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35화 (35/193)

35화 : 영일동맹 (1)

어느덧 새로운 해가 밝아와 1902년이 되었다.

그러나 신년 분위기가 다 가시기도 전에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은 유럽 전역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영국 외무장관 랜즈다운 후작, 영일동맹 발표! 서방과 동방의 섬나라가 손을 잡다!]

제1차 영일동맹.

영국이 원 역사대로 러시아의 극동 확장을 제지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빅토리아 황태후의 장례식에서 에드워드 7세가 티가 날 정도로 모르쇠로 일관했을 때부터 이미 짐작하긴 했지만.

어쨌든 신문 기사에 따르면 다가오는 1월 30일에 대영제국과 일본제국 간의 동맹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한다.

덕분에 세상은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척이나 시끌시끌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반응들도 가지각색이었다.

[영일동맹으로 급격하게 흔들리는 민심. 일부 시민들은 ‘왕자가 방앗간 딸과 결혼하는 꼴’이라 말하며 조소해.]

우선 영국인들은 담담한 정부의 태도와는 달리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영국인들이 보기에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언제나 고고 하게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해온 나라였다.

그런데 그 영국이 유럽의 열강도 아니고 아무리 높게 쳐줘 봐야 극동의 신흥강국에 불과한 일본과 동맹을 맺다니.

이게 충격적인 일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충격적인 일이겠는가?

[영일동맹의 발표에 일본인들 환호! 우리도 이제 어엿한 열강의 일원!]

물론 영국인들의 반응과 달리 일본인들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물론 일본인들이야 자신들이 그 대영제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하면서도 자랑스럽겠지.

아마 지금쯤 일본 열도 전체가 국뽕을 치사량으로 들이키고 있을 거다.

드디어 일본이 서양 열강들에게 인정받았다고 말이다.

물론 미래를 아는 내가 보기엔 어디까지나 김칫국에 불과했다.

[러시아 제국, 영일동맹을 극렬하게 비판. 니콜라이 2세, 러시아는 중국과 한국의 영토와 독립을 보장할 것이며 영일동맹이 이를 침해할 경우 무력으로라도 응징할 것!]

그리고 러시아는 당연하게도 분노를 토해내며 영국과 일본을 향해 연일 비판을 쏟아냈다.

그야 바보가 아닌 이상, 영일동맹이 누구를 노리고 결성되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프랑스 제3공화국, 영일동맹에 대해 입장 발표. 프랑스는 자국의 동맹인 러시아 제국을 지지!]

그리고 영일동맹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쪽은 영일동맹 그 자체에 분노했다기보단 어디까지나 러시아가 동맹이기 때문에 나선다는 느낌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렇게 영일동맹을 두고 관련 국가들이 상반된 반응을 내놓는 가운데, 독일제국은 조용했다.

영일동맹은 어디까지나 러시아 제국을 겨냥한 것이지, 독일 제국과는 그다지 큰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독일 제국이 조용하다고 빌헬름 2세까지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영국인들은 정녕 저 비열한 섬나라 원숭이들과 손을 잡을 생각인가!”

빌헬름 2세가 분노어린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영일동맹의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이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우리 빌리는 영일동맹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빌헬름 2세는 일본을 싫어하니까.’

그것도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 아예 혐오 수준이었다.

애초에 황화론에 빠지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었고, 일본에 핍박당하는 신세였던 대한제국에 묘하게 우호적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덕분에 아침부터 포츠담으로 소환된 뷜로 총리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 그리고 왜 여기 있는지 모를 나는 온종일 영국과 일본에 대한 빌헬름 2세의 비난 연설을 묵묵히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지친단 말이지.’

결국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한스, 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느냐. 이건 배신이다. 유럽에 대한, 서구문명에 대한 영국의 배신이란 말이다!”

“당장 몇 달 뒤면 기다리시던 신형 전함이 완성되지 않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올여름 초에 건조가 완료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진가가 제대로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원 역사의 드레드노트가 세상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영국이 받을 충격은 빌헬름 2세가 영일동맹으로 받았던 충격(?)의 몇 배는 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분노를 참으시지요. 영국에 한 방 먹이는 것은 그때 가서 원 없이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끄음···. 그건 그렇지만 나는 저 섬나라 원숭이 놈들이 저리 기고만장한 것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빌헬름 2세가 여전히 불만스럽단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내 쪽을 향해서 말이다.

“한스, 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기발한 의견을 내곤 했으니 어디 녀석들의 콧대를 꺾어줄 방도를 생각해봐라.”

“예. 폐하.”

나는 그리 말하며 카이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빌헬름 2세는 그제야 조금은 화가 풀린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들기고 방을 나갔다.

어째 마법의 소라고둥이 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다.

이리 말할 정도로 카이저가 나를 신뢰하고 있단 소리니까.

‘역시 지난번 순친왕 때의 일이 컸어.’

나는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함께 방에 덩그러니 남겨진 뷜로 총리, 그리고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을 바라봤다.

“또 무슨 짓을 할 생각인가?”

뷜로 총리가 눈을 찌푸리며 대뜸 그렇게 말했다.

하긴 뷜로는 나로 인해 괜한 고생했던 적이 많았으니.

‘하지만 이건 반드시 해야 해.’

작년 에드워드 7세를 처음 만났을 때, 계획을 하나 세웠다.

잘하면 독일의 답답한 외교 상황을 해결할 기회가 될 수 있고, 생각처럼 일이 잘 안풀렸을 때도 적어도 최악은 무마할 수 있는 계획 말이다.

계획의 제1단계는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가 승리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영국에 심어주는 것.

그리고 이제는 계획의 2단계를 진행할 때였다.

그렇기에 나는 뷜로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독일 제국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끄응···. 올해도 조용히 보내긴 글렀군.”

“우선 남작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총리. 과정이 어떻든 결과는 항상 좋지 않았습니까?”

순친왕 때의 일로 나와 상당히 친해진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그리 말하며 나를 두둔했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선 총리님과 외무장관님께서도 우리 독일의 현 외교 상황이 썩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실 겁니다.”

“시작부터 아픈 곳을 찌르는군.”

물론 독일 제국에 동맹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 제국은 현재 삼국동맹의 일원이자 리더였다.

그 삼국동맹의 일원들이 하필이면 도움이 되긴커녕 독일을 제1차 세계대전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이미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으며 탈주 각을 보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이라서 문제지.

“프랑스는 일단 우리의 명백한 적입니다. 러시아는 프랑스의 동맹이고요. 그리고 삼국동맹은 사실상 우리 독일 제국이 홀로 이끌어가고 있는 형국이죠.”

거기다 열강 중 유일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던 영국마저 빌헬름 2세의 즉위 이후 확장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독일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독일 제국의 외교적 고립이 더욱 심화할 것은 불 보듯 뻔했고 말이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대체 뭔가?”

“러시아를 도와야 합니다.”

“···뭐? 지금 자네 제정신인가?”

러시아를 도와야 한다는 말에 눈을 찡그리는 뷜로 총리.

예상한 반응이다.

그야 러시아 제국은 프랑스의 동맹이었고 미래에 프랑스를 도와 독일 제국의 적이 될 확률이 높은 가상적국이었으니까.

하지만 국제외교에 있어 확실한 아군과 확실한 적은 존재하지 않는 법.

국익에 따라 언제든 상황은 바뀔 수 있었고, 지금이 그리해야 할 때였다.

“충분히 제정신입니다. 왜냐하면 영일동맹이 확정된 이상, 조만간 극동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 터질 것이고 그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러시아 제국이 일본에 패배할 것이라고? 올해 들어, 아니 20세기 들어 내가 들은 말 중에 가장 미친 소리구만.”

“내 생각도 총리와 같네. 남작. 러시아 제국이 속이 꽤 썩어 문드러진 나라라는 건 나도 아네. 하지만 그래도 열강이고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강대국이야.”

뷜로 총리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회의적인 모습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일본이 러시아 제국을 이길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다.

“물론 전체적인 국력만 따졌을 때, 아시아의 신흥강국에 불과한 일본이 러시아를 무력으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두나라 간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전장은 분명 극동이 될 것입니다. 유럽이 아니란 말입니다.”

러시아의 영토는 넓다.

넓어도 너무 넓은 나라다.

나폴레옹 전쟁이나 대조국전쟁 같은 방어전에서는 이 점이 강점으로 작용했지만, 극동이 전장이 된 러일전쟁에선 이게 독이 되었다.

“확실히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 극동에서 싸우겠지.”

“예. 그리고 극동 러시아군은 유럽 러시아군과 달리 기껏해야 민병대 수준밖에 안 되는 군대입니다. 게다가 본토와 거리가 거리이다 보니 지원이나 보급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한 상태죠.”

이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다롄에 주둔 중인 러시아 태평양 함대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2선급조차 못 되는 3선급 함대에 불과했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일본 연합함대의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조차 못 한 채 전쟁 내내 항구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러시아 해군 최강의 전력이었던 발트 함대가 태평양 함대를 구원하고 제해권을 되찾기 위해 극동으로 출격했지만,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쓰시마 해전에서의 대패.

그리고 전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이건가.”

나름대로 군 경력이 있는 뷜로 총리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는지 아까와 달리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일본군은 장교들의 자질이나 능력은 둘째치더라도 병사들 자체는 사기도 높고 상당히 잘 훈련된 강군입니다. 지리상 보급 면에서도 러시아보다 훨씬 유리하고요. 거기다 이번 영일동맹으로 인해 영국 또한 일본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할 테고 말입니다.”

“으음, 확실히 자네 말대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하면 러시아의 확장 정책에 제동이 걸릴 것입니다.”

19세기 내내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벌어졌던 첨예한 대립의 끝.

그레이트 게임의 종말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확장을 두려워할 이유가 사라진 영국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겠죠.”

“우리 독일로 말이군.”

“네. 영국과 독일 간의 동맹 논의도 사실상 파탄 난 상태니까요.”

“크흠. 왜 다 끝난 일을 꺼내고 그러나.”

내가 눈을 흘기자 뷜로 총리가 헛기침하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과의 동맹 논의가 사실상 실패한 것에는 뷜로의 책임도 있었으니까.

아니, 상당히 컸다.

시종일관 오만하게 굴며 영독동맹을 주도하던 영국 식민지 장관 조셉 체임벌린과 보어전쟁 문제로 각을 세우다 이야기를 파투 낸 장본인이 다름 아닌 뷜로 총리였으니까.

물론 이는 체임벌린을 제외한 영국 정부 자체가 영독동맹에 회의적이었던 것도 컸지만 말이다.

“러시아는 지금 무너져선 안 됩니다. 러시아가 무너지면 영국은 우리 독일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 영국의 정치가들은 독일의 위협을 아직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겐 독일 제국보다 여전히 대양으로 나오려고 애를 쓰는 러시아 제국이 더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엔 이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이는 영불협상, 영러협상으로 이어지고 결국 왕따가 된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렇기에 러시아는 아직까진 무서운 불곰의 모습을 유지해줘야만 했다.

아직까진 말이다.

“그래도 러시아를 지원하는 건 좀···.”

하지만 뷜로 총리는 여전히 망설이며 말을 흐렸다.

뷜로 또한 융커.

그리고 융커들은 러시아를 싫어했다.

“총리님. 이대로 독일 제국의 고립이 심화하면 안 된다는 것은 총리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 역사에서 이 양반이 그걸 해결하기 위해 벌인 일이 하필이면 ‘모로코 위기’라서 문제지.

“게다가 이런 일시적인 지원으로 러시아가 지나치게 강해질 일도 없지 않습니까. 지원은 극동에 한정해서 딱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하지 않을 정도로만 해주면 그만이니까요.”

“흠.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군요.”

“으으음······.”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내 설득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뷜로 총리의 마음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거의 다 넘어왔다.

“총리님. 러시아는 독일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존재이지만 아직 우리에겐 그들이 필요합니다.”

적대적 공존.

독일 제국의 완전한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러시아 제국과의 적대 적 공존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국 내 쐐기를 박는 듯한 단언에 뷜로 총리가 한숨 쉬며 두 손을 들었다.

“후. 알겠네. 알았어. 그럼 군에 한 번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지. 어쨌든 그들의 동의가 없으면 지원이고 뭐고 할 수 없으니까.”

작가의말

여담이지만 영독동맹이 파탄난 것은 체임벌린이 보어전쟁을 옹호할 때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군의 행동보다 영국군이 더 신사적이다’라고 발언한 것 때문에 뷜로와 독일이 폭발한 것이 결정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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