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러시아 제국 (2)
“니키! 알릭스!”
“어서 와. 하인리히! 이레네!”
겨울궁전에 도착하자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환한 미소와 함께 우리를 맞이했다.
니콜라이 2세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빌헬름 2세처럼 억지로 위엄있는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에드워드 7세처럼 능글맞지도 않았다.
오히려 푸근한 인상의 이웃집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하인리히 이모부님. 이레네 이모님.”
“올가. 타티아나. 오랜만이구나!”
니콜라이 2세의 뒤에서 나보다 서너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종종 걸어와 활기찬 목소리로 하인리히 왕자와 이레네 왕자비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올가와 타티아나.
러시아 제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녀들의 정확한 이름은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О?льга Никола?евнаРома?нова).
그리고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OTMA라 불린 니콜라이 2세의 딸 중 장녀와 차녀이다.
물론 자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여러 음모론의 주인공인 넷째 아나스타샤겠지만 말이다.
다만 시기상 아나스타샤 황녀는 아직 첫돌도 안 지난 갓난아기였기 때문인지 이 자리엔 안 나왔다.
셋째 마리야 황녀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러시아의 겨울바람은 아기들에게 있어 해로웠다.
“그런데 하인리히, 저 황인종 아이는 누구인가?”
니콜라이 2세가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쩐지 신궁전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황실 가족들이 나를 쳐다봤다.
지금에 와선 추억에 불과한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니콜라이 2세 부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폐하. 전 한스 폰 초이 남작이라고 합니다. 전 러시아의 황제이신 니콜라이 2세 폐하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마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머, 예의 바른 소년이네요.”
“한스 폰 초이라···. 아! 그대가 빌리를 구한 그 동양인 소년이로군!”
알렉산드라 황후가 내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의적인 미소를 짓는 가운데, 니콜라이 2세가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하! 그 빌리가 황인종을 궁에 들였다기에 대체 어떤 아이인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오빠, 유명한 사람이에요?”
아버지의 열띤 반응에 호기심이 들었는지 올가 황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조금 이름이 알려졌을 뿐입니다. 황녀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입으로 나 유명인이라고 말하는 건 좀 그랬다.
“아직 어리긴 해도 똑똑하고 유능한 녀석이야. 특히 말 하나는 잘해서 이번 일에 도움이 될까 하고 데려왔지.”
“호오. 그래?”
하인리히 왕자의 입에 발린 칭찬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니콜라 이 2세.
다행히 차르는 나에 대해 호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으음···.”
하인리히 왕자와 니콜라이 2세가 근황을 물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이레네 왕자비가 신음을 흘리며 어지럽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언니?”
“미안, 알릭스.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조금 쉴 수 있을까?”
“물론이지.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아, 그게···.”
“겨울궁전으로 오는 길에 시위대와 마주쳤거든. 그런데 군대가 그들을 진압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뭐?”
하인리히 왕자가 아내를 대신해 대답하자 니콜라이 2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무장관에게 한마디 해야겠군. 미안해, 이레네. 안 좋은 것을 보게 만들어서. 요즘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폭동이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거든.”
“···폭동 말입니까?”
“그래. 세상에 불만을 가진 자는 얼마든지 존재하는 법이니 말이다.”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리 대답하는 니콜라이 2세를 향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차르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선 노동자들의 시위를 그저 불순분자들의 폭동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이는군.’
괜히 피의 일요일이 일어났겠는가?
니콜라이 2세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더이상 니콜라이 2세 같은 지도자를 원하지 않았다.
‘빌헬름 2세조차 일단은 입헌군주였는데 말이지.’
니콜라이 2세는 스스로 파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선조들이 일구어온 러시아 제국과 함께.
***
일주일 후.
겨울궁전에서 러시아 측과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었다.
왜 바로 논의를 시작하지 않고 일주일이나 걸렸냐면 니콜라이 2세가 여독을 풀고 논의를 진행하자며 하인리히 왕자와 날 데리고 여기저기로 놀러 다녔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도 안 해본 사냥이랑 무도회를 러시아에서 다 해봤네.’
전형적인 인도어파인 나에겐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다.
부패하고 문란한 소설 속 귀족을 그대로 현실로 구현한 듯한 러시아 귀족들과 떠드는 것도 무척이나 피곤했고 말이다.
‘물론 그 덕분에 베조브라조프 파벌 같은 우리 계획에 찬동해줄 만한 들어줄만한 귀족들과 접촉할 시간은 많았지만.’
특히 무슨 이상성욕이라도 있는지 몇몇 러시아 귀부인들이 나를 끈적한 눈으로 쳐다봤을 땐···솔직히 내가 이런 말 할 줄 정말 몰랐는데 차라리 발더제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하여튼 나는 어서 빨리 일을 진행하고 싶어 안달 난 상태였고, 그것은 실무를 맡은 세르게이 비테를 비롯한 러시아 관료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을 맡은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일세.”
“반갑습니다. 장관님. 하인리히 왕자님의 보좌역을 맡은 한스 폰 초이 남작이라고 합니다.”
“아, 자네가 그···.”
마침내 얼굴을 마주 보게 된 세르게이 비테가 이미 나에 대해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카이저를 구한 소년이다 뭐다 하겠지.
이젠 너무 들어서 익숙해질 정도다.
“남작이 쓰신 불멸의 리 제독은 잘 읽었네.”
“네?”
그쪽이야?!
“아, 그 감사합니다.”
“양국에 있어 건실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군.”
“동감입니다.”
나와 비테는 악수하며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엔 날 선 경계심이 숨어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일 사람이 모두 모이자 니콜라이 2세가 먼저 운을 띄었다.
“그래, 하인리히. 독일 제국이 우리 러시아 제국과 군사적 협력을 바라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으흠.”
“물론 그 ‘군사적 협력’이 자세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말이야. 이제 슬슬 알려 주겠어?”
하인리히 왕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쳐다봤다.
“한스.”
“예. 왕자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목을 가다듬었다.
니콜라이 2세와 비테를 비롯한 러시아 측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개중엔 왜 동양인 어린아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거나 불쾌해하는 시선도 있었다.
‘익숙한 일이지.’
나는 이를 신경 쓰지 않고 프랑스어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신궁전으로 들어온 후, 황족들의 교육을 맡은 가정교사에게 여러 가지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은 라틴어 같은 귀족들이 익혀야 할 교양과 지식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지금이 로마 시대도 아니고 라틴어를 배워서 대체 어디다 쓰라고?’
하지만 개중엔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도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 내가 제일 열심히 공부한 것이 바로 프랑스어였다.
프랑스어는 영어와 더불어 외교 세계의 공용어였고, 아직 귀족이 남아있는 이 시대엔 그 영향력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귀족들은 일상에서 자국어인 러시아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사용했기에 나는 큰 무리 없이 이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며칠 전 영일동맹이 런던에서 체결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 러시아 제국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으음···.”
영일동맹을 언급하자 러시아 외무장관 람스도르프 백작을 비롯한 관료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대뜸 시작하자마자 아픈 곳을 찔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빌어먹을 섬나라 놈들···!”
“우리 러시아 제국을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물론 러시아 군부 쪽의 반응은 좀 더 격렬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작, 독일 제국이 이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니콜라이 2세가 말했다.
확실히 표면적으로 봤을 때 영일동맹과 독일 제국은 전혀 관계가 없었다.
영일동맹의 당사자는 어디까지나 영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
넓게 봐도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와 태평양에 이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론 그게 아니란 말이지.’
“우리 독일 제국 정부와 군부는 이번 영일동맹으로 인해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을 매우 크게 보고 있습니다.”
“뭐, 뭐라? 전, 전, 전쟁?!”
이 자리에 나올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에 니콜라이 2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심하게 동요했다.
다른 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우리 러시아를 공격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극동의 원숭이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독일의 전쟁 기계들이 단언했다잖소.”
“남작,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좌중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비테가 아까보다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일본은 이미 군비를 대규모로 확충하기 시작했습니다. 무기 수입도 배로 늘렸죠. 게다가 이젠 영일동맹까지 체결되었으니 이에 영국의 지원까지 더해질 것입니다.”
주일 독일 공사관을 통해 비밀리에 전해진 정보였다.
이미 일본은 대놓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떠오르는 것이 있는 듯, 비테의 측근인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확실히 최근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일본 간첩들의 활동이 전보다 훨씬 활발해졌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하···! 일본인들이 완전히 겁을 상실했군!”
니콜라이 2세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그야 극동의 작은 소국이 자신의 제국을 공격하려 든다는데 화를 안 내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흑우다.
게다가 니콜라이 2세는 일본에서 암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으니 그 분노가 더 더욱 클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일본 같은 극동의 소국쯤은 단순에 짓밟아버릴 수 있습니다!”
“우린 러시아 제국입니다. 섬나라 원숭이들에게 러시아의 전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겠습니다!”
몇몇 러시아 장군들이 차르에게 잘 보이기라도 하려는지 앞다투어 일본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다.
다른 사람들도 딱히 반박은 안 하는 것으로 봐선 역시나 러시아는 일본에 패배하리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죄송하지만 저희 독일 측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낙관적인 착각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나는 그 착각을 깨부숴주어야 했다.
“이대로 가면 러시아는 일본에 패배할 것입니다.”
순간 방안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러시아인들의 얼굴은 포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아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지금 뭐라 말했는가?”
짧고도 긴 몇 초가 지나고 니콜라이 2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 우리 러시아 제국이 일본에 패배할 것이라고?”
그리고 러시아 불곰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웃기지 마라! 지금 우리 러시아를 무시하는 것이냐!”
“우리가, 우리 러시아 제국이 일본에 져? 어디서 그딴 개도 안 들을 망발을 지껄여!”
“폐하! 이건 우리 러시아에 대한 모욕입니다! 독일에 항의를···!”
쾅!
“모두 조용히 하시오!”
세르게이 비테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얼굴은 보드카에 취한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다른 러시아인들과 달리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고 또 냉정해 보였다.
“남작, 그에 대한 근거는 있겠지?”
“극동.”
“!”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주전장이 ‘극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유럽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사이에 두고 있는 극동 러시아의 지리적 특징.
아직 시베리아 철도도 완성하지 못한 러시아 제국으로선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
내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비테.
“Ебать(망할)···.”
그리고 이내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깨달은 것이다.
러일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흘러갈지.
비테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독일의 제안은 무엇인가.”
작가의말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유료화가 확정되었습니다.
자세한 일정과 내용은 공지를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