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영일동맹 (3)
“그래서 대체 러시아에 무엇을 주겠다는 것이지? 설마 네 녀석이 만든 그 ‘기관단총’이라도 줄 생각이냐?”
발더제 원수가 나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렇지. 이 인간이 왜 이렇게 조용하나 싶었다.
‘그런데 기관단총을 러시아 제국에 줘봤자 제대로 쓸 순 있으려나?’
물론 뤼순 공방전 같은 전투에 기관단총이 등장한다면 일본군의 시체는 원 역사보다 훨씬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관단총은 총알 소모가 엄청난 무기.
나야 이 독일 제국에 공기로 화약도 만들고 빵도 만드는 갓 하버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과감하게 기관단총에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러시아 제국은 자기들 쓸 총알도 부족해서 제1차 세계대전 때도 심각한 탄약 부족에 시달리던 국가였다.
아무리 우리가 탄약을 지원해준다고 해도 러시아 제국이 기관단총의 막대한 탄약 소모율을 감당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실전 테스트 삼아 프로토타입을 몇백 정도 지원해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지도.’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슐리펜, 그리고 슈마이서 씨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다.
“기관단총에 대해선 일단 보류하죠. 고려해야 할 점이 많으니까요.”
그리 말한 나는 계속해서 내 생각을 말했다.
“일단 극동 러시아군에 가장 시급한 것은 탄약입니다. 여기에 소총이나 권총, 그리고 기관총 등을 추가로 지원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기관총이라면 MG99나 MG01 말인가?”
슐리펜 참모총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영국제 맥심 기관총의 독일식 버전으로 훗날, 이를 경량화하고 개량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되었던 MG08이다.
러일전쟁 중 러시아군은 뤼순 공방전에서 약 60정 정도의 맥심 기관총만으로도 일본군에게 지옥을 보여주었던 만큼, 품질 좋은 독일제 기관총과 충분한 양의 총알이 더해진다면 원 역사보다 더 큰 피해를 일본에 강요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방어자의 위치에서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게다가 제가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 생각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과 기관총이 합쳐진다면 러시아군의 방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입니다.”
“호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윤형 철조망이라는 것입니다.”
참호, 기관총, 윤형 철조망.
제1차 세계대전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삼신기.
일본군이 이걸 뚫으려면 시체로 산을 쌓아도 부족할 것이다.
‘여기에 기관단총과 산탄총, 레버액션 소총 등이 더해진다면 더 큰 피해를 강요할 수 있을 테고 말이야.’
“철조망이라고?”
슐리펜 참모총장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가축들을 가둘 때나 쓰는 그것 말인가?”
“예. 그 철조망 맞습니다. 참모총장님.”
“으음. 포르투갈군이 식민지에서 철조망을 방어물로 이용했다는 것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지. 그런데 ‘윤형’ 철조망은 또 뭔가?”
슐리펜의 물음에 나는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그 위에 길게 직선을 그었다.
“기존의 철조망은 보시다시피 이런 직선의 형태입니다.”
“그렇지.”
“물론 이 자체로도 보병에겐 있어 까다로운 장애물입니다. 하지만 이 철조망을 이런 식으로 둥글게 만들면···.”
나는 이번엔 직선 아래에다 스프링 모양의 원형 여러 개를 그렸다.
“철조망의 내구성이 높아지고 보병 저지력이 훨씬 높아지게 됩니다. 맨몸으론 절대 통과할 수 없는 마의 벽이 생겨나는 것이죠.”
“하! 고작 모양 하나 바꾼다고 마의 벽이라니.”
“그러시면 한번 실험해보시죠. 지난번 발더제 원수님께서 제안하셨던 기관단총 시연회처럼 말입니다.”
“뭣?! 이, 이놈이···!”
발더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당장이라도 내 멱살을 잡을 것처럼 굴었다.
물론 보는 눈이 많다며 만류하는 슐리펜에게 바로 제지당했지만 말이다.
“언제까지 기고만장할 수 있을지 보자···!”
발더제가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중얼거렸다.
거 살날도 많이 안 남은 노인네가 참 기운도 좋다.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 윤형 철조망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우리 목적은 러시아의 승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말에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는 발더제만 빼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 제국이 너무 크게 이기는 것은 나에게도, 그리고 독일 제국에게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았으니까.
러시아는 어디까지나 전쟁에 지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야 우리가 전쟁 도중에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나온다.
“그럼 지원 품목은 대충 정해진 것 같으니 세세한 것은 군부에 맡기도록 하고, 이제 남은 것은 카이저 폐하께 허락을 맡은 뒤 러시아 측과 교섭하는 것 뿐이군요.”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빌헬름 2세야 딱히 걱정할 것 없었다.
지금 카이저는 러시아가 아니라 프랑스를 지원하겠다고 해도 들어줄 가능성이 1%는 있을 정도로 영국과 일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문제는 러시아 제국.
융커들이 러시아를 싫어하는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독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쪽에서 지원해준다고 나선들, 저쪽에서 거부하면 답이 없다.
게다가 러시아라면 독일 제국 다음으로 외교 못하기로 유명한 나라 아닌가.
“일단 차르, 니콜라이 2세만큼은 반드시 설득해야 합니다.”
니콜라이 2세.
사람은 선하지만, 지도자로서 능력은 최악인 러시아 제국 최후의 황제.
“차르가 이번 일에 반대하면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니까요.”
“그 부분은 내게 생각이 있네.”
뷜로가 말했다.
“차르의 총신인 베조브라조프와 알렉세예프는 대일 강경파인데다가 탐욕스러운 작자들이지. 이쪽에서 적당히 성의를 보이면 우리 편을 들어줄 것일세. 극동에 이권을 가지고 있는 그치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니.”
“하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관료집단, 특히 재무장관인 비테가 마음에 걸리는군요. 그는 일반적인 루스 귀족들처럼 만만한 자가 아니니까요.”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르게이 비테.
스톨리핀과 함께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지 않게 붙잡았던 러시아 제국의 명신.
확실히 그는 유능하고 쉽게 볼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일본의 위협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러시아 제국 관료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비테는 실제 역사에서도 러일전쟁이 발발할 시, 러시아가 패배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비테에 대해선 그를 직접 만나서 설득하고 교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흠···.”
“총리님. 저를 러시아에 보내주십시오.”
“남작 자네가?”
내가 손을 들며 러시아에 가겠다고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특히 발더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부라렸다.
“제가 꺼낸 이야기이니까요. 제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무엇보다 독일 제국의 외교를 믿을 수가 없다.
이건 내 계획의 중요한 일부다.
눈뜨고 망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나서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
“웃기지 마라! 너 같은 꼬맹이를 보냈다간 러시아인들이 우리 독일 제국을 비웃을 거다!”
“흠. 남작을 러시아로 보내는 건 의외로 그리 나쁜 생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포사도프스키!!”
포사도프스키-베너 부총리가 내 편을 들자 발더제가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투옥법안 이후 보수에서 진보로 성향이 바뀐 탓에 발더제와 사이가 매우 나빠진 부총리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번 일은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영국은 우리의 계획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남작이 러시아에 간다면 그 누가 의심을 하겠습니까?”
“일리가 있군요.”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영국이 독일의 계획을 알게 되면 어디선가 나타난 괴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우리 앞길을 사사건건 방해하려 들 것이다.
영국인들은 그러고도 남을 족속들이니까.
“하! 정말 이 꼬맹이를 러시아에 보낼 생각인가? 애가 대체 외교에 대해 뭘 알겠나!”
“흐으음. 하지만 순친왕 때의 일을 생각해보면 괜찮을지도···.”
“총리! 당신까지 이러기요?!”
“물론 원수의 말대로 남작을 혼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하인리히 왕자님께 동행을 부탁을 드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제안에 모두가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하인리히 왕자님의 부인께선 러시아 황실의 인척이시니까요. 가족을 보러 간다는 명분으로 러시아에 방문하면 되겠군요.”
헤센의 이레네 대공녀.
그녀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이자 러시아의 황후인 알릭스, 그러니까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친언니였다.
여동생처럼 혈우병을 물려받은 것도 똑같아서 아들이 단명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인리히 왕자께서는 극동에서 외교관으로서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시기도 했죠. 그분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습니다.”
“젠장, 다 제정신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니야.”
분위기가 나를 하인리히 왕자와 함께 러시아에 파견하는 것으로 흘러가자 발더제가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의 발더제는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위세를 자랑했던 예전과 달리 실질적인 권력 하나 없는 반쯤 은퇴한 노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힘도 없고 인망도 없는 자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결국 발더제는 시연회 때 그런 것처럼 또다시 분을 못참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다들 헛기침만 흘릴 뿐,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참모총장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작이라면 괜찮겠지요. 개인적으로 외교관의 길 보단 군인의 길을 걸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만···.”
“으음. 참모총장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좋습니다. 결정이 났군요.”
슐리펜이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무시무시한 말을 중얼거리며 나를 러시아에 보내는 것에 동의하자 눈치를 보던 고슬러 전쟁장관 또한 찬성 쪽에 손을 들었다.
“그럼 러시아 여행 즐겁게 다녀오게. 남작.”
그리고 그렇게 전생과 현생 통틀어 내 첫 번째 해외여행이 결정되었다.
***
그로부터 얼마 후.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독일 측에서 아국에 군사 협력을 제안했다고?”
“예. 각하. 방금 주독 대사로부터 도착한 소식입니다.”
러시아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는 비서의 말에 이마를 찌푸렸다.
독일 제국에서 러시아에?
그 오만한 프로이센 융커들이?
비테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을뿐더러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저 프로이센 전쟁광들이 우리 러시아에 그런 제안을 한 거지?”
그렇기에 비테는 스스로 자문했다.
독일은 무슨 의도로 러시아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일까?
선의?
아니면 인제 와서 러시아 제국과 관계 증진이라도 할 생각일까?
‘어느 쪽이든 개소리군.’
현 독일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2세가 러시아와 독일 간의 비밀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이후, 러시아와 독일은 줄곧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그 카이저가 인제 와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러시아에 협력 제안을 한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분명 무슨 의도가 있어.”
비테는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뜩 최근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영일동맹.”
그래. 그게 있었다.
모국 러시아를 겨냥한 섬나라 해적과 섬나라 원숭이들의 야합.
러시아 제국을 위해 평생을 일해온 비테로선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 섬나라 원숭이들의 전 수장이 러시아 제국에 동맹을 갈구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치 않나.
앞으론 굽실굽실 허리를 굽힌 주제에 뒤로 이런 호박씨를 까다니, 최근 비테가 즐겨 읽기 시작한 소설의 주인공인 카레야(Коре?я)의 리 제독이 말했듯이 일본인들은 신의가 없어도 너무 없는 놈들이었다.
“아무래도 카이저가 영일동맹 때문에 눈이 돌아간 모양이군.”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비테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황화론자, 특히 일본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그 카이저가 이리 적극적인 행동을 보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독일의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일 순 없다.”
대체 독일이 러시아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건 독일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순 없었고 그럴 의리도 없었다.
‘거기다 우리 러시아 제국으로선 프랑스와의 관계도 생각해야 하니.’
독일 제국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인들이 독일과 러시아가 가까워지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이로 인해 러시아의 유일한 동맹국인 프랑스와의 외교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러시아 제국과 비테에겐 정말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비테는 독일의 제안에 대해 신중하게 나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차르 폐하군.”
선하신 대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
그 인성만큼이나 능력도 따라주었다면 소원이 없으련만, 불행하게도 니콜라이 2세는 루이 16세 마냥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암군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전적도 있고 말이지.’
오래전 니콜라이 2세는 오래전 빌헬름 2세의 부추김에 생각 없이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프랑스와의 동맹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저 프랑스가 공화국이라서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그 미친 짓을 전력으로 막아섰던 것이 비테 자신이었던 만큼, 비테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또 한 번 반복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람스도르프 백작과 쿠로파트킨 장관을 불러주게.”
“외무장관과 전쟁장관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무래도 이번 일에 대해 다 같이 논의를 좀 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