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36화 (36/193)

36화 : 영일동맹 (2)

독일 제국 육군 참모본부.

“그런 이유로 총리가 우리 군에게 러시아에 대한 지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향을 물어왔네.”

육군참모총장 슐리펜 백작의 말에 참모본부가 웅성거렸다.

당연하게도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프로이센 융커들은 러시아를 싫어했다.

‘한스 군이 새해부터 골치 아픈 난제를 던져줬군.’

그렇기에 이번 일은 슐리펜으로서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기관단총처럼 군에 이익이 되는 것은 두 팔을 벌리고 환영했겠지만, 러시아에 대한 지원은 이야기가 또 달랐으니까.

“우선 지원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정말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할 가능성이 정말 있는지가 중요하겠군. 다들 기탄없이 의견을 들려주게.”

슐리펜의 말에 참모들 사이에서 여러 말들이 오갔고, 이내 하나둘씩 손을 들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러시아가 일본에 지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본군이 잘 훈련된 군대라 해도 근본은 동아시아의 지역 강국.

내각에선 너무 일본을 고평가하는 건 아닌가 싶군요.”

“물론 주전장이 될 극동의 지리적 특수성 상, 일본군이 초반에 유리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양국의 체급이···.”

역시나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군.

슐리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참모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러시아 제국이다.

썩어도 열강이라 불리는 대제국이란 말이다.

일본이 아무리 영일동맹으로 영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지만, 일본이 정말 그 러시아를 패배시킬 수 있을까?

슐리펜으로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 어이가 없군. 독일 제국의 참모라는 녀석들이 머리에 똥만 찬 머저리들일 줄이야!”

그때 구석에서 익숙하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슐리펜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할 리 없다? 편견과 상식에 찌들어있는 놈들 같으니.”

“발더제 원수님, 참모들을 향해 모욕적인 발언은 삼가십시오.”

발더제.

그랬다. 또 발더제였다.

“한심해도 너무 한심해서 그렇지. 잘 듣게. 슐리펜. 러시아 제국은 일본을 이기지 못하네.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야.”

그러나 뒤이은 발더제의 말은 슐리펜으로서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원수님.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는지 고견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래. 이 머저리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 내 설명해주지.”

슐리펜 백작의 말에 발더제가 그리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발더제 원수가 능력 있는 군인이자 뛰어난 전략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였다.

“어린아이한테 망신이나 당한 주제에···.”

발더제에게 무시당한 참모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발더제는 3군 총감으로 복귀했지만, 시연회 건이 독이 되어 사실상 뒷방 노인네로 전락했다.

그래도 선대 참모총장이라고 발더제를 배려한 슐리펜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러시아는 전쟁이 벌어지면 필연적으로 본토에서 극동으로 물자와 병력을 보낼 것이야. 그야 당연하지. 극동 러시아의 허약한 전력 만으론 일본군과 회전 한번 벌이는 것조차 무리이니까.”

하지만 발더제는 나이 때문인지 참모들의 뒷담화를 듣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난 척을 하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거리와 러시아의 열악한 철도 사정을 생각하면 아무리 본토에서 지원을 보낸다고 해도 극동에 도착하기까지 최소 몇 개월! 사실상 물자와 탄약, 병력 그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을 벌여야 한단 소리지.”

“하지만 러시아도 그 점을 알기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는 중이지 않습니까.”

“이 바보 같은 놈이! 네 녀석이 일본이라면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완공하는 것을 그냥 눈뜨고 지켜볼 것 같나? 당연히 그 전에 전쟁을 벌이겠지!”

“예? 그럼 일본이 러시아를 선제공격할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쿵!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참모 하나가 얼빠진 얼굴로 묻자 열받은 발더제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녀석들이 무엇을 위해 영국과 동맹까지 맺으려 했을 것 같나? 일본 놈들은 지금 러시아를 밀어내고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안달 나 있는 놈들이야. 내 장담하건대 일본은 반드시 2~3년 내로 전쟁을 벌일 거다!”

“하, 하지만 고작 동아시아의 소국이 무슨 배짱으로···.”

“여기서 일본군을 직접 본 자가 있나?”

“예?”

참모들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낯빛이 떠올랐다.

그야 있을 리가 없다.

동아시아에 파견이라도 갔다 오지 않는 이상 말이다.

“난 중국에서 일본군을 직접 보았지. 원숭이들치고 질서정연하고 훈련이 잘된 군대더군. 그에 비해 러시아 극동군은 시베리아 사냥꾼들을 긁어모아 만들어진 오합지졸들 뿐이야.”

“하지만 유럽 러시아군은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슐리펜에 말에 발더제 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들에 비하면 부족하겠지. 하지만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고질병인 내부 문제와 보급 문제 때문에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없어!”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서라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려 할 것이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 육지에 한해서는 일본이 우세할 것이야. 해전에 대해선 나도 전문가가 아니니 장담할 순 없겠지만 마찬가지겠지.

물론 루스키 놈들을 지원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지만!”

발더제가 그리 덧붙이자 슐리펜은 고민에 빠졌다.

슐리펜도 러시아를 싫어했지만, 뷜로 총리의 말대로 이미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와의 양면 전선이라는 딜레마에 빠진 독일 제국에 영국이란 또 하나의 적을 추가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하책이었다.

“그나저나 내각의 어떤 미친놈이 러시아를 지원하자는 소리를 내놨는지 궁금하군.”

“···원수님?”

“뷜로나 리히트호펜은 아닐 테고. 슐리펜 이 이야기를 꺼낸 게 대체 누군가?”

“어···.”

슐리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야 슐리펜은 그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스, 언제나의 한스 폰 초이 남작이었다.

문제는 발더제 원수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또다시 미쳐서 날뛰게 뻔했다는 것이다.

당장 얼마 전에 시연회 때 한스를 물 먹일 계획을 세웠다가 역으로 물을 먹었던 발더제다.

이미 군에는 그때 일로 폭발한 발더제가 흘러넘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저택의 집기와 가구를 모조리 때려 부순 것도 모자라, 시연회를 빌미로 한스를 공격하자고 의견을 꺼낸 루덴도르프를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슈프레 강에 담가버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루덴도르프는 그를 예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슐리펜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말이다.

발더제의 히스테리로 능력 있는 인재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슐리펜은 이 자리에서 한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이번엔 자신이 원수의 분노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

‘무서운 건 아니지만, 귀찮은 것도 질색이야.’

“그럼 총리와 논의하러 갈 때 함께 가시죠.”

“음. 그럼 그러도록 하지.”

그렇기에 슐리펜이 선택한 것은 한스에게 짬을 때리는 것이었다.

한스라면 이번에도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

“씨발.”

슐리펜이 러시아에 대한 지원 수위를 논의하자고 해서 와보니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

알프레트 폰 발더제 원수.

아마도 이 독일 제국에서 나를 가장 증오하는 인간이다.

“···슐리펜. 어째서 저 빌어먹을 원숭이 놈이 여기 있는 건가.”

발더제가 날 보자마자 얼굴을 흉신악귀처럼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내 얼굴도 그와 다를 바 없었지만 말이다.

‘슐리펜이 왜 저 인간을 데려온 거지?’

슐리펜 참모총장은 분명 나와 발더제의 사이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에 발더제를 데려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까?

“그야 원수님께서 만나고 싶다던 러시아를 지원하자고 말한 장본인이 바로 남작이니까요.”

“뭐?”

슐리펜의 말에 ‘저 애새끼 놈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발더제.

이제야 어찌 된 일인지 알겠다.

‘이 인간 나에게 짬 때렸구나!’

분명 자기가 발더제를 감당하기 싫으니까 나에게 떠넘긴 게 분명하다.

저저 눈 피하는 것 좀 봐라.

“······.”

나와 발더제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분위기가 어색해서?

아니었다. 이건 신경전이었다.

“네 녀ㅅ···.”

“다들 모이셨군요.”

발더제 원수가 나를 향해 뭐라 말하려고 하던 찰나,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뷜로 총리,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의 노인 2명과 함께 나타났다.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 주셨군.’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말했다.

아마 조금만 더 늦게 들어왔으면 나와 발더제 사이에 분명 무슨 사단이 일어났을 거다.

“아, 발더제 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자리에 오실 줄은 전혀 몰랐군요.”

“오랜만이요. 리히트호펜 장관. 아마 오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발더제가 나를 힐끔 노려보며 말했다.

발더제가 왜 이러는지 이해한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은 그저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을 뿐이지만 말이다.

뷜로 총리가 슐리펜에게 가서 왜 발더제 원수가 여기 있는지 작은 목소리로 따지고 있는 사이, 턱수염이 인상적인 노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그 유명한 한스 폰 초이 남작을 만나게 되었군! 반갑네. 부총리 겸 내무장관을 맡은 아르투어 폰 포사도프스키-베너(Arthur von Posadowsky-Wehner)라고 하네. 잘 부탁하네.”

“아,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사람이 전에 슐리펜이 말했던 그 사람이구나.

나중에 따로 알아보니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진보적이고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관심이 많아 독일 사민당(SPD)조차 존중을 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프로이센 비밀경찰을 총괄하는 내무장관이 빨간 맛 친구들과 친해도 되나 싶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독일 제국의 정치인 중에선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그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프로이센 전쟁장관, 하인리히 폰 고슬러(Heinrich Wilhelm Martin von Goßler)네.”

“한스 폰 초이 남작입니다. 고슬러 장관님.”

부총리와 악수를 한 뒤, 딱 보기에도 엄격해 보이는 얼굴의 노인이 겉모습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했다.

참고로 왜 독일 제국 전쟁장관이 아니라 프로이센 전쟁장관이라면 독일 제국엔 국방부나 전쟁성에 해당하는 정부 부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독일 제국을 구성하는 가장 큰 제후국들인 프로이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에 각각 전쟁성이 존재했고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 바로 프로이센 전쟁성이었다.

아무래도 독일 제국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프로이센이었으니 말이다.

짝!

“그럼 인사도 마친 모양이니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손뼉 치며 말하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앉았다.

우선 처음으로 입을 뗀 것은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뷜로 총리였다.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는 알다시피 이번 영일동맹으로 인해 머지않아 발발하게 된 러?일간의 전쟁에 대비해 여기 한스 폰 초이 남작이 제안한 러시아를 지원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참고로 군은 여기 있는 발더제 원수님의 의견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 발생할 경우, 러시아 제국이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슐리펜이 발더제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발더제 원수는 원 역사에서도 러일전쟁의 결과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예측했다고 했던가.

역시 대(大) 몰트케, 그리고 슐리펜과 함께 독일 제국군을 대표하는 전략가다웠다.

‘그놈의 인성만 어떻게 하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러시아를 지원하자니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고슬러 장관님의 우려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러시아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일시적으로, 그리고 한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하지 않는 것이니까요.“”흠. 그럼 직접적인 무력 개입보다는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겠군요.“

포사도프스키-베너 부총리의 말에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총리는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군요. 무엇보다 러시아군의 제식 탄약과 우리 군의 제식 탄약은 호환이 되지 않으니까요.”

“흐음.”

부총리의 말에 러시아에 대한 지원에 대해 회의적인 얼굴이었던 고슬러 전쟁장관이 일리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총이란 것은 총알이 없으면 그냥 몽둥이에 불과했다.

자신들이 쓸 탄약도 부족한 러시아군이다.

훗날 러시아군이 독일이 지원해준 무기들을 사용하려 해도 총알이 없는 이상,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러시아가 전력을 온존한 채 일본과 적당히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는 것. 그래야만 영국의 시선을 계속 러시아 제국에 붙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이 과연 우리 독일 제국이 러일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지가 의문이군.”

내 말에 뷜로 총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영국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그래서 나는 동아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태평양에 이권을 가진 국가를 이 일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미국의 중재라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호오, 확실히 미국이라면 우리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겠죠. 그들의 태평양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늘리려는 현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라면 우리의 중재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원 역사에서도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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