 긴장을 일으켰고, 일본은 일본대로 영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이제 시간문제다.’
파도를 피할 수 없다면 파도에 맞설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비테는 하인리히 왕자를 따라온 동양인 소년, 한스 폰 초이 남작과의 거래를 받아들였다.
비테의 목적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국력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
그것을 위해선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낼 필요가 있었고 남작은 그 길을 제시했다.
‘카이저는 대체 어디서 그런 걸 주워왔는지.’
처음엔 그저 좀 똑똑한 꼬마라고 생각했건만, 직접 만나본 한스 폰 초이는 영국인들 마냥 교활한 능구렁이 같은 소년이었다.
독일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북만주.”
“예?”
“일본과의 평화 협정이 벌어질 때, 우리가 북만주 일대를 가져갈 수 있도록 중재해주겠다더군. 상황에 따라선 몽골도.”
그것이 비테가 한스와의 거래에서 얻어낸 것이었고, 영국과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 대신 한반도와 포트 아르투르(뤼순)는 포기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북만주 정도면···나쁘진 않군요.”
“그래. 나쁜 조건은 아니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의 말에 비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해적 놈들도 러시아가 종전 조건으로 한반도랑 포트 아르투르를 포기하는 대신 북만주를 가져간다는데 뭐라 참견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극동에 많은 투자를 한 베조브라조프 일당은 울상을 짓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좋았다.
애초에 비테는 극동에서의 무리한 확장 정책보단 그냥 땅이나 파먹으며 개발에나 주력하자는 입장이었으니까.
‘물론 그 이전에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게 우선이겠지.’
전쟁에서 지면 중재고 북만주고 끝이다.
어차피 별다른 선택지도 없는 이상, 독일의 군사 지원을 받아들이고 얻을 것만 얻는 게 최선이었다.
어린아이의 손에 놀아나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러시아 제국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감수할만한 손해야.”
비테는 그리 중얼거리며 잔을 들었다.
***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위하여!”
비테가 잔을 기울이며 한스와의 거래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을 때,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는 영일동맹 체결을 축하하는 연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 대영제국과 동맹이라니, 이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지!”
“이것으로 우리 대일본제국도 이제 당당한 열강으로 우뚝 섰다 할 수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하하하!”
이 자리에 모인 일본 제국의 고관들과 화족들은 서로의 잔을 신나게 부딪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일본이 두려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구 열강과 동등해진 기쁜 날이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나?
물론 서양인들은 일본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해줄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른 채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일본인들은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일본제국 제11대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쓰라, 이곳에 있었군.”
“야마모토 각하!”
일본 육군의 아버지이자 조슈벌의 수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등장에 가쓰라 총리가 곧바로 절도있게 허리를 숙였다.
누가 보면 야마가타가 총리인 줄 알 정도로 말이다.
현 일본 제국의 실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번 영일동맹 성사, 정말 수고했네. 역시 자네를 총리로 삼기로 잘했어.”
“아닙니다. 각하. 각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저 홀로 대업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하하하! 이 사람 아부하고는. 하여튼 이것으로 군비 확충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겠군.”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잔을 부딪치며 웃음을 터트리는 가쓰라 총리와 야마가타.
“가쓰라! 야마가타!”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연회장 입구에서 들려온 노인의 노호성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고개를 돌린 야마가타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조슈 3존이라 불린 일본 정계의 거물.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연회장은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감히, 감히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멋대로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하다니! 네놈들은 정말 러시아 제국과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냐!”
“이토.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이야기하지.”
야마가타가 귀찮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일부러 이토를 만나지 않고 피해 다녔던 것인데 아무래도 그것이 역효과였던 모양이다.
이토를 억지로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온 야마가타는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는 오랜 친우를 한심하단 눈으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천하의 슌스케(이토 히로부미의 옛 이름)도 겁쟁이가 다 되었군.”
“대일본제국을 너희 미치광이 전쟁광들로부터 구하려고 할 뿐이다! 정녕 우리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강경하게 반대했다.
그 또한 청일전쟁을 이끌었던 과거가 있지만, 어디 러시아 제국이 저 부패하고 무능한 지나와 같던가?
러시아와의 전쟁은 이토가 볼 때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조선과 뤼순을 이대로 로스케 놈들에게 넘겨줄 생각이냐!”
친우의 답답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 야마가타가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본이 진정한 열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조선을 병탄한 뒤, 이를 기반으로 광활한 만주를 넘어 대륙으로 나아가야 했다.
러시아가 두렵다고 제자리에 멈춰선 안 된단 말이다!
“지금의 일본은 쿠로후네(黑船)에 벌벌 떨었던 그때의 일본이 아니야. 승산은 충분히 있단 말이다!”
“승산? 저 거대한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승산? 이건 미친 짓이야. 왜 그걸 모르나!”
이토 히로부미가 절박한 얼굴로 외쳤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이토에게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
“이미 모든 것은 결정이 난지 오래다. 이토 네가 로스케 놈들과 의미 없는 협상이나 하고 있을 때 말이지.”
“네, 네놈···!”
야마가타는 이토에게 등을 돌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의 번영을 위해선 반드시 조선, 그리고 나아가 저 광활한 지나를 손에 넣어야 한다.
설령 그 길이 피로 얼룩진 길이라 하더라도.
***
“나으리, 오늘 자 신보를 가져왔습니다요.”
“거기 두고 가거라.”
한편 러시아와 일본 간의 알력이 벌어지고 있는 대한제국에선 한 남자가 가까운 미래에 조선으로 불어닥칠 폭풍의 전조를 느끼고 실실 웃고 있었다.
“하! 영일동맹이 체결되었다라. 일본이 곧 움직이겠구만.”
남자는 신문에 적힌 기사를 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지금은 관직에서 물러난 채 고향에서 글이나 읽으며 허송세월이나 보내고 있던 남자였지만, 정세를 판단하는 눈은 조선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자부했다.
‘일본은 분명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것이다!’
남자는 일본의 야욕과 조선에 대한 갈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을미년의 사달이 어디 괜히 일어났겠는가?
조선이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있는 이상, 일본은 조선을 다시 자신들의 영향권 안에 넣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불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승패는 어찌 될 것인가.
‘일본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을까?’
남자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친러파였던 남자는 러시아의 사정에 대해 잘 알았다.
그들이 얼마나 무능한지, 또 얼마나 속 빈 강정인지 말이다.
“조만간 일본이 다시 조선에서 득세할 날이 오겠군.”
연해주와 요동의 러시아군만으로는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
또한 구주의 러시아 본토에서 지원 병력이 오는 데는 철마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게다가 이번 영일동맹으로 저 대영제국까지 일본의 뒷배로 붙은 이상, 전쟁은 일본에 우세하게 돌아갈 것이다.
노서아 코쟁이들은 결코 이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다만 변수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대한제국, 이곳 조선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우선 조선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체가 들고일어나 일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면 일본에 있어 최악, 그 자체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말이야.”
저 멀리 한양에 계신 잘나신 황제 폐하께서는 무능하시고 탐욕스러운 머저리 그 자체였다.
겁쟁이 황상은 일본군이 조선에 발을 딛는 순간, 맞서 싸우기는커녕 겁을 집어먹고 일본이 시키는 대로 조약서에 옥새나 찍을 게 분명했다.
“슬슬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갈아타야 할 때인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친청에서 친미로, 친미에서 친러로 몇 번이나 편을 갈아탄 남자였다.
편을 바꾸는 것은 익숙했다.
물론 누군가는 자신을 매국노, 배신자, 기회주의자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승리자의 편에 서는 것이 어찌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남자는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성공하고 싶었다.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꼬마 남작처럼 말이지.”
남자는 그리 중얼거리며 서랍에 고이 접어 넣어두었던 신문을 꺼내 들었다.
신문의 내용은 청나라의 황족이 독일 제국의 황제에게 사죄의 뜻으로 삼궤구고두례를 올렸다는 것.
조선에서도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대사건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남자가 주목한 것은 황제 옆에 서 있는 작은 동양인 소년이었다.
“한스 폰 초이 남작.”
그는 다름 아닌 조선인이었다.
“조선식 이름은 최한수라고 하던가?”
덕분에 요즘 조선에는 이 ‘꼬마 남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삼전도’의 복수를 한 조선인 소년의 이야기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희망으로 다가왔으니까.
‘몇몇 무지렁이들은 남작이 덕국의 황제에게 군사를 빌려 조선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다지?’
남자가 보기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개소리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미 독일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남작이 뭐가 아쉬워서 이 가진 것 하나 없는 비렁뱅이 같은 나라를 돕겠나?
“어쨌든 부럽구먼. 부러워.”
자신은 저 멍청한 이명복이 때문에 허송세월하고 있는데 이 꼬마 남작은 독일황제의 목숨을 구했다는 이유 하나로 총애를 받으며 그 위세 드높다는 덕국귀족으로서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심지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얼마 전에 사망한 황태후에게 거대한 저택과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하니 남자로선 없던 질투심마저 생길 정도였다.
“나라고 이렇게 못 될 것은 없지.”
더는 낡고 고루한 충성심과 애국심 따위에 사로잡힌 채 실패한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남작처럼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나라 하나 못 팔까.”
남자, 이완용(李完用)은 그리 중얼거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에 폭풍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