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39화 (39/193)

39화 : 러시아 제국 (1)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폐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 부부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그런가.”

창가에 서 있던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시종의 말에 집무실 한편에 놓여있는 괘종시계를 바라봤다.

시곗바늘은 아직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오후에나 도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군. 직접 마중을 나갈 것을 그랬어.”

“지금이라도 준비할까요?”

“아니, 인제 와서 아랫사람들에게 괜한 고생시키는 것도 좀 그러니 그냥 기다리세나.”

니콜라이 2세의 인자한 목소리에 시종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니콜라이 2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겨울궁전의 정원에서는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인 올가와 타티아나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는 딸들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또 다른 딸들인 마리아와 아나스타샤를 떠올렸다.

그 아이들은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작고 연약한 아기에 불과하지만, 마리 아와 아나스타샤도 언젠가 훌쩍 자라서 언니들과 함께 정원에서 뛰어놀 날이 올 것이다.

니콜라이 2세는 그날이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론 아이들의 빠른 성장에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부모는 항상 아이가 아이인 채로 남길 바라는 법이니까.

“폐하,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재무장관과 블라디미르 람스도 르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Ла?мсдорф) 외무장관, 그리고 알렉세이 쿠로파트킨(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уропаткин) 전쟁장관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시종의 말에 딸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던 니콜라이 2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는 알고 있다.

마음 같아선 돌려보내고 싶은 심정이지만, 짐작되는 이유가 이유인 만큼 그럴 수도 없었다.

니콜라이 2세는 귀찮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그들의 접견을 허락했다.

“폐하.”

“비테.”

곧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제정 러시아 관료들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를 필두로 람스도르프 외무장관과 쿠로파트킨 전쟁장관이 차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에 니콜라이 2세도 일단은 세 장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나 이어진 비테의 말은 니콜라이 2세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 부부께서 방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참 빨리도 들었구려. 나도 이제 막 들은 소식인데 말이오.”

“하인리히 왕자께서 러시아 제국에 온 목적이 목적이니 말입니다. 폐하께서도 이에 대해선 인지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니콜라이 2세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르와 러시아 정부는 하인리히 왕자 부부와 한스가 독일 제국을 떠나기 전, 주독 러시아 대사관의 비밀 전보를 통해 독일 정부의 목적에 대해 대강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독일 제국과 ‘군사적 협력’ 말이군.”

다만 어떤 군사적 협력인지는 니콜라이 2세는 물론 비테도 자세하게는 몰랐다.

독일인들이 무슨 꿍꿍이었는지 그 이상의 정보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안을 위해 자세한 것은 하인리히 왕자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라고 하던가?

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저 콧대가 높고 오만한 독일인들이 이 정도로 은밀하게 또 조심스럽게 구는 것일까?

니콜라이 2세는 별생각 없이 그저 호기심과 궁금증이 들 뿐이었지만, 눈앞의 삼장관은 니콜라이 2세와 달리 심각한 얼굴이었다.

“폐하, 아시다시피 독일 제국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맞습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요.”

“군부에서도 여러 우려가 들리고 있습니다.”

비테와 람스도르프, 쿠로파트킨이 연달아 말했다.

그들은 독일의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경계했다.

“또 빌리의 변덕이겠지. 그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그러나 정작 니콜라이 2세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반응이었다.

친애하는 친척인 빌헬름 2세의 변덕스러움에 대해선 차르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폐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시기가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시기?”

비테가 차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영국이 일본과의 동맹을 확정 짓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공교롭게도 얼마 전에 말입니다.”

“아, 영일동맹 말이군.”

니콜라이 2세는 황태자 시절 일본에서 입은 오랜 상처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영일동맹이 누굴 견제하기 위한 것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러시아, 자신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번 하인리히의 방문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솔직히 이게 이렇게 호들갑을 떨 문제인가도 싶었다.

니콜라이 2세는 극동의 작은 섬나라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러시아의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영국의 행태가 불쾌하긴 했지만,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영일동맹도 말만 거창하지 언제나처럼 그저 영국이 영국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장관들의 생각은 차르와 다른 모양이었다.

“폐하, 독일 제국이 영일동맹이 대두되는 이때, 우리 러시아 제국에 이런 요청을 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이 아니다?”

“예.”

비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영일동맹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러시아 제국이지 독일 제국은 이 일과 전혀 상관이 없지 않은가.”

물론 카이저가 이에 대해 화를 내긴 했을 거다.

빌리의 유별난 황인종 혐오, 특히 그중에서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혐오는 유럽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폐하, 외교에는 절대라는 것은 없는 법입니다.”

“흐음···. 하지만 나는 아직 판단이 서질 않는군.”

니콜라이 2세가 말했다.

“어쨌든 하인리히의 이야기를 들어는 봐야 하는 게 우선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런 지루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 나누면 될 일이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이 쯤하고 이만 나가보게.”

니콜라이 2세는 비테를 비롯한 장관들을 향해 축객령을 내리고 등을 돌렸다.

벌써 머리 아픈 일은 사절이었다.

***

“후우, 땅이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끔찍했던 선상 생활에서 벗어난 나는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었던 육지에 발을 딛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계속 심호흡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영광을 간직한 제정 러시아의 심장.

그리고 훗날 세상의 절반을 붉게 물들일 혁명의 요람이 될 도시였다.

“러시아는 언제와도 추운 곳이구나. 또 언제와도 항상 눈투성이고.”

“왕자비님.”

하인리히 왕자의 부인이자 이번 러시아행에 동행한 이레네 왕자비가 내 옆으로 오며 말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유쾌하고 착한 사람이다.

하인리히 왕자와 금실이 좋은 게 이해가 된다.

그렇게 잠시 이레네 왕자비와 이 유서 깊은 도시의 전경을 구경하는 와중,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하인리히 왕자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니키가 우릴 위해 사람을 보낸 모양이군.”

왕자의 말대로 남자들은 하인리히 왕자와 이레네 왕자비를 보자마자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왕자님, 왕자비님. 니콜라이 2세 폐하의 명에 따라 왕자님과 왕자비님을 겨울궁전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마차가 준비되어있으니 이쪽으로 오시죠.”

“음.”

“그런데 저 황인종 아이도 왕자님의 일행이십니까···?”

남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꽤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반응.

아무래도 러시아에까지 내 이름이 잘 알려지진 않은 것 같다.

내가 뭐라 말하려고 하는 찰나, 하인리히 왕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이 친구는 한스 폰 초이 남작이라네. 황실에서 거둔 아이지. 그냥 이번에 러시아 구경이나 시켜줄까 해서 시종 삼아 데려왔다네.”

“아, 그렇군요.”

남자가 하인리히 왕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긴가민가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린 마차에 올라 니콜라이 2세가 기다리고 있는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항구에서 겨울궁전으로 향하는 길은 상당히 길고 지루했다.

“한스, 저기 저 건물이 보이느냐?”

그 따분함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인지 하인리히 왕자가 창밖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바로 마린스키 극장이다.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마린스키발레단이 소속된 곳이지.”

“그렇군요.”

“그리고 저쪽으로 쭉 가면 카잔 성당과 피의 성당이다. 알렉산드르 아저씨께서 돌아가신 장소지. 참 안타까운 일이야.”

알렉산드르 2세 말이군.

빌헬름 1세의 여동생인 프리데리케 공주의 자식이라 하인리히 왕자와 빌헬름 2세에겐 당숙되는 인물이다.

‘유럽 왕실은 파고들면 다 피가 이어져 있어서 가족관계 외우기가 너무 어렵다니까.’

또 사촌끼리의 결혼도 잦은 것도 문제였다.

당장 눈앞의 하인리히 왕자와 이레네 왕자비도 사촌지간이었다.

하인리히 왕자의 모친은 알다시피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였고, 이레네 왕자비의 모친은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자 셋째인 앨리스 공주였으니까.

괜히 빅토리아 여왕이 유럽의 할머니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끼익―!

“음?”

하인리히 왕자와 이레네 왕자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이, 마차가 멈춰 섰다.

겨울궁전에 도착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 왕자님. 지금 길이 막혀서···.”

“길이 막혀?”

마부의 어딘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에 우리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면 그만이지, 굳이 멈추어 설 것까지 있나?’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러나 내 의문은 곧 귀에 들려온 익숙한 음의 노랫소리에 의해 해소되었다.

“Вставай, подымайся, рабочий народ! Вставай на врагов, брат голодный!

(일어나라, 일어나라, 노동자들이여! 악한 자들에 맞서 일어나라, 굶주린 형제여!)”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말이다.

“이 노래는···.”

“라 마르세예즈네요.”

러시아어는 모르지만 음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국가로 유명한 노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시기 러시아 제국에서 ‘라 마르세예즈’는 다른 의미로 불리던 곡이었다.

아니, 본래 목적으로 불리고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이군요.”

노동자 마르세예즈.

인터내셔널가 이전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널리 불렸던 민중가요.

차르와 귀족들의 압제에 지친 러시아 인민들의 분노가 담긴 노래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마차 밖을 내다봤다.

군인들이 도로를 가로막은 가운데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잔뜩 모여 성난 목소리로 노동자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노동자들이 시위나 파업을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 이런.”

하인리히 왕자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아까 항구에서 본 러시아 관리가 우리 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리고 왕자비님. 지금 앞쪽에 소란이···.”

“알고 있네. 시위가 일어났다지?”

하인리히 왕자의 말에 관리가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타국의 왕족 앞에서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으니까.

“서둘러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나?”

하인리히 왕자가 말했다.

내 생각에도 이곳에 계속 있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러시아 관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소란은 곧 정리될 것입니다.”

“음? 그게 무슨···.”

삐이이이익───!

관리의 영문 모를 말에 의문을 표한 하인리히 왕자.

그러나 왕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고 우리는 곧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Атака(돌격)!”

러시아어 외침과 함께 지축을 울리는 무수한 말발굽 소리.

카자크.

차르의 충실한 검이자 러시아 노동자들의 공포, 카자크 기병대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섰다는 것은 곧 러시아 제국은 정부는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기로 했단 뜻이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모조리 짓밟아!”

“꺄아아악!!”

곧 마차 밖에서 고함과 비명이 사방에 난무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왕자는 창백하게 질린 이레네 왕자비의 손을 잡아주며 분노한 표정으로 관리를 쏘아봤다.

‘꼭 여기서 이래야겠냐?’

왕자의 얼굴은 꼭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이번 러시아 방문의 중요성이 중요성이니만큼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지만 말이다.

관리도 이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렇게 몇 분.

비명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시위대가 도망칠 때 떨어트린 것으로 추정되는 온갖 쓰레기들과 카자크들에게 제압되어 끌려가는 시위대, 그리고 길바닥에 낭자한 혈흔이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잘 말해주고 있었다.

“후···. 갑자기 독일이 그리워지는군.”

하인리히 왕자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이번 일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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