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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를 구했다-41화 (41/193)

41화 : 러시아 제국 (3)

“독일의 제안은 무엇인가.”

비테의 말에 나는 내심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러시아 제국 최후의 명재상, 스톨리핀과 함께 무너져가는 러시아 제국의 수명을 연장했던 사람답게 뛰어난 통찰.

유능한 사람은 이래서 좋다. 굳이 길게 설명 안 해도 재깍재깍 알아들으니까.

“잠깐, 비테.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지만 이와 반대로 니콜라이 2세 같은 사람은 답답했다.

차르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지 얼빠진 얼굴로 비테에게 질문했다.

이에 비테가 작게 한숨 쉬며 우둔한 차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하. 저 또한 남작과 독일 제국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 러시아 제국은 고전, 아니 최악의 경우 패배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뭐, 뭐라? 정녕 비테 자네까지 그리 생각한단 말인가?!”

망치로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입을 쩍 벌리는 니콜라이 2세.

하지만 비테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는 도저히 못믿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납득 할 수가 없네. 우리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니키, 이건 우리 독일 제국 정부와 참모본부의 참모들이 심도 있는 논의 끝에 내놓은 결론이야.”

“하지만···.”

하인리히 왕자의 말에도 니콜라이 2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결국 차르에게 현재 러시아가 처한 상황을 이해시키려면 이를 천천히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생각해보십시오.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주전장은 분명 포트 아르투르(뤼순)가 있는 랴오둥 반도, 그리고 만주가 될 것입니다.”

“으, 으음···.”

“독일 제국은 결코 러시아군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는 분명 일본보다 강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주 전력은 어디까지나 유럽에 있지, 머나먼 극동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

러시아인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들도 슬슬 깨달았을 것이다.

왜 나나 비테가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를.

“쿠로파트킨 전쟁장관. 5년 안에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본토의 병력과 물자를 극동으로 수송하려면 얼마만큼의 기간이 걸릴 것 같소?”

비테의 말에 원 역사의 러일전쟁에서 육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쿠로파트킨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최소 3, 4개월입니다.”

“그렇게나 오래 걸린단 말인가!”

쿠로파트킨의 말에 경악한 얼굴로 탄식을 터트리는 니콜라이 2세.

하지만 이를 러시아 정부의 책임이라곤 할 수 없었다.

시베리아란 이름의 러시아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활한 설원은 아직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폐하,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아직 미완성입니다. 물론 일부 구간이 개통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본토에서 극동으로의 대규모 병력 수송과 보급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극동군의 전력만으로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은···.”

차르의 말에 비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나마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니콜라이 2세는 고개를 푹 숙였고 말이다.

극동 러시아군은 사실상 2선급인 식민지 주둔군이나 마찬가지인 군대였다.

게다가 어느 시대건 항상 보급 문제를 달고 다니기로 유명한 러시아 군대답게 무기는커녕 탄약조차 부족한 상황.

그런 극동 러시아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분전하는 것은 무능한 러시아 장성들조차 기대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오, 주여···.”

“폐하, 차라리 일본과 협상을 맺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외무장관?”

“일본이 우리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와 중국에서의 이권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한반도를 넘겨주고 중국에서의 이권을 어느 정도 양보한다면 분명···.”

“그 입 다무시오!”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이 일본과의 협상을 이야기하자 군부 쪽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은 자신을 향해 큰 소리를 낸 장본인이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겁쟁이처럼 섬나라 원숭이들에게 머리를 숙이잔 거요? 우리 대러시아제국이?!”

“알렉세예프 제독. 누가 일본에게 머리를 숙이자고 했소. 무의미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서자는 거지!”

“그게 굴복이랑 대체 무엇이 다른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의 반박에 알렉세예프 제독이라 불린 남자가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곤 나와 잠깐 눈을 마주쳤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Алексеев).’

차르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자 대표적인 대일 강경파이자 러일전쟁 당시 극동총독이었던 인물.

나와 독일 정부가 사전에 접촉을 마친 베조브라조프 파벌의 핵심 일원이었다.

“일본과의 협상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만주와 요동, 그리고 조선은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우리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여야 하오!”

알렉세예프 제독이 주먹을 휘두르며 그리 외치자 상당수의 귀족과 장성들이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테와 람스도르프를 비롯한 비테파 관료들은 당연히 이를 반기지 않았고 말이다.

‘알렉세예프 제독을 비롯한 베조브라조프 파벌과 비테는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으니까.’

이 자리엔 없었지만, 알렉세예프 제독과 마찬가지로 니콜라이 2세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베조브라조프(АлександрМихайлович Безобразов)는 비테와는 견원지간이자 가장 큰 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베조브라조프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차르의 총애를 바탕으로 극동 외교에 간섭하며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퍼트리고 이권을 매입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비테는 당연히 이를 반대하고 베조브라조프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니콜라 이 2세는 그런 비테의 노력을 무산으로 만들었다.

극동 문제에서 비테를 패싱하고 측근인 베조브라조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결국 베조브라조프와 알렉세예프 제독 같은 무책임한 대일 강경파들의 부상으로 러일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고 이는 러일전쟁이 터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러시아 제국에 있어선 크나큰 불행.

하지만 나와 독일 제국엔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독일인들 말 못 들었소? 이대로 전쟁이 나면 패배라니까!”

“한 번 싸워보지도 패배를 운운해? 그 쿠로파트킨도 겁쟁이가 다 되었군!”

“뭐? 겁쟁이?!”

“자자, 모두 진정하십시오.”

내 말에 비테파와 알렉세예프파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비난을 쏟아붓다 못해 주먹질이 나가기 일보직전이었던 러시아인들이 움찔하며 말싸움을 멈췄다.

좌중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러시아 제국이 협상을 원하더라도 이를 일본 측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영일동맹이 체결된 이상, 일본이 굳이 러시아와 협상을 맺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영국이 이를 두고 보지도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현 일본 총리인 가쓰라 다로(桂太?)와 가쓰라의 뒤에 있는 야마가타아리토모(山縣有朋)는 베조브라조프 파벌처럼 러시아 문제에 있어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던 자들이었다.

대표적인 협상파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 지 오래였고 말이다.

러시아도 일본도 강경파들이 득세하는 상황.

이러니 전쟁이 안 터지려야 안 터질 수가 없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하인리히 왕자님과 제가 러시아에 온 것은 일본에 맞서는 러시아를 지원하고자 함이니까요.”

“그게 정말인가?”

러시아가 패배할 수도 있단 말에 내내 침울한 얼굴이었던 니콜라이 2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예. 카이저께서는 영일동맹에 크게 분노하시어 일본의 마수로부터 러시아 제국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확실히 빌리라면 그럴만하지.”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러시아인들이 일리가 있다는 듯 웅성거렸다.

그들이 아는 빌헬름 2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물론 실제론 어디까지나 내 아이디어에 내각과 군부가 의견 합일을 이루면서 결정된 일이었지만 말이다.

“독일 제국 정부는 일본과의 전쟁이 발생할 시 러시아 제국을 돕기 위해 극동러시아에 대규모의 무기 지원을 할 의사가 있습니다.”

“무기 지원이라고?”

“오오!”

조금 전까지 일본과의 협상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우울한 분위기였던 러시아인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반색했다.

“조건이 무엇인가?”

비테 한 사람만 빼고.

잘 벼려진 칼보다도 날카로운 경계심을 품은 비테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무기 지원은 어디까지나 극동 러시아에 한정될 것. 그것이 우리 독일 제국의 조건입니다.”

“뭐? 정녕 그것뿐인가?”

“물론입니다. 이번 지원은 어디까지나 빌헬름 2세 폐하의 ‘선의’에 의한 것이니 말입니다.”

내 말에 비테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다.

그래. 솔직히 나 같아도 믿지 않을 소리긴 하다.

“폐하. 반드시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비테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특히 극동에 자신들의 정치생명이 걸려있는 데다가 우리의 ‘성의’를 까지 받은 알렉세예프 제독를 비롯한 베조브라조프 파벌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현재 극동 러시아군에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무기와 탄약. 독일의 지원이 있다면 이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 그런가?”

“물론입니다. 폐하. 게다가 독일제 무기의 우수성은 이미 증명된 바이지요.”

“그건 그렇지.”

내가 그리 덧붙이며 말하자 니콜라이 2세가 이미 반쯤 넘어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기에 지금까지 않아서 구경만 하고 있던 하인리히 왕자가 쐐기를 박았다.

“이건 결코 러시아 제국에 나쁜 이야기가 아니야. 니키.”

“하인리히.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겠어?”

“물론이지.”

하인리히 왕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일은 여기서 얼추 끝났다. 나머지는 왕자가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잠깐 따로 이야기할 수 있겠나?”

비테였다.

“물론입니다. 재무장관님.”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대답하자 비테가 아무도 없는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를 향해 눈을 무섭게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독일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건가.”

“꿍꿍이라뇨. 아까도 말했듯이 이는 어디까지나 선의로···.”

“하! 선의? 선의라고?! 그 독일 제국과 카이저가?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말을 믿고 말지!”

음. 역시 안 믿네.

“우리 독일의 의도가 어떻든 러시아엔 나쁠 게 없는 일이잖습니까. 독일의 지원을 받으면 적어도 일본에 패배하진 않을 테니까요.”

“승리하지도 않는다는 거군. 독일이 원하는 것이 그건가?”

러시아와 일본이 양패구상하는 것?

비테가 나에게 그리 물었다.

여기서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동양엔 순망치한이란 말이 있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죠.”

“우리 러시아 제국이 패배하면 독일이 손해를 본다 이 소리인가?”

비테가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영국 때문이군. 이 족제비처럼 교활한 꼬맹이 같으니.”

족제비처럼 교활하다니.

이 아저씨가 농담이 지나치네.

“우리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해 남하정책에 제동이 걸리면 영국은 본격적으로 독일을 견제하기 시작하겠지. 그러니까 독일이 무기 지원 같은 소리를 꺼낸 거야.”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으십니까?”

“쯧···.”

내 말에 비테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대놓고 러시아를 이용하겠다는 나와 독일 제국의 태도가 마음에 들진 않겠지만, 비테에겐 정말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알렉세예프 제독 같은 강경파들은 극동 이권을 지키기 위해 독일의 지원을 받아들이자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들을 총애하는 차르 또한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로 전쟁에서 패배했을시 러시아 제국이 잃을 게 너무 많았다.

“거래하죠. 비테 장관님. 양보할 건 양보하더라도 러시아가 어느정도 이득을 챙길 수 있는 방향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게 우리 독일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기에 비테는 내 손을 잡았다.

“어디까지 줄 수 있나?”

“러시아 제국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을지에 달린 문제겠지요.”

이렇게 된 이상, 얻을 것은 최대한 얻겠다는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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